미국이 지난주말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우리 정부에 F15-K 강매, 아프가니스탄에의 전투병 파견, 주한미군경비 부감 증가 같은 우월주의적 압박을 가한 것으로 알려져 큰 물의를 빚고 있다.
정부는 이 가운데 주한미군경비 추가부담에는 합의했으나, F15-K 구매나 전투병 파견 같은 무리한 요구에 대해선 구체적 답변을 회피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부당한 3대 압박**
김동신 국방부장관은 1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가진 제33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 직후 가진 한미 국방장관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국측으로부터 차세대전투기(FX)에 대한 의견이 제시됐다”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을 피하며 “성능, 기술이전, 절충교역, 가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국익 차원에서 결정하겠다고 답했다”고 덧붙였다.
국방부 관계자는 그러나 SCM에 참석한 더글러스 J 페이스 미국방부 정책차관이 “한반도에서 F15가 매우 좋은 무기이자 한국의 국익에 가장 적합한 항공기로 본다”며 “성능과 상호운용성 측면에서 한국측이 F15를 고려할 경우 최선을 다해 최대의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 역시 이날 회의에서 “전쟁을 해보니 연합작전시 상호운용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우회적으로 F15 매입을 독려했다고 덧붙였다.
아프가니스탄에의 파병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정부는 1백50명 규모의 연락장교 및 의료지원 파병을 미국과 합의했다.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전투병력 파견문제와 관련해선 김동신 국방장관이 “논의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실무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경제신문은 17일 국방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 “의료지원단 등 비전투병 파견을 위한 한.미간 실무협의중 한국군의 아프간 유엔평화유지군(PKO) 참여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밖에 주한미군 주둔경비 부담과 관련해선 우리 정부가 내년에 올해보다 10.4% 증가한 4억9천만달러를 부담키로 합의했다. 또한 오는 2003년과 2004년에는 전년대비 기본인상률 8.8%에 종합물가지수(GDP디플레이터)를 가산한 비율만큼 인상키로 합의했다.
***우월주의 차원을 넘어선 제국주의적 압박**
이번 한미협의회에서 가해진 미국의 압박은 우리나라와 미국간의 ‘힘의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또다시 보여주고 있다.
우선 F15-K 구매 요구는 그동안 본지를 위시한 국내 언론과 국내외 군사전문가들이 숱하게 지적해왔듯 ‘상식선’을 크게 벗어난 미국 국익 일변도의 압박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판단의 근거는 부지기수로 많다.
우선 기능 문제부터 살펴보자. 미국의 공군협회가 발행하는 에어포스 매거진 10월호는 “한국 공군의 FX사업에 참여한 유로파이터 타이푼, 프랑스 라팔, 러시아 수호이 35가 미국 보잉사의 F15보다 우수한 전투기”라고 평가했다. 이같은 미공군 자체의 평가는 F15가 70년대초에 개발된 노후 전투기로 다른 후보기종보다 한 세대 뒤진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 다음, F15의 ‘생명’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F15를 생산하고 있는 미국 보잉사는 지난 10월26일 사운을 걸고 도전한 미국의 차세대전투기(JSF)사업에서 경쟁사인 록히드 마빈에게 참패해 더 이상 전투기 사업부문의 존립 자체가 의문시되는 창사이래 최대위기를 맞고 있다. 보잉사의 위기는 이미 미국 주식시장에서 보잉사 주가가 50%나 폭락한 반면, 록히드 마빈은 정반대로 50% 가까이 오른 대목에서도 잘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보잉사 전투기 사업부문의 마지막 ‘땡 처리’ 제품격인 F15 구입을 우리나라에 압박한다는 것은 우월주의적 압박을 넘어선 제국주의적 압박에 가깝다는 게 지배적 여론이다.
이밖에 미국공군이 차세대전투기로 선정한 JSF가 보잉사 F15의 경쟁제품인 유로파이터나 라팔 같은 1인 조종, 초경량 초음속, 스텔스 기종이라는 점 역시 그동안 보잉사가 중후장대함을 F15의 강점이라고 주장해온 대목과 정면 배치되고 있다는 등 F15의 구매 불가 요인은 부지기수로 많다.
***중동문제에 잘못 개입하면 에너지 공급이 끊길 수도**
실무선에서 논의되고 있다고 보도된 아프간에의 전투병 파견 요구도 문제가 많기란 마찬가지다.
아프간 전쟁은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갖고 있기는 하나, 엄격히 정의 내리면 그동안 미국의 패권주의적 외교가 자초한 ‘미국문제’다. 이런 사안에 우리 전투병을 보낸다는 것은 명분도 설득력도 없다.
더욱 아프간 전쟁은 현재 복잡한 양상을 맞고 있다.
지난 96년까지 4년간 집권기간중 5만여명을 죽일 정도로 무자비한 통치를 한 결과 탈레반정권에게 권력을 빼앗겼던 북부동맹이 카불을 장악하면서 자칫 잘못하다간 과거 캄보디아에서의 크메르 루즈의 공포통치로까지 발전할 위기국면을 맞고 있다.
게다가 석유수입선 다변화에 실패한 결과 아직까지도 전체 석유수입의 70%를 중동지역 산유국들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자칫 ‘문명간 전쟁’으로까지 비화할 위험성이 큰 이번 아프간 사태에 개입해선 안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다. 실제로 과거 이스라엘과 이슬람국가들간의 중동전쟁때에도 우리나라는 석유공급을 우선시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내에 들어와 있던 이스라엘 대사관을 축출한 바 있다.
요컨대 아프간에의 전투병력 파견이란 결코 미국의 압력 운운하는 차원에서 간단히 처리해서는 안되는 사안인 것이다.
이밖에 우리나라의 내년도 국방비 증액률 6%의 거의 배에 가까운 10.4%의 주한미군 주둔경비 부담증가 합의도 작금의 어려운 국내경제 상황과 양국간 형평성 측면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 시민단체 등의 일반여론이다.
김대중 정부는 지금 정권임기를 1년정도 남겨두고 심각한 레임덕 현상을 겪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시점에 국익과 관련된 중차대한 결정은 검토에 검토를 거듭해 신중히 결정해야 마땅하다.
그런 면에서 내년 3월말까지 최종확정짓겠다는 차세대전투기 사업이나 아프간에의 전투병력 파병 등의 사안은 반드시 국민의 사전여론을 묻고 결론을 내려야 할 중차대한 사안이다. 그것만이 지금 김대중 정부가 해야할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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