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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빅데이터'가 공익이라고?

[서리풀 연구通] 의료 정보 규제 완화, 우려스럽다

정부가 데이터경제 활성화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의료기기산업 육성을 위한 인허가 규제 완화, 인터넷은행 활성화를 위한 은산분리 규제 완화에 이은 문재인 대통령의 세 번째 '규제혁신 현장방문' 자리에서였다. (관련 자료 : [전문]문재인 대통령 데이터경제 활성화 규제혁신 현장방문)


이번에도 화살은 건강 분야를 향하고 있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와 일자리위원회,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경제 부처에서는 '바이오·헬스 빅데이터'라는 이름을 달고 각종 계획, 전략, 사업들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이 대열에 보건복지부가 빠질 수 없다. 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질병관리본부, 국립암센터 4개 공공기관이 보유한 보건의료 정보를 연계하여 연구 '등'에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나섰다. 이른바 '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시범사업'이다. 이렇게 하면 기관별로 흩어져 있는 데이터로는 할 수 없었던 다양한 종류의 연구가 가능해져, 근거기반 정책개선과 의학연구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게 복지부가 설명하는 사업 추진 배경이다. (관련 자료 : 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시범사업 계획(안))


이 보건의료 빅데이터는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민간 의료기관과 연구기관에도 개방된다. 개인정보를 활용하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복지부는 '공공적 활용' 원칙 아래 건강 관련 정책·기술·학술 연구 목적으로 한정하겠다고 밝혔다. 시장분석, 개발된 제품의 마케팅 등 의학적 진보와 무관한 연구는 '영리적 연구'로 간주해 배제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정도 보호 장치면 충분한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보자. '영리'와 '공공'을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일부 마케팅 연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강 관련 연구는 수행 주체가 누구든, 자금이 어디에서 오든, 의학적 진보만 가져올 수 있다면 모두 공공적 연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담배, 주류, 식품, 제약 산업이 자금 지원을 통해 연구, 심지어는 시민·환자단체의 활동마저 왜곡해 왔음을 고발한 연구들을 소개했다. (관련 자료 : 그 연구, 왜 하셨어요?, 코카콜라가 세상을 지배하는 방법, 전경련 돈 받고 청와대가 움직인 어버이 연합, 왜?, 풀뿌리로 위장한 시민단체, 큰손은 담배 기업!)


오늘 소개하는 논문는 산업이 학술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더 큰 그림을 보여준다.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산업의 후원이 전체 학술연구의 지형과 우선순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호주 시드니대 약학대학 <연구의 편향> 프로젝트 연구팀이 최근 미국공중보건학회지에 발표한 "산업의 후원이 연구 의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의 결론이다. (해당 논문 : The Influence of Industry Sponsorship on the Research Agenda: A Scoping Review)


연구팀은 1986년부터 2017년 사이에 발표된, 산업 후원이 연구 의제에 미치는 영향을 탐색한 모든 논문들을 검토했다. 일종의 메타리뷰(검토의 검토)인 셈이다. 최종 36편의 논문이 분석에 포함되었는데, 이중 절반 이상(19편)이 의료 산업(제약, 의료기기, 진단법 등)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담배(4편), 식품(3편), 생명공학(3편) 산업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산업-학술연구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의 대부분이 건강과 관련 있는 셈이다.

연구팀은 이들 논문을 연구 설계와 측정 결과를 토대로 하여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후원 형태에 따라 연구 주제의 양상을 계량적으로 분석한 논문들로 총 19편이 여기에 해당했다. 둘째 산업 내부문건을 분석하고, 산업이 그들의 정책과 법적 지위를 지지하는 주제에 우선순위를 부여함으로써 전체 연구 영역을 재형성하는 전략을 탐색한 연구 논문이 7편이었다. 셋째 조사와 인터뷰를 활용하여 산업의 자금 지원이 연구 의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자들의 경험과 인식을 탐색한 논문이 10편이었다.

첫째 유형에 속하는 논문의 대부분은(17편)이 의료 산업에 대한 것이었고(나머지 2편은 식품), 각 논문의 검토 대상 중 산업 후원 연구의 비중은 7.4%에서 75.7%까지 다양했다.

이들 논문은 산업의 자금 지원이 상업화가 가능한 연구 질문에 우선순위를 두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이러한 연구들은 공공보건 혹은 행동개입보다는 약품이나 기기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전 세계에서 수행된 모든 공공·민간 임상연구의 데이터베이스인 'ClinicalTrials.gov'를 분석한 한 논문은, 총 231개의 비교 효과성 연구 중 69.2%가 약품, 26.2%가 기기 연구인 반면 3.1%가 수술이고, 나머지 1.5%만이 행동 변화에 관한 연구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해당 논문 : Comparative Effectiveness Research: An Empirical Study of Trials Registered in ClinicalTrials.gov)


또한 이들 논문은 충분한 시장 점유율을 보장하는 주제일수록 산업의 지원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예컨대 제약회사들은 저소득 국가에서 중요한 질병보다는 고소득 국가에서 영향을 미치는 질병에 대한 연구를 후원할 가능성이 높았다. 2005년 미국의 생의학 연구 자금 지원을 분석한 한 논문은 산업의 자금 지원이 전 세계적 수준의 질병부담보다는 고소득 국가의 질병부담에 맞추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반면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의 자금 지원은 전 세계적 질병부담에 맞춰지고 있었다. (해당 논문 : Financing of U.S. Biomedical Research and New Drug Approvals across Therapeutic Areas)


기업은 보건학적 가치보다는 상업적 가치가 있는 연구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연구 의제를 공공보건 우선순위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분야에서는 정책 결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미흡해지고, 이는 결국 중요한 정책결정을 포기하거나 미루는 원인이 된다. 이 글에서는 의료 산업에 관한 결과를 주로 소개했지만, 이 논문의 중요한 발견은 이렇게 산업이 학술연구에 미치는 영향이 분야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연구팀은 연구 의제에 대한 기업의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연구 결과를 출판할 때 연구비 출처와 이해상충에 대한 표명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연구의 상업적 편향 여부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연구팀은 독립 연구를 위한 재원 확대, 연구 기관들이 상업 기관들과 맺는 관계를 규제하기 위한 엄격한 지침 등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논문의 결론은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국내에서는 건강 관련 연구 중 상당수가 정부나 비영리 기구가 아닌 산업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다. 상대적으로 '공공성'보다는 '상업성'이 강조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연구가 과연 개인정보 보호라는 기본적 권리를 유보해도 될 만큼의 공익과 공공성을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주의 깊은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몇몇 전문가나 기술 관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가치, 사회적 가치가 반영되어야 한다.

나아가 공공성, 공적가치가 더 높은 연구들이 더 많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과연 '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이 그러한 구조가 될 수 있을까? 더 많은 정보가, 더 저렴한 비용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해서 자연히 '공공적' 연구가 수행될 것이라고 기대해도 될까? 차라리 정부가 나서서 공공건강 연구나 프로그램에 직접 투자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복지부의 사업 추진 목적이 '공공적' 건강 연구가 아니라 '경제 활성화'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유다.

* 무분별한 개인정보 활용과 민간공유에 반대하고, 개인정보 보호법을 강화하는 입법을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이 진행 중이다. (바로 가기 : "내 건강정보 팔지마! 내 허락없이 의료정보 쓰지마! 100만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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