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국민연금 자문위원회는 2070년까지의 국민연금 장기재정추계를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현재의 조건을 유지한다면 2041년에 국민연금의 지출이 수입을 넘어서며 2057년에 기금이 고갈된다. 필자는 2035년부터 국민연금을 수령을 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대로라면 내가 받을 국민연금은 2041년부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걱정스러운 일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일부에서는 국민연금의 투자수익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는 반면, 고수익을 추구하다 국민연금이 거덜 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대신 보험요율을 높여 국민연금의 수입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게 내고 너무 많이 가져가는 현재 운영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국민들의 노후 삶에 중대한 영향을 줄 문제이기 때문에, 20~30년 이상의 미래 일이지만 진지하고 논의해야 한다.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되고 있는 듯 하다.
난데없이 국민연금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한국에서 20~30년 이상의 장기 정책을 논의하는 경우가 대단히 드물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대단히 예외 경우다. 경제 주체는 장기 투자보다는 단기 이익을 우선하는 선택에 익숙하며, 정치권은 4-5년의 임기와 재선 관심으로 장기 과제에서 시야를 제한받기 일쑤다. 말은 많지만 영향력은 제한적인 연구자나 사회운동도 그마저도 '현실성’이라는 요구 아래에 장기적 과제는 뒤로 미뤄두기 십상이다. 그나마 믿을 곳은 기술관료들의 ‘합리성’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위험하면서 우울한 생각을 떨치기 쉽지 않다.
2015년에 타결된 기후변화에 관한 파리협정에는 주목할 만한 조항이 들어 있다. 당사국들이 2020년까지 2050년까지의 '장기저탄소발전전략(LEDS)'을 수립하여 제출하도록 한 것이다. 대개의 관심은 2030년을 목표로 하는 온실가스 감축계획(NDC)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무엇보다도 향후 30년 이상의 미래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이 전략의 수립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작년 송도에서 발표된 IPCC의 1.5도 특별보고서가 2050년까지 전지구적으로 이산화탄소의 순배출이 제로(0)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한 것을 상기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다.
32년 후, 2050년은 매우 먼 미래라고 생각하기 싶다. 그러나 2041년부터 국민연금에 적자가 시작되고 2057년에 고갈된다는 먼 미래의 이야기에는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노후 보장책인 국민연금 고갈이라는 비극을 피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한다. 따지고 보면, 장기저탄소발전전략이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대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지구 평균기온이 3~4도 오르고, 더 극심한 더위와 강력한 태풍, 해안선 침수와 식량 부족이 예상된다. 그러니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로 만들기 위해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국민연금 고갈과 기후재앙 중에 무엇이 사회와 개인에게 더 비극일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대비해야 필요성만큼은 동일하다.
물론 기후변화는 국민연금의 운명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될 더 큰 사건이 될 것이다. 기후변화(와 대응정책)는 늘어나기만 하는 사람들의 수명과 지속되어 왔던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미래 국민연금의 지출과 수입에 영향을 미칠 요인이 된다. 국민연금만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책 이름처럼, 기후변화는 산업, 교통, 주거, 문화 사회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대응 정책은 지금까지 사회가 조직되고 개인이 살아왔던 방식을 재고하게 만들 것이다.
국민연금 고갈보다 기후재앙이 더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있다. 먼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기후변화 문제를 수용하고 그 대응 논의를 회피하는 것만은 아니다. 막연하지만 어렴풋이 짐작되는 기후변화의 공포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과업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기업, 청와대와 국회, 정부, 시민,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문제이지만, 이불을 뒤집어쓴다고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용기내서 계산부터 해봐야 한다. 국민연금 고갈 시점을 추산한 것처럼, 기후재앙을 피하려면 한국 사회에 주어진 이산화탄소 배출 한계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게 시작이다.
'탄소예산(carbon budget)'이라는 것이 있다. 예산이라고 해서 오해가 생길 수 있는데, 돈 이야기는 아니다. 심각한 기후변화를 피하기 위해서 제한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의미한다. 지구적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탄소예산은 달라진다. 평균 기온상승을 2도 이내로 막겠다고 하였을 때, 2011~2100년까지 허용되는 전지구적 탄소예산은 1000Gt으로 추산된다(66%의 확률). 매년 50Gt에 가까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기 때문에, 탄소예산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게다가 IPCC의 1.5도 특별보고서에 의하면, 2018년부터 계산하였을 때 탄소예산은 420Gt에 불과하다(66%의 확률). 마음이 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탄소예산은 얼마나 주어지게 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확인된 것이 없다. 어느 누구도 각국의 탄소예산을 계산해서 할당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파리협정은 교토의정서처럼 하향식으로 각국의 감축목표를 정하지 의무를 부여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2030년 자신의 목표배출량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목표를 다 합치니, 3도 이상 지구기온이 상승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 같이 망하자는 이야기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참고로 말하자면, 한국 정부의 온실가스 2030년 온실가스 목표배출량 5억 3600만톤은 2도 목표를 달성하기에도 대단히 불충분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급한 해외 단체와 기관들은 탄소예산 개념에 입각하여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세울 것을 촉구하면서, 주요 국가들의 탄소예산을 계산하여 발표하고 있다. 한국은 이산화탄소배출량 순위 7~8위인 '주요국가'다. 스페인 한 연구팀이 '기후정의' 모델을 통해서 내놓은 추산에 의하면 한국 탄소예산(2011~2100)은 9.9Gt(99억톤)이다. 하지만 이 연구팀은 전지구적 탄소예산을 많이 잡고 있어서, 한국의 탄소예산도 넉넉하게 계산된 점을 유의해야 한다.
한국의 2016년 온실가스 배출량이 대략 7억톤 정도가 되기 때문에, 위에서 계산된 탄소예산을 받아들일 경우 14년 후는 한국의 탄소예산은 고갈이 된다. 대략 짚어보면 2025~2030년 쯤이다. 국민연금보다 훨씬 빠른 시일 안에 파국을 맞게 된다. 또 국민연금과 다르게, 원리적으로 탄소예산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로지 배출을 절감해야 할 뿐이다. 그러나 배출을 줄이는 방법은 에너지 효율화와 재생에너지 이용 확대 등 비교적 충분히 예시되어 있어, 온실가스 감축을 시작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후변화 대응의 시급성과 함께 구조적 변화의 필요성이다. 제한된 탄소예산 안에서는 산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세워야 할 2050년 장기저탄소발전전략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대한 한국 사회의 상상이자 결의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타던 자동차, 살아왔던 집, 월급을 주던 기업 등, 모두 변화시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 프랑스 노란조끼의 성난 시위와 마주치지 않을 방안, 나아가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 방안도 찾아야 한다. 어쩌면 장기저탄소발전전략은 한국 사회의 장기 개혁 전략일지도 모른다. 과한 기대일까?
탈핵을 천명하고 에너지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혁신적 모습에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발 더 들어가서 보면, 참으로 왜소하다. 따져 보면 2082년의 탈핵 목표와 해외 원전 수출이라는 유약하고 모순적인 혁신이며, 이전 정부에서 결정되고 관료, 기업 그리고 지역 토호들의 이해관계와 뒤엉킨 대규모 석탄발전소들의 건설 계획이 거의 그대로 추진되는 보수적 혁신이다. 어찌 환경영향평가에 통과되었을까 의구심이 치솟는 삼척 포스파워 석탄발전소 건설 계획을 보라. 이런 엇박자 속에서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과 에너지전환을 열망하는 시민들이 스텝을 밟아야 하는 형국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에게 에너지전환의 장기적 비전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미 핵심 관심사에서 밀려나면서 에너지전환 정책과 기후변화 정책이 통합되지 않고 겉돌고 있는 상황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이런 비판이 별로 아프지도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번 장기저탄소개발전략의 개발이 다른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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