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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성 함정' 가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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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유동성 함정' 가까이 왔다

채권시장 패닉상태, 한은 최초로 위기 인정

지난 11일, 채권시장은 갑자기 ‘패닉(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한국은행이 이날 콜금리를 4%에서 동결하기로 하자, 이를 저금리 정책이 바뀌는 신호로 해석한 딜러들이 앞다퉈 '팔자' 주문을 내면서 채권 수익률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한은과 재정경제부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수차례 해명했음에도 12일까지 패닉적 분위기는 계속됐다. 15일 이후 상황을 자신 못한 재경부와 한은 관계자들은 토요일인 13일 긴급 금융정책협의회를 열어 한은이 1조5천억규모의 채권을 사들이기로 하는 등 재차 시장달래기에 나서야 했다.

지난 주말의 소동을 국내 채권딜러들의 미성숙에 따른 일회성 해프닝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다. “국내외의 긴박한 경제상황을 보거나 국내 정치일정을 고려할 때 지금이 금리를 올릴 수 있을 때냐. 국내 채권딜러들의 수준에 문제가 있다”고 한 재경부 관계자는 불평을 토로했다. 맞는 지적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채권시장이 들썩이던 12일 오전 참석한 전국여성대회 개회식에서 “정부는 재정과 금융을 융통성 있게 운용, 경기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아내겠다”고 밝혔다. 분명한 저금리정책 유지선언이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선 추가 금리인하 가능성까지 시사한 발언이었다.

***“한은의 금리인하 기능이 이미 마비된 게 아니냐?”**

그렇다고 해서 이번 소동의 원인을 딜러의 자질 문제 정도로 간단히 넘길 사안만도 아니다. 지금 시장 밑바닥에는 “한은이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수 없는 한계상황에 봉착한 게 아니냐”는 상황인식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한 채권딜러는 시장의 상황인식을 이렇게 전했다.
“현재 4%인 콜금리를 3%대로 낮출 경우 물가상승률보다 콜금리가 낮은 사상초유의 ‘마이너스(-) 콜금리’ 시대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한은이 이번에 콜금리를 동결한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금리가 더 이상 내리지 않고 오를 것이다.”

“앞으로 채권 유통수익률이 오를 것이라는 판단은 잘못이나 시장의 ‘한은 내심읽기’는 비교적 정확하다”는 게 한은 고위관계자의 고백이다.
한은 고위관계자는 15일 “시장의 관측대로 지금 한은이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의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한은이 아무리 금리를 내려도 최대 자금소비처인 대기업의 자금수요가 사라져 효과를 못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경우 단기금리를 내려도 장기금리가 일정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 단기금리를 내리면 장기금리도 함께 급락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기업의 자금수요가 사라졌다는 증거로 해석된다”고 덧붙였다.

한은 고위관계자가 ‘유동성 함정’의 가능성을 시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은은 그동안 이럴 가능성을 극구 부인해왔기 때문이다.
경제학 사전은 유동성 함정을 ‘명목금리를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상황’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전적 의미일뿐, 구체적으로는 통화당국이 아무리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어도 돈이 기업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은행금고나 개인지갑 속에서 맴도는 현상, 이른바 ‘현금퇴장’ 현상을 가리킨다. 이같은 현금퇴장은 금리를 통한 중앙은행의 경기조절 능력이 마비되는 공황적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올 들어 한은이 그렇게 금리를 낮추고 은행들도 이에 부응해 수신금리를 낮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4분기(7~9월)에는 은행권과 투신권에 각각 25조6천억원, 25조8천억원 등 도합 51조4천억원이 몰려들었다. 돈이 갈 곳을 못찾아 은행 및 투신사의 금고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국내은행중 수신 증가액이 가장 많은 주택은행의 윤재관 전략기획팀장은 “은행들은 마땅한 대출처를 못찾아 몰려드는 돈을 주로 채권에 운용하고 있다”며 “이렇듯 앞다퉈 채권을 사다보니 콜금리 인하에 비례해 채권수익률이 급락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동성 함정 근처에 아주 가까이 온 것은 사실이다.”**

한은의 또다른 임원도 ‘유동성 함정’의 도래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미 유동성 함정에 빠져 들어가 있다는 주장도 일각에 있으나 아직 들어가진 않았다. 그러나 아주 가까이 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지난 8월 콜금리를 인하할 때부터 한은 내부에서는 ‘유동성 함정이 가까이 왔다. 이제 금리를 통해 경기를 조절할 여유가 얼마 안 남았으니 아껴쓰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최근 조사결과 이달부터 내년 9월까지 1년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3.5%로 전망됐다”며 “현재 4%인 콜금리를 추가로 내릴 경우 일시적으로 ‘마이너스 콜금리’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콜금리 3.5%선이 금리인하의 마지노선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그러나 마이너스 콜금리 상태가 지속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유동성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소비를 일으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상황인식은 재경부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문제는 소비를 일으킬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대목이다.
현재 재경부와 한은 등이 마련중인 소비진흥책은 감세와 재정지출 두 가지이다. 한은 임원은 그러나 내부의 고민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재정정책에도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

“감세는 당장 정책의 효과가 피부에 와 닿기는 하나, 중기재정을 악화시킬 위험성이 크고 한번 세금을 내리면 올리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재정지출은 주로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되기 마련인데, 영종도 국제공항 등 대형 신규사업이 모두 끝났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신규사업이 아닌 진행중인 계속사업에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계속사업의 경우 갑자기 돈을 더 집어넣는다고 공정이 빨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경기부양 효과가 적은 게 문제다.”

“최근 국회와 언론에서 ‘정부가 입으로만 경기부양을 말할뿐 실제로는 재정수지 흑자가 늘었다’고 비판하나, 이 또한 실상을 모르고 하는 비판이다. 정부의 재정수지가 늘어난 원인을 분석해보면 국민주택기금 대출등 재정융자 부문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 즉 시중은행들이 앞다퉈 대출금리를 낮추다보니 소비자들이 굳이 국민주택기금을 쓸 일이 없어져, 이 돈이 다시 국고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제3차 공적자금을 조성해 기업.금융구조조정을 앞당기면 경기가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럴 경우에도 그 돈이 기업으로 안 흘러들어가고 금융권에 머무를 게 확실한만큼 당장 가시적인 경기부양 효과를 기대하기란 힘들어 보인다.”

***유동성 함정에 빠지면 벗어나는 데 30년 걸려**

산업은행은 지난 12일 발표한 ‘미국 보복공격 이후의 채권시장’이라는 보고서에서 최근 통화당국 및 정부가 직면한 딜레마를 지적하며 ‘제2의 일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공개리에 제기해 시장의 관심을 끌었다.
보고서는 금리정책과 관련해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금리수준이 크게 낮아 어려움이 예상된다”며 “이미 콜금리 조정의 의미는 심리적인 것이외에는 없을 정도로 금리 인하정책의 효율성이 반감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이어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 경제 역시 금리가 계속해서 사상 최저수준을 갱신하고 기업.금융 구조조정에 따른 막대한 재정자금 수요가 있는 상황이어서 재정.금융정책을 통한 경기부양에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과연 이같은 유동성 함정 위기국면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이다.
한은 관계자는 “경기회복시기를 내년 1.4분기부터 4.4분기까지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로 누구도 정확한 회복시점을 점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내년 4.4분기 이후에라도 경기가 회복된다면 다행이다. 자칫 상황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엄존하기 때문이다.

전미경영학회(NABE)의 계간지 비즈니스 이코노믹스는 지난 3월 일본의 장기경제침체를 ‘유동성 함정’이란 관점에서 심층분석한 논문을 실은 바 있다. <관련기사 3면>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지난 1929년 세계대공황때 한번 낮아진 미국의 기준금리가 대공황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까지 자그마치 30년이 걸렸다는 사실이다. 대공황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같은 군수경제 시스템이 작동됐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빠진 유동성 함정에서 벗어나기란 그만큼 힘들다는 경고다. 이 논문은 이미 일본이 이같이 심각한 유동성 함정에 빠져들었으며, 일본과 유사한 시스템을 갖고 있는 국가들이 제2의 일본이 될 위험성도 상존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림>

지난 99년 미국의 폴 크루그먼 교수는 ‘유동성 위기에 대한 사고’라는 논문에서 “우리는 그린스펀이나 뒤센베르그, 하야미 같은 중앙은행 총재들이 지배하는 중앙은행가의 시대(the Age of Central Banker)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유명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을 수정해야 할 때가 됐다는 게 국내외 경제학계의 공통된 주장이다. 더 이상 금리나 통화정책만 갖고서는 위기를 관리하기 힘든 시대가 된 탓이다. 정부와 한은이 초비상시국이라는 위기인식 아래 동원가능한 모든 정책수단을 찾아내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유동성 함정이란 한번 빠져들기는 쉬워도, 벗어나기란 대단히 어려운 죽음의 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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