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굴러가는 나라라면 '일간베스트 저장소 사태'는 그냥 이런 식으로 봉합되어 넘어가지 않아야 옳다. "5·18은 폭동"이고 "전라도 사람은 '천해빠진' 홍어요 좌빨"이라는 악다구니는 망해가는 수순에 접어든 나라가 아니고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소리다. 이른바 '지역문제'는 필자가 '당사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애써온 화두였다. 허나 정색을 하며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지역문제'는 그간 분명한 사실(事實)이 어처구니없게도 '진실이 실종되는' 사실(死實)의 과정을 거치고, '부정한 의도가 섞인' 사실(邪實)이 끼어들어 마치 역사적 사실(史實)인양 행세해 온 터무니없는 패턴을 보여 왔다. 심각한 것은 (시정하려는 노력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그 같은 가짜 사실(史實)이 진짜 사실(史實)인 것처럼 청소년 시절부터 사람들의 뇌리를 파고들어 자리 잡아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넓게 넓게 전파되고 있다는 점이다.
근래 들어서는 친일 인사들의 영향으로 보이는 '허술하기 짝 없는 역사교육'까지 그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당장 '5·18은 폭동'도 사실(事實)이 사실(死實)과 사실(邪實)의 과정을 거처 사실(史實)쪽으로 치달았다. '홍어'는 어떤가. '전라도 차별'에는 몇 번의 커다란 사건이 연원(淵源)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보고 있다.
"전라도 사람을 중(重)히 쓰지 말라"했다는 고려 태조 왕건의 유훈(遺訓)으로 알려진 훈요10조(訓要十條), 조정에서 "전라도는 반역의 땅(逆鄕)"이라 일컫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조선조 선조 때의 정여립(鄭汝立)의 난(亂), 박정희·김대중의 치열한 대결로 영호남 편 가르기의 극치를 이룬 1971년의 대통령 선거 등이 말하자면 비극의 씨앗을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시간이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이번 '일베' 사태도 지금 거의 범정부적이라는 의혹을 받으면서 조성되고 있는 여러 상황들을 감안할 때 '비극 씨앗'의 반열에 오르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근래 들어 이들 '연원'들은 거의 사실(死實)과 사실(邪實)의 과정을 통해 조작된 채 사실(史實)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들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학계에서 그렇다.
훈요10조는 고려 태조 26년(서기943년) 4월 태조 왕건이 후백제 출신의 박술희란 신하를 내전으로 불러 유언으로 구술했다는 10개항의 '가르침'으로 〈고려사〉 '태조편'에 기록되어 있다. 호남 관련부분은 10개 조항 중 제8조인 〈차령이남 금강 밖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 역모의 기상을 품고 있으니 결코 그 지역 사람을 중히 쓰지 말라〉이다.
훈요10조가 처음 기록된 시기는 태조 왕건이 죽은 지 70년이나 지난 1013년, 고려 제8대 현종 때였다. 그때까지 훈요10조에 관한 기록은 없다. 불과 10개항의 '가르침'이었으나 현종도 훈요10조를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란의 40만 군사가 침공해 개경이 잿더미가 되면서 사초까지 불타 버리자 현종은 고려사 태조편의 사초를 다시 기록하라고 명한다. 이때 최제안이라는 신하가 최항의 집에 보관 중이던 왕건의 유서라며 가져와 기록에 올린 게 훈요10조라 했다.
최제안과 최항은 당시 3대 정치세력 가운데 백제계 전라도 세력과 대결관계에 있던 진영의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는 애당초 왕건의 훈요10조라는 유언이 과연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적어도 제8조 '전라도 부분'은 조작된 게 아닌지 의혹을 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무엇보다도 왕건이 전라도 사람들을 싫어할 수 없었던 점을 학계에서는 지적한다. 후삼국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서 후백제 문제로 일시 골머리를 앓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왕건은 전라도와 경기만의 해양 세력 도움을 얻어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전라도 사람이 무척 많았다.
그가 극진히 추앙하던 도선국사도 전남 영암출신이었고, 불리한 전쟁터에서 왕건의 복장을 하고 대신 목숨을 바친 신숭겸도 전남 곡성 사람이었다. 그가 왕위를 물려준 제2대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 오 씨도 전남 나주 사람이었다. 요컨대 훈요10조 중 적어도 제8조는 '수상하다'는 이야기다.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 龍 )도 최제안과 최항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조선조 선조 때의 이른바 '정여립의 난'과 그로인해 10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己丑獄事)도 의문투성이다. 정여립은 직선적이고 적극적이면서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입바른 소리 잘 하는 유능한 관리였다. 바로 그 점이 임금의 눈 밖에 나자, 벼슬을 버리고 전주 근교 색장리(色長里)로 낙향해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대동계(大同契)라는 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며 유유자적하던 선비였다.
1587년에는 남해안의 섬에 왜구들이 침략하자 관가의 지원 요청을 받고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가 그들을 물리친 적도 있다. 그러나 바야흐로 때는, 흔히 학자들이 조선조 못난 왕 두 명 중 한사람으로 꼽는 선조 임금 시절이었다. 동인과 서인이 당쟁으로 박 터지게 싸우던 무렵이었다.
당시의 정적들은 정여립을 율곡을 배신한 파렴치한 선비요, 극악무도한 성격의 소유자라며 반역의 굴레를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적 지식인이었고 선진적 사상가였으며 민중에 토대를 둔 개혁가라는 평가까지 나와 있다. 특히 단재 신채호는 "천하가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백성 모두의 공유물이라 본 그의 공화주의적 이론은 당시로서는 혁명적 발상"이라고 추켜세웠다.
때문에 지배권력 층은 긴장했을 것이다. 결국 모난 돌이 정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을 살펴보면서 느끼는 의구심은 정여립이 트인 생각에 혁명적 발상을 한 것은 맞지만, 왕조를 뒤엎을 반역을 모의하거나 실제로 행동을 한 증거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정여립이 반역을 모의했다"는 고변(告變)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 모반의 제보를 받고 체포하러 가자, 정여립은 도망치지도 않고 서실이 있는 죽도에서 그냥 '자살'했다는 것이고, 연루자로 체포돼 희생된 사람이 자그마치 100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이상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진실을 짐작케 하는 기록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훗날 남하정은 동소만록(桐巢漫錄)에서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과 현감이 함께 가 죽이고 나서 자살했다고 아뢰었다"고 썼다. 서인 출신 예학자 김장생은 송강행록(松江行錄)에서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 지휘자라고 주장했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극에 이르러 음모가 횡행할 무렵 서인이 동인을 때려잡기 위한 방편으로 정여립이 모반했다고 꾸몄을지 모른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죽여 놓고 자살했다 했고, 존재하지도 않은 모반을 존재한 것처럼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연루자가 될 수 있으면 많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기록에 따르면 선비들은 걸핏하면 관련 있는 것처럼 몰려 마구마구 죽임을 당했다. 조대중이란 관리는 전남 보선 순찰 중 정여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하여 장살(杖殺)되었다. 그러나 조대중의 눈물은 아끼던 관기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흘린 것이라 했다.
형조좌랑 김빙은 추국장에서 안질에 날씨가 추워 흐른 눈물을 닦은 것이 정적인 백유함의 눈에 띄어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무고를 받고 사형당했다. 말하자면 다다익선(多多益善)이었던 듯싶다. 내친김에 '모반은 분명히 존재했음'을 기정사실로 강조하기위해 정여립의 고향인 '전라도는 반역의 땅'이라 밀어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사실(死實)과 사실(邪實)을 거쳐 사실(史實)이 되었으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의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영남 지역 거의 전역에 어느 날 아침 '호남인이여 단결하자'라고 쓴 전단들이 나 붙는다. 영남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바로 이어 민주공화당 소속 이효상 당시 국회의장이 대중연설에서 "우리도 단결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필자는 그때 기자였다. 그 전단을 호남사람이 붙였다고 믿은 기자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사실(死實)과 사실(邪實) 과정을 거쳐 전라도 사람들은 '홍어'가 되었다.
일베는 5·18때 희생되어 광주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들의 사진에 '배달될 홍어들 포장 완료된 거 보소'라는 캡션을 달았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었다. 홍어(洪魚)는 '홍어과'의 마름모 꼴 바닷물고기다. 몸길이가 1.5m까지도 되는 맛이 독특한 생선으로, 주로 전남 흑산도 근해에서 많이 잡힌다. 전라도에서는 결혼이나 초상 같은 '큰 일'을 치를 때 반드시 준비하고 삭혀서도 먹는다.
언제부터인가 홍어는 전라도 사람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면서, 종북·좌빨이라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의미까지 함께 붙어 다녔다. 천해서 무시해도 좋고, 짓밟혀도 별로 할 말이 있을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로, 기득권 가까이 근접해서는 결코 안 되는 계층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필요'에 따라 그리 됐을 것이다.
'만만한 게 홍어 X(수컷의 생식기)'이란 말은 오늘날 바닷물고기 홍어를 가리키기보다 별 볼일 없는 '왕따'나 전라도 사람을 지칭하는 홍어의 위상을 나타내는 의미로 더 익숙해져 있다. 특히 '5·18 폭동'과 함께 전라도 사람들을 '홍어·좌빨'로 불러댄 일베의 주장을 초등학생까지 포함된 (초등학교 고학년들은 다 인터넷 들어간다) 지금의 청소년들이 여과 없이 받아들여 온 것은 따라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간베스트 저장소는 그동안 거의 범정부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권 주요 부처의 비호와 지원까지 받아왔다. 국가정보원은 '5·18 폭동'과 '홍어·좌빨'로 말썽이 불거진 이후인 5월24일에도 일베 회원들을 초청해 '안보 강연'을 하면서 개개인에게 18만 원씩이나 하는 '절대시계' 한 개씩을 선물하기도 했다.
고용노동부는 일베에 일자리 정보 광고를 게재·지원하는가 하면 교육부 장관은 5·18민주화 운동을 '정치적으로 대립된 이슈'라고 광주에서 말했다. '5·18은 폭동'이라 한 일베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바로 그 '대립된 이슈'였기 때문에 국가 보훈처장은 5·18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했을 것이다. 이 역시 간접적인 '일베 노선'의 지원이다. 종편들이 '5·18 폭동' 방송을 해댄 것도 사실상 일베와 어깨를 나란히 한 비호요 지원이었다.
따라서 일베는 단순한 하나의 인터넷 사이트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내용적으로는 대국민 여론조작과 함께 특히 초중고생 등 청소년 '교육'의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정권의 직할 행동부대 쯤 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일베 사태를 그냥 이대로 봉합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실(死實)과 사실(邪實)을 거친 거짓 사실(史實)이 역사적 진실을 뒤집도록 놓아 둘 수는 없다.
중국은 동북공정에, 일본은 역사왜곡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요즈음이다. 친일인사들의 입김으로 약화일로(弱化一路)를 걷고 있는 이 나라 국사교육부터 당장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사에는 나라의 영혼이 서려있다. 다시 생각해야 한다. 대학 입학수능시험에 문과건 이과건 국사가 필수시험과목이 되어야 한다.
교육을 맡고 있는 부처의 장관이 5·18을 '정치적으로 대립된 이슈'라 하는 사태도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일베의 작태를 감싸고 도와서야 되겠는가. 나라가 좀 제대로 굴러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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