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배를 받던 일제강점기라는 긴 어둠의 시간을 지나 나라를 되찾은 날이 바로 '광복절'입니다. 1945년 7월 26일 미·영·중(소련을 오기한 것임)은 '포츠담선언'에서 대일(對日) 처리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습니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나가사키 원폭투하 6일 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 2일 항복 문서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방탄소년단(BTS) 티셔츠 제작 업체가 "우리나라의 광복을 티셔츠에 표현해 보았다"며 티셔츠 제작 취지로 밝힌 내용이다. 실제로 티셔츠 뒷면에는 광복에 환호하는 사람들과 원폭투하 장면을 담은 사진이 인쇄되어 있고, 영어로 애국심, 우리 역사, 광복, 한국 등의 단어가 쓰여 있다.
BTS 티셔츠에 대한 논란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뤄지고 있다. BTS의 방송 출연을 취소하고 이를 혐한의 소재로 삼은 일본 일각의 움직임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한 축을 이룬다. 또 하나의 축은 인류 최악의 참사 가운데 하나였던 원폭투하를 미화하는 듯한 언행은 자제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이다. 특히 원폭 피해자 가운데에는 약 7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경솔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논란은 일단락 되었다. BTS 소속사가 원폭 피해자들에게 사과했고, BTS의 도쿄돔 공연도 성황리에 끝났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를 향한 역사 인식의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티셔츠 논란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뤄졌지만, 이를 관통하는 역사 인식은 거의 동일하다. '결사 항전하던 일본이 원폭을 맞고서야 항복을 선언하면서 광복을 맞이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논란의 티셔츠를 제작한 업체도, 이를 입은 BTS 멤버도, 옹호나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사실은 동일한 역사를 배워왔다. 각종 교과서와 여러 매체에 실린 내용은 위에서 소개한 티셔츠 제작 업체의 설명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원자탄은 '해방의 무기'였나?
네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미국의 원폭 투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일본이 항복한 결정적인 이유는 피폭에 있었나? 7만 명의 조선인 피폭자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 만약 미국이 핵폭탄 투하 대신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는 졸저 <핵과 인간>을 통해 상기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비밀 해제된 미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 문서들과 이를 분석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종합한 결과 역사의 진실에 조금이나마 다가설 수 있었다.
결론은 이런 것이다. 우선 미국의 원폭 투하는 소련을 겨냥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짙었다. 미국은 원자탄을 손에 넣기 전에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고, 스탈린은 8월 15일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트루먼은 일기장에 "8월 15일에 일본은 끝장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미국은 원자탄을 손에 넣자 소련의 참전 이전에 원자탄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원자탄을 소련을 겨냥한 "문 뒤의 총"이라고 여기고는 말이다.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결정적인 이유도 미국의 원폭 투하보다는 소련의 참전에 있었다. 스탈린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듣고 선전포고일을 8월 15일에서 8월 9일 자정으로 앞당겼다. 이 소식을 접한 트루먼은 리히 제독에게 물었다. "저 친구들, 정말 서두른 거 아닙니까?" "예, 빌어먹게도 그렇습니다. 원자탄 때문입니다. 다 끝나기 전에 끼어들길 원한 겁니다." 리히의 답변이었다. 그리고 트루먼은 2차 핵공격을 지시했다. 종전을 향해 원자탄을 앞세운 미국과 지상군을 대거 투입한 소련 사이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의 선전포고 소식을 접한 히로히토는 항복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항복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소련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해 미국과 연합작전을 전개하면 패전은 물론이고 공산주의가 천황제를 휩쓸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도 컸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항복의 상대로 미국을 선택한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종전을 향한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한반도 분단의 결정적인 사유가 되고 말았다.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진입하려던 소련군은 미국에게는 더 이상 '연합군'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국은 서둘러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단시키자고 소련에 제안했고 소련도 이에 동의했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고 하지만, 만약 미국이 원폭 투하 대신에 소련과의 연합작전을 선택했다면, 한반도의 운명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다른 질문을 던진 독일-프랑스 공동의 역사 교과서
그렇다. 미국의 원자탄은 '해방의 무기'라기보다는 '분단의 무기'에 가까웠다. 두 개의 거대한 버섯구름은 종전보다는 냉전을 알리는 처절한 장송곡이었다. 그리고 그 버섯구름 아래에는 강제로 징용되어 피폭을 당하고도 오랫동안 외면당해왔던 약 7만 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한반도의 핵문제는 정확히 1945년에 시작된 것이다.
한일관계 못지않게 대결과 전쟁의 관계가 있었던 유럽의 두 나라가 있다. 바로 독일과 프랑스이다. 종전 이후 화해와 협력은 물론이고 유럽 통합도 주도한 두 나라는 공동의 역사 교과서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원자탄이 아니었다면 연합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없었을까? 어쩌면 미국은 이 값비싼 신무기의 파괴력을 시험해 보는 동시에, 자국의 우월성을 소련에 과시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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