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조선대, 세종대, 상지대, 대구대, 동덕여대, 광운대, 경기대, 덕성여대 등 사학 분쟁을 겪은 대학들이 차례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의 테이블에 올라갔다. 그로 인해 비리 사학 재단 관계자의 '귀환' 등 해묵은 문제들이 다시 불거졌다.
가장 상징적인 일은 영남대 문제일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교주'로 했던 이 학교는 10.26사태 이후 '교주의 딸' 박근혜 대통령을 사실상 새 '주인'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학교 운영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결국 학내 비리로 이사직에서 물러나는 '굴욕'까지 겪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09년 사실상 영남대의 '주인'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 요구해 관철시킨 사립학교법 개정안 때문이었다. 단지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감이 있다.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다. 보다 못한 대학교수들이 나서서 '사학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회(사해연)'를 만들고 <사학 문제의 해법을 모색한다>(실천문학사)라는 책을 냈다. 사해연과 <프레시안>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오히려 수십 년 전 논쟁을 반복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 사학들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영남대 문제다. <편집자>
▲ 영남대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 홈페이지 캡처 화면 |
영남대학교, 헌납인가 강탈인가
영남대학교는 정치권력이 대학에 직접적으로 손을 뻗쳐 운영권을 장악한 대표적인 사례다. 1967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병되는 과정을 보면 외형적으로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후락 등 대부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나 정권 실세이던 인사들이 이사회를 장악하여 각 대학 설립자를 차례로 퇴출시키는 '강탈'이 일어났다. 물론 '강탈'은 통합 과정에서 사학의 운영권을 빼앗기게 된 설립자와 그 후손들의 입장이다. 통합된 영남대를 박정희에게 넘긴 측에서는 이 과정이 강탈이 아니라 헌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절대권력자에게 자신들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대학이 '헌납'되는 데 대해 설립자 및 후손들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희 집안의 영남대학 운영권 문제는 지금까지도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있다.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측은 통합 과정이야 어찌 됐든 박 대통령의 절대권력 밑에서 1970년대에 영남대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 정통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8년 박근혜 이사가 학교 비리로 영남대학으로부터 손을 떼고 대학이 민주화된 이후에도, 학내 구성원들 사이에는 이런 암묵적인 정서가 남아 있었다. 영남대 정관의 "교주 박정희"라는 조항이 정치권이나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개정되지 않다가, 박근혜 씨가 실질적으로 복귀한 2009년에야 "설립자 박정희"로 개정된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집안은 영남대 설립에 재정적으로 기여한 바가 전혀 없기 때문에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 선생으로부터 "장물(臟物) 학교"라는 표현을 듣고 있다. 또 대구대학 설립자 최준 선생의 장손자인 최염 선생은 영남학원을 가리켜 "정수장학회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쌍둥이 원조 장물'"로 규정한다. 당시 대구대의 운영을 맡았던 이병철은 1966년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대구대학을 국가에 헌납하게 되었는데, 결국 국가가 아니라 박정희 개인에게 돌아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남대학교 재단 환수를 통한 정상화 시민대책위'의 함종호 대표는 "영남대학교의 설립 과정이 청구대와 대구대를 설립한 독립운동가인 최준, 최해청 선생으로부터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정권의 실세들)가 약탈하는 과정"이며 "영남학원의 학원 민주화 운동은 끊임없이 영남학원이라는 '공익 재단'을 '사유화'하려는 세력에 맞선 싸움"이라고 규정한다.
박 씨 집안은 영남대의 주인이 될 수 없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한 다음 박근혜 씨가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1980년 봄 박근혜 이사장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교내 시위가 계속된다. 5월 14일에는 학생 1만5000명이 경산에서 대구 시내 대명동 의과대 캠퍼스까지 40km를 행진하면서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다. 그러자 박근혜 씨는 이사장직에서 물러나 이사로 내려간다.
1988년 10월 영남대에서 국회 문교공보위원회의 국정감사가 열리고 입시 부정을 비롯한 각종 비리가 폭로된다. 뒤이어 검찰 수사로 입시 부정이 확인되어, 박근혜 씨가 파견한 이른바 4인방 가운데 하나인 곽 모 씨가 형사처벌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교수, 학생의 시위가 계속되자 11월 22일 박근혜 씨는 이사직을 사임하고 다른 이사들도 전원 사퇴한다.
이후 임시 이사 체제와 직선제 총장제를 통해 안정적으로 대학이 운영돼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에는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몇 차례 총장 선거를 거치면서 교수와 직원 사이에 파벌이 생기고 갈등과 불신이 증가한데다가 표를 의식한 집행부의 안이한 학교 운영과 교수와 직원들의 안일한 근무 태도, 중장기 발전 계획의 부재 등이 불만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걸어온 길을 영남대학도 뒤따른 셈이다.
▲ 박근혜 대통령 ⓒ프레시안(최형락) |
그렇다면 정말 사학에는 주인이 있어야 하는가? 주인이 있어야 대학은 발전하고 내실 있게 운영되는가? 그 답은 2009년 이후의 영남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른바 재단 정상화를 통해 구재단 복귀 찬성론자들은 박근혜 씨가 이사진에 참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금을 끌어들여 대학을 발전시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단 전입금이 줄어들고 교수들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어 학내의 자유로운 언로가 막히고 학교 정책에 대한 비판은 금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특히 영남이공대의 임정철 교수는 총장의 정책(교명을 '박정희대학'으로 변경하려는 시도)에 반대하고 내부 비리를 검찰에 고발했다가 징계위에 남겨져 파면을 당하였다. 징계 사유 가운데는 교수로서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까지 연구실을 지켜야 하는 복무 규정을 어겼다는 어처구니없는 항목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구재단 복귀 후 영남대에서 일어난 눈에 띄는 변화는 박정희리더십연구소와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이 설립된 것이다. 앞의 연구소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경영 리더십과 추진 정책, 새마을운동에 대한 조사, 연구, 교육 및 국제 협력 활동을 통해 영남대학교가 세계 수준의 지역 거점 대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뒤의 대학원은 대부분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출신들로 채워져 있는데 월 100만 원의 생활비와 기숙사를 제공한다. 현재의 총장은 취임사에서 새마을운동을 국제적으로 보급·확산하여 영남대학교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 철권을 휘두른 독재자의 리더쉽을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박정희 향수에 기댄 새마을운동이 과연 21세기 대학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 우려와 회의를 표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반교육적인 사분위의 월권
우리나라의 경우 기득권 세력은 여론의 압력에 밀리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흔히 사법부의 판단을 빌려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해왔다. 독재 권력의 자의적 폭력만이 지배하고 사회 정의를 담보해줄 상식과 이성이 통하지 않는 무법천지(가령 유신 시대)도 문제지만, 사사건건 국민의 생활과 직결된 모든 문제를 법관의 판단에 맡기는 법 만능주의나 법 과잉 사태(가령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끔찍하고 기괴한 상황)도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학 재단들은 전통적으로 교육부나 교육청 같은 행정 관청의 판단과 지도 관리에 따르기보다는 사학 재단의 자율성을 앞세우며 재단의 구성이나 재정, 인사, 등록금, 입학 정원 등 모든 문제를 자신들이 알아서 하도록 허용해줄 것을 주장해왔다. 그러다가 이른바 사학 재단의 전횡과 비리가 불거질 경우에도 행정적 제재나 감독을 수용하기보다는 사법적 판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았다. 그리고 자금력이 막강한 사학재단연합회라는 조직을 통해 사립학교법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개정하여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라는 위헌 소지가 있는 기형적인 기구를 만들고 이 기구를 통해 사학 재단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사법적 판단을 내려 이른바 비리 재단들의 '소유권'을 지켜준다.
사분위가 사학에 대한 임시 이사 선임 및 해임, 임시 이사가 선임된 학교의 정상화 추진 등을 심의해 해당 관할청에 통보하면, 관할청에서는 이를 집행해야 한다. 이렇게 사분위는 사학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구이다. 2007년 7월 27일 당시의 야당인 한나라당(대표 박근혜)의 집요한 요구로 사립학교법 24조의 2항과 3항에 의해 설립된 기구이다. 그리고 비리로 물러난 영남학원 구재단(박근혜)의 복귀를 결정한 2009년 6월 18일 이후 많은 사립학교의 비리 재단들이 잇달아 '소유권'을 되찾게 되었다.
사분위의 위헌성은 교육 전문가가 아닌 법관들이 사학 재단의 정상화 기준을 마련하고 판단을 내린다는 데 있다. 즉, 행정청이 결정할 일을 사법부가 결정하는 셈이 되어 삼권분립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그리고 분쟁을 조정하는 위원회가 준사법적 권한을 행사하여 강제조정결정권을 행사하는 것도 문제이다. 또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외부의 법관들이 법 조항만을 축조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그 결과 숱한 비리와 전횡으로 쫓겨났던 사학 재단의 복귀가 이루어졌다. 오죽하면 "사학 분쟁 조장하는 사분위를 해체하라"는 여론까지 들끓었겠는가.
영남대의 경우, 개악 사립학교법을 만든 장본인인 박근혜 씨가 그 법에 의해 만들어진 사분위의 힘을 빌려 힘 안 들이고 영남학원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영남대 재단 정상화의 원칙과 방향
앞서 지적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는 사분위에서도 사학 재단 정상화의 기본 원칙으로 제시한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즉 △재단의 설립자 및 기본 재산의 3분의 1 이상을 출연한 자 △학교 발전에 기여한 자 △종전 재단의 이사진 △기타 이해관계자 등과 재단 정상화를 논의하여 합리적인 정상화 방안을 합의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고려된 원칙은 재단 설립자나 재산 출연자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라는 것이다. 즉 재단의 정통성을 존중하라는 원칙이라 할 수 있다. 영남학원의 경우 박근혜 씨는 재단의 설립자도 아니고 학교 발전에 기여하거나 재단에 사재를 출연한 공로자도 아니고 입시 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난 구재단의 이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사분위의 원칙에 따르더라도 박근혜 씨는 정상화 논의의 당사자일 수가 없고, 설령 사분위의 기계적인 축조적 법 해석에 따라 임시 재단이 들어서기 직전의 재단 이사로서 당사자의 일원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시민적 법 감정과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의 설립자이자 재산 출연자의 후손인 최염 선생이나 최찬식 선생에 비해 더 많은 발언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앞으로 영남재단의 진정한 정상화는 이사진 과반수의 추천권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이 법적인 형식논리만을 내세우지 않고 영남대학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도 그렇듯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 문제는 차기 정권의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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