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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

[전쟁국가 미국·1강-②] 독립전쟁에서 남북전쟁까지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지난 12월 5일부터 오는 3월 13일까지 총 8회에 걸쳐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의 '전쟁국가 미국'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군사주의 노선이 현재 세계의 혼란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봅니다.

<프레시안>은 격주로 진행되는 강연을 정리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아래는 지난 12월 5일 진행된 1회 강연을 보강한 내용입니다. 1회 강연은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더 연재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전편 보러 가기 : 미국은 왜 전쟁을 하는가?)

미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고 말한다. 즉 "초기 정착민이 영국을 떠나 버지니아에 도착하고 서쪽으로 이주하던 시절부터 미국은 정복을 추구하는 제국이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건국 이후 미국이 안고 있는 근원적 모순을 지적한다. 미국인의 자유를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 등 타자(他者)들을 정복해 온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이 살해됐다. 영국인이 처음 북미 대륙에 닿았을 지금의 미국 영토에는 약 1000만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1900년 그 숫자는 20만 명으로 줄어든다. 미국은 처음부터 전쟁과 살육으로 세워진 나라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라는 부분에서 크게 고민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에는 당연히 흑인도 포함돼야 했지만 그랬다가는 미국 경제를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흑인 노예는 미국 경제를 떠받치는 버팀목이었다.

게다가 제퍼슨은 그 자신이 농장주로서 노예를 부렸으며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 사생아를 낳기까지 했다. 결국 흑인 노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백인들의 재산으로 규정됐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말하는 '사람'이란 결국 백인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경제발전은 흑인 노예의 희생에 의한 것이었다. 1800년대 초 미국의 흑인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난 1860년대 백인 인구는 2700만, 흑인 노예는 400만 명 가량(약 13%) 됐다. 자유 신분의 흑인은 48만 8000명에 불과했다. 미국 북부에서 노예제도는 1804년 펜실베이니아주를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영국은 1807년 폐지했다. 그러나 남부지역에서는 여전히 유지됐다.

노예제도는 1860년대 남북전쟁으로 폐지됐지만 흑인들의 실질적 참정권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60년대 민권운동에 의해 비로소 확보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2등 시민으로 취급받고 있다.

미국의 자유, 미국의 노예제

'미국의 자유, 미국의 노예제(American Freedom, American Slavery)'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미국의 자유와 노예제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뜻이다. 즉 흑인 노예의 희생이 있었기에 백인의 자유가 가능했다는 뜻이다. 같은 제목의 책도 있다. 이처럼 미국은 출발부터 모순적인 국가였다. 이 근원적 모순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지금 트럼프가 추구하고 있는 반(反)이민 등 백인우선주의 정책이 그 증거다.

지배와 정복으로 출발한 미국은 '화(和)'를 모른다. 너와 내가 다르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평화롭게 살자는 생각이 없다. 미국은 '동(同)을' 추구하는 국가다. '내 식대로 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는 게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9.11 테러 직후 부시 대통령은 세계를 향해 "우리 편 아니면 적(You are with us or against us)"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미국인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1783년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1789년 연방정부를 출범시켰으며 이후 1850년까지 북미 대륙을 정복해 나간다. 이 시기를 영토 팽창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783년 독립 당시의 미국 영토는 북미 대륙 동쪽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애팔래치아산맥 동쪽에 13개 주가 있었고, 산맥 서쪽에서 미시시피 강까지는 오늘날 중서부(Midwest : 오하이오, 일리노이, 인디애나 등)라 부르는 곳으로 당시에는 아직 주권을 갖지 못한 영토(territory)였다. 대륙 서쪽의 절반 이상은 스페인 땅이었고, 북쪽(오늘날 캐나다)은 영국이 갖고 있었다. 또 남으로는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요컨대 독립 당시 미국은 유럽 강대국에 둘러싸이고, 북미 대륙 각지에서 원주민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였다.

▲ 지도 1. 1783년 미국 독립 당시 북미 대륙 (출처 : 월터 라페버 p.29)

그런데 이런 나라가 불과 60년 만에 북미 대륙 대부분을 석권할 정도로 팽창한다. 여기에는 당시 유럽의 정세가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이후 1815년 나폴레옹전쟁이 끝날 때까지 4반세기 동안 유럽의 열강들이 혁명과 반혁명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인 것이다. 즉 유럽 열강은 아메리카 대륙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1803년 제퍼슨 대통령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단숨에 영토를 두 배로 늘린다(루이지애나 매입). 당시 유럽의 패권을 놓고 영국과의 일전을 앞둔 나폴레옹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루이지애나(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로키산맥 동쪽에 이르는 지역으로 오늘날의 루이지애나 주와는 다르다)를 팔아버린다. 기존 영토와 맞먹는 넓이의 이 지역에서 훗날 13개 주가 생겨난다.

한편 1836년에는 미국 남서쪽 국경 넘어 멕시코 땅에 정착한 미국계 이민들이 텍사스 공화국(Lone-star state)을 설립하고 독립을 선포한다. 미국계 이민들은 타국의 땅에 나라를 세운 것뿐만 아니라 멕시코가 금지한 노예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 연방정부는 텍사스의 미국 합병을 꺼리고 있었다. 북부의 여러 주들이 노예제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5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이 텍사스를 미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미국과 멕시코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멕시코전쟁 1846~1848년)

1848년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태평양과 맞닿은 서부지역까지 빼앗는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등 미국 서부의 도시 이름이 스페인어원인 것이 이곳이 원래 멕시코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과 정복을 통해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관통하는 영토 대국으로 성장한다.

당시 미국의 목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캐나다와(캐나다는 18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멕시코까지 차지하려 했다. 캐나다를 정복하려던 전쟁이 1812년의 미영 전쟁(1812년 전쟁)이다. 이른바 '사촌간의 전쟁(Cousin's War)'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미국사에서 아주 유명하다. 영국군이 미국 본토에 상륙해 백악관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2001년 9.11 테러 전까지 미국 본토가 침공 당한 유일한 사건이다. 결국 계획했던 캐나다 정복은 실패한다.

미국은 원래 쿠바도 정복하려 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당시 제퍼슨 대통령은 "다음 목표는 쿠바"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그런 미국이 1850년 이후 영토적 팽창을 사실상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인종주의와 노예제가 그것이다. 우선 미국이 쿠바와 멕시코로 영토 팽창을 계속할 경우 비백인 인구가 늘어날 것을 우려했다. 비백인 인구가 백인 우위를 위협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남쪽으로의 영토 팽창이 노예제를 확대해 남부 주들의 위상을 강화하는 것도 달갑지 않은 사태였다. 연방정부를 장악한 북부 세력은 자유민들의 임금노동을 바탕으로 상공업 발전을 꾀하고 있었다.

이제 미국의 목표는 영토 팽창에서 상공업 발전과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로 바뀐다. 1850년대까지 미국은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다. 하지만 이제 제조업과 상업의 발전을 통해 해외로의 팽창에 나선 것이다.

▲ 지도 2. 1850년까지 미국의 영토 팽창 (출처 : 월터 라페버 p.132)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

그에 앞서 19세기 전반 미국의 영토적 팽창 과정에서 제기된 두 가지 핵심 이데올로기를 살펴본다. 하나는 먼로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 하는 존재인 것처럼, 모든 국가는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념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국익을 위한 행동을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요체는 '자신에게 좋은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대외정책의 경우 '미국에 좋은 것이 세계에도 좋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

19세기 전반 미국의 영토적 팽창 시기에는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이, 19세기 말 미국의 해외 진출 때에는 문호 개방(Open Door)과 민족 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먼로 선언은 1823년 12월 제5대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발표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유럽의 그 어떤 국가도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미국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에 대해 일절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유럽 열강 역시 아메리카 대륙의 내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흔히 먼로 선언을 고립주의 선언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미국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정확하게 이 선언은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의 독점적 세력권'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먼로 선언이 발표된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1823년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등 남미의 주요 국가들이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직후이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식민종주국 스페인 등이 몰락하면서 남미 여러 나라가 독립했다.

그러나 전쟁이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나고 유럽의 구질서가 회복되면서 유럽 열강들은 과거의 식민지를 되찾으려 했다. 바로 이때 미국은 바로 먼로 선언을 통해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개입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또는 '명백한 사명'은 1845년 존 오설리번이라는 언론인이 만든 말이다. 간단히 말해 미국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 세계로 계속 뻗어 나가면서 자유를 전파할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얘기다. 미국은 워낙 특별한 나라라서, 미국이 세계로 진출할수록 자유의 영역은 넓어진다는 자기 합리화다. 따라서 텍사스,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 대륙 서부로 진출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먼로 선언과 '명백한 운명'이 합쳐져 먼로 독트린이 완성된다. 1945년 12월 2일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먼로 독트린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면서 미국은 더 활발하게 서부로의 팽창을 계속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가 바로 멕시코전쟁이다. 먼로 독트린의 입장에서 본다면 멕시코전쟁은 타국의 영토 탈취가 아니라 자유의 영역의 확대가 되는 셈이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은 이 경쟁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미국이 가장 눈독 들인 시장은 중국이었다.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이었기 때문이다.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른바 '흑선'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것은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미국에 큰 일이 일어난다.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2차 대전을 포함해 건국 이래 미국이 치른 수많은 전쟁 중 미군 전사자가 가장 많았던 전쟁이 남북전쟁이다. 4년간의 동족상잔에서 60만 명이 죽었다. 당장 내전이 발발했으니, 중국이고 일본이고 외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미국의 해외 진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일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비록 강제로 개항을(1854년) 당하기는 했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과학계의 천황이라고 불렸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가토 슈이치라는 비판적 지식인과 나눈 대담에서 '일본이 서구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개항 직후 서구 열강이 남북전쟁 등 전쟁에 휩쓸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853~56년에는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가 크림전쟁, 1861~65년에는 미국의 남북전쟁, 1870년에는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보불전쟁을 벌였다. 이런 전쟁들이 없었더라면 일본도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역사의 우연 덕분에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남북전쟁은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 주들이 미 연방에서 탈퇴해 별도의 국가를 세우려던 것을 연방정부의 무력으로 저지시킨 전쟁이다. 이 전쟁은 미국에 커다란 상처를 안겼지만, 미국이 통합 국가로 성장하는 데 아주 중요했던, 거쳐야만 했던 과정이었다.

미국을 영어로 하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United States of America)', 여기서 스테이츠(States)는 곧 '국가들'을 말한다. 미국의 주(州) 하나 하나가 곧 국가인 셈이다. 그래서 남북전쟁 이전 미국을 영어로 설명할 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 아(are)'라고 복수형 동사를 사용했다. '아(are)'가 '이즈(is)'라는 단수형 동사로 바뀐 때가 남북전쟁 이후다. 드디어 미국이 명실상부한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이다. (3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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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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