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연초부터 세 차례 콜금리를 인하하면서 하반기에는 좋아지리라던 경제가 도리어 하반기 들어 더욱 나빠졌다. 그러자 지난 8월 학계와 언론계 일각에서 ‘유동성 함정’론이 제기됐다. “금리를 계속 내려도 경기침체가 심화되는 작금의 상황이 계속 되다가는 일본의 재판(再版)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였다.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 등은 즉각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한국은행은 8월17일 “우리나라의 경우 한은이 금년 들어 세 번에 걸쳐 콜금리 목표를 인하(5.25%에서 4.50%로)하는 등 저금리 정책을 펴고 있음에도 경기부진이 계속되자 유동성 함정이 아닌지 하는 주장이 일부 제기됐다”며 “그러나 우리나라의 콜금리는 추가 인하 여지가 있고 유동성 함정에서 나타나는 통화의 퇴장현상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므로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고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은은 9.11사태가 발발하자 19일 콜금리를 4.0%로 0.5%포인트나 추가 인하했다. 현대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미 연준(FRB)이 연내에 금리를 0.5~0.75%포인트 추가인하하면 한은도 그 뒤를 따라 금리를 내려 연내에 사상초유의 3%대 초저금리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의 결과 미 연준이 금리를 내리면 곧바로 전세계 중앙은행들이 그 뒤를 따라야 할 정도로 좋게 말하면 시장의 통합성, 나쁘게 말하면 미국에의 종속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한은의 역대 통화정책을 볼 때 금리는 내리기는 쉬워도 올리기는 힘든 법”이라며 “3%대 초저금리시대가 장기화하면서 우리도 유동성 함정에 빠져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은이 콜금리를 내리면 시중은행들도 따라 수신 및 대출금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한은의 금리인하 직후 시중은행들도 금리를 내려, 소비자물가상승률보다 은행 수신금리가 낮은 ‘마이너스 금리’현상이 한층 심화됐다.
이론적으로는 마이너스 금리시대가 열리면 은행에서 돈을 빼내 주식이나 부동산 등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최근 시장 돌아가는 동향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9.11사태 직후 며칠간 주식고객예탁금이 큰 폭으로 늘었지만 이는 단기차익을 노린 투기성 자금이라는 게 증시의 지배적 관측이다. 풍부한 유동성 공급에도 불구하고 증시가 맥을 못출 경우 곧 빠져나올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9.11사태 이후에는 한동안 단기자금이 모여들던 부동산에서조차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8월까지만 해도 과열양상을 보이던 오피스텔 및 아파트 분양열기가 급랭하고 있다. 증시와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자, 시중의 돈들은 마이너스 금리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돈을 빼낼 수 있는 은행 수시입출식예금(MMDA)과 투신 머니마켓펀드(MMF)로 몰려들고 있다. 돈이 ‘갈 곳’을 잃은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에 따른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돈이 꾸역꾸역 은행에 모여드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현금퇴장의 전조(前兆)’ 또는 ‘현금퇴장의 또다른 표현’으로도 해석가능하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29년 세계대공황 때에는 은행들조차 언제 쓰러질지 몰라 사람들이 돈을 집에 갖다 놓았었다. 이것이 고전적 의미의 현금퇴장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경우는 예금자보호법에 따라 설령 돈맡긴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맡긴 돈에 대해 1인당 5천만원까지 보장을 해주고 있다. 가족친지 등의 명의를 빌릴 경우 거의 무한대의 보장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은행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아직 현금퇴장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한국은행의 분석은 자의적이다. 마이너스 금리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은행에 돈이 몰려들며 자금이 단기부동화하는 현상은 여차직하면 ‘현금퇴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불길한 전조라는 점을 정책당국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아직까지는 시중자금들이 마땅한 투자처만 보이면 즉각 달려가기 위해 은행 등에 대기하고 있는 국면으로 현금퇴장을 말할 때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앞으로 미국경제가 장기침체국면에 들어가면서 세계경제가 동반불황의 늪에 빠져든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으로 우려했다. 이 관계자는 “IMF사태를 겪으면서 보유현금이 없어 죽다 살아난 기업들이 최근 투자를 멈춘 뒤 현금보유를 늘리고 은행돈을 안 쓰려 하거나 개인들이 소비를 줄이고 현금비중을 높이는 현상은 작금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크다”고 덧붙였다.
IMF사태 발발후 청와대 경제수석, 재정경제부 장관 자문관을 지냈고 현재는 일본 도쿄 아시아개발은행(ADB) 연구소에 나가있는 박재하 박사(한국금융연구원)는 “지금 우려되는 상황은 1차 오일쇼크때와 같은 저성장속의 고물가라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아니라 지난 10년간 일본이 경험한 디프레션(depression)”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 경제는 지금 내부 구조조정이 미진한 가운데 세계 동시불황, 내년말 대통령선거라는 국내외 악재가 겹치는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다”며 “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읽고 IMF사태 당시와 같은 비상적 위기관리 시스템을 가동해야 할 것”으로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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