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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게스의 반지'를 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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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게스의 반지'를 낀 사람들

[민미연 포럼] 권력형 범죄가 '관행'이나 '문화'로 포장된다면?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낯설기만 했던 '농단(壟斷)'과 '적폐(積弊)'라는 말이 일상에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법행정권 남용과 재판개입 등으로 대표되는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관련 범죄를 놓고도 '사법농단'이니 '사법적폐'니 하며 시끄럽다.

이른바 '양승태 사법농단' 의혹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천명하고 있는 헌법 제11조는 물론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제103조를 심대하게 위반한 것으로 얘기된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공동체의 사법 불신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물론 법치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범죄라는 것이다.

사실 일반인들이야 저 집단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적으로는 알 턱이 없다. 혹시 안다고 해도 그것이 범죄가 되는 일인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그래서일까? 이번 사건 당사자들은 '부적절하지만 범죄는 아니다'라는 방어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 인물로 지목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됐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전국 판사대표 100여 명이 사법농단 연루 판사에 대한 사실상의 '탄핵 촉구'를 결의했다.

이렇듯 명백히 중대 범죄로 보이는 행위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농단'이나 '적폐'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지만, 그나마 이해할 만은 하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권력형 범죄 행위가 '관행'이나 '문화'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의 중심에 있던 전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가 불법사찰 혐의로 징역 5년이 구형된 공판의 최후 진술에서 "국정원에서 세평 자료를 받아보는 것은 청와대나 국정원에서 당연한 관행이라고 생각했다"며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며 모든 업무 관행이 범죄로 돌변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누리꾼들의 십자포화를 받았는데, 누리꾼 대부분은 "관행이 범죄로 바뀐 게 아니라, 그 정권에서는 범죄가 관행이었던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관행적 권력형 범죄는 생계형 범죄도, 과실형 범죄도 아니다. 순간적인 화나 욕구를 참지 못해 벌이는 충동형 범죄도 아니다. 말 그대로, 조직적으로 혹은 고질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뻔뻔하게 벌인 범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교활하고 추악한 범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권력형 범죄가 '관행'이나 '문화'라는 말로 포장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2014년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사건에 대해 당시 박 대통령은 국민들께 사과하고 국정원의 환골탈태를 강도 높게 주문하며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과 철저하지 못한 관리체계의 허점이 드러나서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으로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심각한 범죄 행위를 '잘못된 관행'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0년 불거진 검찰 스폰서 사건, 이른바 부산·경남의 한 건설업자가 20년 넘게 검사들에게 성 접대를 포함한 향응과 금품을 제공했다고 폭로한 사건에 대해 당시 이명박 대통령도 "검찰 내부 문화를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우리 사회 근간을 흔드는 이런 권력형 중대 범죄 행위를 일컬어 '관행'이나 '문화'라고 하는 것은 의도적인 술수인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인식과 사고방식의 반영인지, 무지의 소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심각한 많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관행'이란, 사전적 의미로 '사회에서 예전부터 해 오던 대로 하는 것'을 말하거나 '관례에 따라 하는 일'을 말하는데, 분명한 범죄 행위를 단순히 관행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이는 다분히 중대 범죄를 관례에 따라 예전부터 해오던 별 것 아닌 일쯤으로 간주하는 꼴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은연 중 그렇게 간주해 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비난의 수위를 낮추고 결국에는 책임이나 책망을 면해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관행'이라는 말은 범죄의 심각성을 가리거나 완화해주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함의를 가진다.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려는 술수 정도가 아니다. 그 사회나 집단에서 조직적으로 예전부터 아무런 제재 없이 관례처럼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문화 현상으로까지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을 은연중 드러내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사건의 직접적 당사자이면서도 이를 '관행'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행위나 업무의 옳고 그름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지도 않고, 공동체의 이익이나 선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지도 않았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꼴이다. 즉, 반성적인 사고가 아닌 맹목적인 사고를 했다고 자인하는 꼴이다.

무엇보다 범죄가 '관행'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 모습을 감춰주는 마법의 반지로 이 반지를 낀 기게스는 발각되지 않기에 부정한 짓을 마구 저지르는데 이는 오늘날 돈, 권력, 배경, 재주 등을 믿고 법과 도덕을 무시하며 자신의 이득만을 지키는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일컫기도 함)를 낀 특권층 혹은 성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따라서 권력형 범죄를 얼렁뚱땅 넘길 심산이 아니라면, '관행'이나 '문화'라는 말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런 범죄는 수사의 대상이고 심판과 처단의 대상일 뿐이다.

또한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고 사고는 행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듯이, 잘못되거나 애매모호한 언어 사용을 바로 잡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관행'이나 '문화'라는 미명은 물론 '전관예우', '스폰서', '촌지' 등으로 포장되는 권력형 범죄의 실상과 심각성을 쉽게 인지해 제대로 단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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