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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설계자, 마오쩌둥, 덩샤오핑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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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설계자, 마오쩌둥, 덩샤오핑을 다시 본다

[최재천의 책갈피] <마오쩌둥 평전>, <설계자 덩샤오핑>

"저에게는 세 가지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침을 뱉고, 담배를 피웁니다." 격의 없는 자리에서 덩샤오핑이 했던 말.

"나의 삶은 50대 50의 공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또 다른 자리에서 덩이 했던 말.

그렇다면 구소련 공산당이나 현 러시아는 덩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미국에서 역사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알렉산더 판초프와 몬테나 대학교 고등연구원 스티븐 레빈이 쓴 〈설계자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소련공산당, 그리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이전 비밀문건을 기초 자료로 삼았다. 기록 출처의 핵심은 모스크바 소재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구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 중앙당문서보관소)에서 나온 자료들. 공저자들은 이런 방법론으로 2012년 〈마오쩌둥 평전〉을 펴냈고(2017년 한국 번역), 이번엔 ‘덩샤오핑’이다.

저자들은 객관과 균형을 표방하지만, 줄곧 ‘실용주의자’를 강조해온 그간의 덩에 대한 평가와는 다른 부분이 낯설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마오가 정말로 노쇠하게 되었을 때까지 덩은 그에게 노예처럼 봉사했다. 그는 위대한 조타수 앞에서 수도 없이,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 자신을 낮췄고, 결국 자신을 괴롭힌 자에게 충성을 표명하는 자기비하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마오가 사망한 지 몇 년 후,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덩이 발전시킨 개혁과 개방의 이론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에 대한 니콜라이 부하린의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덩은 1920년대 중반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스쿨의 학생으로 체류하는 동안 이 개념을 공부했고 권력을 굳히자마자 곧 시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덩은 사람들을 쓸모 있는 도구처럼 대했습니다. … 그는 전체의 대의를 위하는 동지였지, 조직의 필요를 넘어서는 의리를 지닌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하버드대 명예교수 에즈라 보겔)

"덩은 분명히 걸출한 혁명 지도자, 위대한 경제 및 사회 개혁가, 재능 있는 전략가이자 전술가, 능숙한 정치 조직자였다. 그러나 또한 끔찍한 사회 개혁과 1958년부터 1962년까지의 전례 없는 기근으로 인해 무고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숨진 데 대해 마오와 함께 책임이 있는 피의 독재자이기도 했다."

물론 1989년 톈안먼에 대한 책임 또한 그냥 넘어가진 않는다. 그리하여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지도자에 대한 또 하나의 평전이 탄생했다.

▲ 알렉산더 V. 판초프·스티븐 L. 레빈 지음, 심규호 옮김 ⓒ민음사

▲ 알렉산더 V. 판초프·스티븐 L. 레빈 지음, 유희복 옮김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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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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