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 8.5센티미터, 세로 12.8센티미터짜리 작은 수첩 하나가 있다. 이놈은 뜻밖에도 괴물이다. 2011년 9월 7일 한국에서 제일 큰 할인업체인 이마트의 한 점포에서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이 수첩 하나가 평지풍파를 몰고 왔다. 그 수첩이 원인이 되어 다음날까지 그 점포의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모두 망라한 면담이 실시됐고, 전국 점포로 격문처럼 비상통신이 하달됐다. 야단법석 끝에 결국 애꿎은 단기협력사원들만 희생양처럼 정리 대상 표적이 됐다.
평범한 수첩 하나가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상을 뿌리째 뒤흔들며 가공할 힘을 발휘한 1박2일의 정경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권의 현주소를 명징하게 확인시켜준다.
▲ 이마트에서 일어난 일들은 세인을 놀라게 한다. 뜬금없이 <전태일 평전>이 불온서적으로 등장하고 합법적인 노동 법률 상식을 담은 수첩이 문제시됐다. ⓒ전태일통신 |
▲ 이마트의 노조 파괴 공작 정황이 담긴 이메일 일부 ⓒ전태일통신 |
수첩 한 권이 불씨가 돼 알려진 이마트의 놀라운 사실들
우리나라 헌법 제33조 1항은 노동3권을 규정하고 있다. "근로자는 근로 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사회적 약자로서 집단적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교섭과 쟁의 행위를 통해 요구를 달성하도록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이마트 관리자가 기겁을 한 수첩은 민주노총이 제작한 것이었고 제목은 '노동자 권리 찾기'였다.
사실 사무실 탁자에 놓인 중국집 홍보 전단과 다를 바 없이 어디에 놓여 있어도 문제가 안 되는 수첩이었다. 오히려 대다수 노동자들의 노동 기본권에 대한 인식이 취약한 우리나라에선 그런 수첩은 다다익선이다. 문제는 그 수첩이 놓인 곳이었다. 바로 무노조 경영으로 악명 높은 삼성 일가의 일원인 신세계그룹 소속 이마트 점포였기 때문이다.
이마트에서 일어난 또 다른 일도 세인을 놀라게 한다. 뜬금없이 <전태일 평전>이 불온서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합법적인 노동 법률 상식을 담은 수첩을 전염병처럼 두려워하더니, 어린 여공들의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해 온 힘을 다하다 숨져간 아름다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삶을 기록한 평전을 기피 대상으로 낙인찍은 셈이다. 노동 문제,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 명저를 이마트는 불온서적으로 가차 없이 내몰았다.
이처럼 양대 노총을 비롯한 노동조합 연합체가 실체로 존재하고 있고 각종 법령으로 노동 기본권이 보장되어 있는 현실을 도외시한 체, 이마트 울타리 안에선 헌법과 노동 관계법보다 더 중요한 최상위의 어떤 법이 호령하고 있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노조 설립 방해 및 직원 사찰 의혹을 받고 있는 신세계그룹이 지난해까지 무려 8년 연속 '노사 문화 우수 기업'으로 선정됐다는 것이다. 여기엔 신세계백화점 본점 등 백화점 6곳과 전국 19개 이마트 지점 등이 포함돼 있고, 이들은 정부 합동 세무조사 유예와 정기근로감독 면제, 그리고 금융 대출 금리 우대 등 모두 15가지의 혜택을 받아와 국민적 공분을 샀다.
신세계(이마트)가 노사 문화 우수 기업으로 선정된 이유는 '1130(하루 한 명 30분) 면담 프로그램'을 잘 운영해서라는데, 실상 이 프로그램은 문제 인력을 걸러내는 직원 사찰 프로그램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용노동부의 선정 기준에 결정적인 하자가 드러났다. '노동'이 들어간 유일한 정부 부처인 고용노동부마저 이런 지경이니, 이마트에서 수첩 난리와 <전태일 평전> 불온서적 낙인 사건이 일어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 고용노동부가 2010년 종업원 300명 이상 백화점과 대형 할인점에 종사하는 사내 하청 노동자가 3만24명에 달하는 것을 파악하고서도 아직 불법 파견 실태 조사 등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도 밝혀졌다. 따라서 25만 명으로 추정되는 입점·납품업체 협력사원의 불법 파견 여부도 즉각 조사해 파견법에 따라 유통업체가 직접 고용하도록 조치해야 마땅하다. 이마트가 2011년 5월 작성된 회사 내부 문건을 통해 매장 인력 운영에 있어 불법 파견 여지가 높다고 스스로 진단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최근까지 이마트엔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을 구현해나갈 노조가 없었다. 직접 고용된 기간제 노동자와 시간제 아르바이트, 용역업체를 통해 고용된 사내 하청 간접 고용 노동자, 납품업체와 입점업체에 고용된 사외 하청 간접 고용 협력사원 등 온갖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매일 일하면서도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으로 정한 노동자의 권리를 모른 채 회사가 시키는 대로만 살아왔다. 회사 취업규칙보다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이 상위 규범이란 것조차 까맣게 모른 채 노조 없는 세계에서 노예처럼 유통 자본에 속박당해 일해 왔다.
이제 '한국 1등 할인점' 이마트가 해야 할 일들은?
이제 한국 1등 할인점 이마트와 신세계그룹이 자신의 점포 구역을 치외법권으로 여기고 헌법마저 점포 정문에서 멈춰 세우는 황제 경영의 전근대적 미망에서 깨어나야 한다. 노조 관련자 및 직원 사찰, 상시 해고 프로그램 운영, 직원 여론 관리, 담당 분야 공무원 관리, 하청업체 경영 직접 개입 등으로 노동권을 묵살하면서 비정규직 양산으로 초과 이윤을 착취해온 역사를 끝맺어야 한다.
무엇보다 2012년 10월 29일 간난신고 끝에 창립된 이마트 민주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성실하게 교섭에 임해야 한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을 유유히 비웃으며 직원들의 손발을 옭아매고 합법 노조의 대표자를 해고하고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는 것은 범죄 행위에 불과하다.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00년 이랜드 신촌 사옥 앞마당 천막 농성장에 한 사내가 찾아왔다. 장기 투쟁으로 치닫고 있던 이랜드 노사 관계를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고 힘줘 말하면서 당시 노조 사무국장이던 나를 설득했다. 온당하지도 않은 방법이었던 데다 예감이 좋지 않아 돌려보낸 그 사람이 바로 창조컨설팅의 심종두 노무사였다. 결국 유성기업을 비롯한 여러 사업장에서 벌인 노조 파괴 악행이 낱낱이 밝혀진 작년에 창조컨설팅은 설립인가가 취소되고 심 노무사는 노무사 자격증이 정지됐다.
이마트는 불법 부당 노동 행위가 어떻게 최후의 결말을 맞는지 창조컨설팅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직원들을 MJ(문제), KS(관심), KJ(가족), OL(오피니언 리더) 등으로 분류하고 사찰하는 전근대적 인식과 관행으론 창조컨설팅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다종다양한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나쁜 일자리와 열악한 처우, 특히 무노조 경영 신조로 인한 노동 인권 사각지대인 이마트에 작은 수첩 하나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질식사 직전의 진공 상태에서 이 수첩이 떨어진 자리로부터 작은 숨구멍이 나면서 동심원식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이마트와 같은 곳에선 노동의 권리가 적힌 수첩은 마치 산소와 같은 존재다. 산소와 같은 존재가 추방당하는 그곳에서 사람이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 이 '8.5센티미터×12.8센티미터'짜리 산소호흡기가 끝내 모든 이마트 노동자들과 유통 노동자들의 손에 들려 새로운 노동의 신세계를 모두 함께 호흡하는 날이 하루빨리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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