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발언일까? 현재 야당 대표의 발언 같지만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한 발언이다.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이던 2005년 8월 18일 당 상임운영위원회를 주재하고 이 같이 말했다. 국정원의 불법 도청과 정치 개입 의혹이 정국을 뒤흔들던 때다.
당시 회의장으로 돌아가보자. 불법 도청이라는 말만 '대선 개입' 혹은 '국가 기밀 공개'로 대체하면, 박근혜 대표가 대통령이 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당시 상황이 대부분 일치한다. 강재섭 당시 원내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불법 도청도 문제이지만 거짓말이 더 문제다. 미국에서도 워터게이트 사건 같은 것은 거짓말한 것이 더 문제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 국정원의 정치 관여 금지, 직권 남용 금지, 불법 도청 금지를 강화하는 그런 국정원법, 국정원 직원법, 통신비밀보호법을 어제 (국회에) 제출했다. (…) 또 국정원 전체를 앞으로 어떻게 구조 개편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계속 검토해서 필요하다면 입법 보완을 해나가도록 하겠다."
원희룡 당시 최고위원도 발언했다.
"이번에 나아가서 견제 없는 정보 권력의 독주 체제인 현재 국정원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을 검토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전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해외 정보 기능과 국내 정보 기능을 분리하고 국내 정보에서 국내 정치에 대한 정보 취합을 금지시키는 그런 것들이 정보 기관 상호 견제를 통한 분권, 그리고 국회의 감시에 충실(하게) 하는 것이 하나의 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나라당에서는 영국이라든지 아니면 미국이라든지 이스라엘이라든지 해외 정보 ,국내 정보 또는 수사 기관과 정보 취합 기관 등 기관 간의 견제와 균형에 위한 그런 기관 분리의 예를 심도 있게 검토해서 다시는 권력 기관이 견제 받지 않고 국민의 사생활 또는 공작 정치의 본산이 되는 그런 일이 없도록 차제에 근본적인 대책을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국정원의 불법 정치 개입, 권력 남용을 뿌리 뽑자고 외쳤던 새누리당 정치인들, 지금 다들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적어도 한 분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확실하다. 그러나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그분은 2013년에 벌어진 국정원 파동에 대해서는 "나는 관여해오지 않았다"며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난달 24일 발표된 박 대통령의 입장은 '나는 모른다. 국회가 알아서 하라'로 요약된다. "국민 앞에 의혹을 밝힌 필요가 있다"는 원칙적인 수준의 입장만 내놓은 채 "나는 관여해오지 않았다"며 자신과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
국정원 개혁 말하던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 박근혜는 어디에 있나?
지난 대선 당시 국정원의 정치 개입, 그리고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문제의 본질은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과 권력 남용이다. 국정원은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특성상 다른 조직보다 더 엄중한 정치적 중립을 요구받는다. 입법 전문가들이 국정원법 제9조에 정치 관여 금지 조항을 넣은 이유다. 그러나 그 조항을 밥 먹듯 어긴다면, 다른 방도가 없다. 국정원 개혁을 통해, 권력을 남용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도록 조직 시스템과 체질을 바꿔야 한다.
일단 중요한 부분은 현재 진행형인 국정원 정치 개입 및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과정 등에 대한 진상 규명이다. 그 후에 국정원 쇄신과 개혁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현재 국회에서는 국정원 개혁과 관련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야당이 먼저 나섰다. 민주당 진성준 의원은 지난달 26일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을 금지하고 수사권을 이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국가정보원법 전부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안은 우선 국정원의 명칭을 '통일해외정보원'으로 변경하도록 했다. 정치 개입과 관련해 악용될 소지가 있는 국내 보안 정보의 수집 업무를 폐지하되, 이 기능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로 이관하도록 했다. 국정원의 수사권을 사실상 박탈해 정치 공작과 인권 침해 소지를 근본적으로 막는 내용도 담았다. 국정원의 비밀활동비를 폐지하고 예산의 세부 자료를 국회 정보위뿐만 아니라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도 제출하도록 했다. 예산 배정의 투명성을 확보해, 엉뚱한 일을 기획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국정원장에 대한 탄핵도 가능하게 했다. 국회 정보위의 권한도 강화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국내 정보 수집 파트를 폐쇄하고, 국회의 견제를 강화하는 내용이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국정원 개혁과 관련해 "중앙정보부 이래 국정원은 국내 정치에 개입하고 사찰을 계속해왔다"며 "차제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처럼 바꿔 대북 정보를 포함해 해외 정보를 전담하는 기구로 개편하고, 국내 정보는 경찰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경찰에게 국내 정보를 전담하게 하는 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사안이다.
핵심은 국내 정치 파트 폐쇄다. 이 같은 내용의 법안이 처리될 가능성이 있을까? 미지수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국정원 개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에 끌려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고, 국정원의 실패를 인정할 경우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우려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목소리를 내는 인사도 있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 중진연석회의에서 "그 사람들이 30년간 음지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 음지에서 민주주의를 '조졌'다"며 "음지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해 놓고 양지를 지향하는 것은 독재다. 지금도 그것 그대로이다"라고 국정원 개혁 필요성을 강하게 얘기했다. 이 의원은 "국정원이 때만 되면 국내 정치에 기웃거리고, 선거판을 기웃거리고, 그래 가지고 현 정권이 끝나면 지난 국정원장들은 전부 감옥 가고 구설(에) 오르고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이번 기회에 적어도 국정원이 가진 국내 정치 파트, 이건 해체해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지금 실세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언론은 이 의원 발언의 무게를 진지하게 재보려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의원은 2007년 이명박 전 대통령 대선 캠프에 참여하던 시절 "국가정보원이 2005년 3월부터 9월까지 이(명박) 전 시장과 관련한 X-파일을 작성했고, 이것이 당시 권력 실세에게 전달됐다는 의혹이 있다"며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의혹을 제기한 적도 있다. 2005년 X파일 사건 때도 국정원 개혁에 대해 할 말을 했다. 적어도 일관성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절실히 느끼는 원칙의 정치인은 이재오 의원 한 명뿐인가?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는 정치인 박근혜 대통령은 8년 전 말한 대로 국정원 개혁을 천명해야 옳다. 이제 와서 침묵하는 것은 '원칙과 신뢰'를 표방한 정치인답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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