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프레시안>은 지난 2일 보도를 통해 이명박 정부 시절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가 한국교통연구원(KOTI)에 발주한 '철도 산업 발전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연구' 용역 결과를 공개했다. 2010년 12월에 발표된 이 용역 보고서는 한 노선에서 철도 면허를 부여받은 두 곳의 사업자가 경쟁토록 하는 데 있어 법적·제도적 장치가 현재 미흡함을 지적하고 있다. (관련 기사 : [단독] 정부, 3년 전 '수서발 KTX' 법 개정 필요성 지적했다)
국토부는 관련해 "연구 용역 보고서는 경쟁 체제 도입에 대한 법적 근거가 있음을 전제로 선로 배분 지침과 사업자 선정 절차 등 실행을 위한 구체적 절차 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국토부는 이어 "사업자 선정 절차도 법령에서 정할 사항이 아니며, 실행 과정에서 노선의 특성과 정책 방향 등을 감안해 따로 정할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 KTX 민영화 저지 및 철도 공공성 강화를 위한 수원대책위원회가 지난달 4일 경기 수원역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철도 민영화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 투쟁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뉴시스 |
"'철도사업법'은…보완이 필요하다" 명시해놓고 이제 와서 사실이 아니다?
국토부의 주장은 한마디로 황당하다. 이 기사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사업자 선정 절차'와 '정책 방향'이 아니다. 이 보고서에는 "요약하자면 현재 '철도사업법'은 노선별 사업 면허를 발급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철도 운송 시장의 유효 경쟁 도입이 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사업자의 성과 관리나 보다 진보된 경쟁 도입(동일 노선 복수 사업자) 방안 등 경쟁을 실효적으로 이끌기 위한 내용은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고 돼 있다.
국토부의 난독증일까? "'철도사업법'은…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어와 술어가 명확히 표기돼 있다. 철도사업법 보완은 누가 하는가. 국회에서 해야 한다. 자신들이 용역 발주를 통해 내놓은 이 명확한 논리를 두고 "법 개정 필요성 지적이 사실과 다르다"니 황당할 따름이다.
국토부가 "선로 배분 지침은 2004년 12월 30일에 제정·고시되어 있음을 연구자가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 이 지침은 2012년 9월에 선로 배분 주체를 철도 운영자에서 정부로 변경하는 등 일부 내용을 보완·개정해 시행 중(국토해양부 고시 제2012-639호)이다"라고 했다.
"연구자가 인지하지 못한 것"이란다. 이 보고서는 이명박 정부가 철도 경쟁 체제 도입을 목표로 교통연구원에 발주한 것이다. 교통연구원은 국토부 산하 연구 기관이다. 정부가 그간 수행해왔던 상당수의 교통 관련 인프라 사업에서 첨병 역할을 한 기관이다. 정부는 그동안 각종 대형 국책 사업과 관련해 교통연구원의 분석을 신주 단지 모시듯 해왔다. 그런데 그간 "연구자가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작성된 보고서를 철석같이 믿고 일을 추진해왔다는 말인가. 이런 식이면 교통연구원은 왜 있는가.
이명박 정부가 밀어붙였던 철도 경쟁 체제 도입이 얼마나 허술한 논리 위에서 추진됐는지에 대한 국토부의 자기 고백일 뿐이다.
전문가들은 "철도 경쟁 체제 도입"이 '철도 민영화 수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윤순철 경제정의실천연합 사무처장은 지난달 19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세계은행의 민영화로 가는 핵심 3구성 영역(민간 기업 참여, 경쟁 도입, 상하 분리)과 민간 참여의 경쟁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국토부가 소유권 이전이 아니므로 철도 구조 조정이 민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면적이고 협소한 해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시설 소유가 국가에 귀속되는 경우가 많은 기반 시설 산업, 네트워크 산업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번 국토부의 철도 구조 개편은 민영화 방안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철도 민영화'는, 민영화가 이뤄질 경우 전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수반된다는 특성 때문에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사안이다. 이런 민감한 정책 사안을 결정·추진하는 국토부가 "연구자가 인지하지 못한" 내용이 담긴 부실 보고서를 내놓았다는 것은 우선 이해하기 어렵다. 스스로 낸 보고서에서 경쟁 체제 도입 시 철도사업법을 보완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지적해놓고, 이제 와서 궁색한 논리를 펴며 "법 개정 없이 수서발 KTX 운영·설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명백한 말 뒤집기다.
철도 민영화, 국민을 우회하려 해서야 되겠는가?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철도 민영화 논란을 다루면서 국토부의 철도 경쟁 체제 도입 방식을 지켜본 결과, 국회 논의를 철저히 우회하고자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수서발 KTX 민간 참여 방안이 반대에 부딪히자 국토부는 '철도 민영화'의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일종의 '로드맵'을 새로 짜기 시작했다. 그래서 건드린 사안이 시행령 개정으로 충분한 철도 관제권 환수 문제였다. 관제권을 환수해 공정한 생태계를 만든 후 민간 철도 사업자를 진출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관제권 환수를 시행령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철도 유지·보수를 코레일이 맡도록 한 철도산업발전기본법은 국회 논의를 거쳐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들이 나왔다. 국회를 우회하기 어려워지자 이번에는 뜬금없이 '제2철도공사' 설립 방안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방안 역시 법 제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결국 한 달 정도 언급돼다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나온 것이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 방안이다.
법 개정도 필요 없고 공공 기관 지정도 필요 없다는 게 국토부의 논리지만, 과거 국토부가 발주한 연구 용역은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입맛대로 논리를 뒤집는 무책임한 행정이며, '철도 민영화'가 얼마나 부실·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정부는 스스로 지적한 대로, 수서발 KTX 설립 문제를 국회에 맡겨야 한다.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안인데 국민을 우회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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