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1일, 작가행동의 평화도서관 제안식이 있었던 강정에서, 나는 어리벙벙해서, 발목도 손도 식은 채로 뭘 해야 좋을지 몰라 배회하고 있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얼결에 옆 사람과 팔짱을 낀 채로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었다. 그 뒤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함께 고립된 사람들을 멀뚱하게 바라보거나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거나 하며 그냥 서 있었다. 이럴 줄은 짐작했으나 어이가 없도록 순식간이었고 무력했다. 내 뒤쪽으로 해안을 따라 설치된 펜스의 문이 열렸고 트럭과 레미콘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를 한참 젖히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커다란 차들이었다. 누군가 몇 대나 지나갔느냐고 물었다. 일곱 대까지 세고 말았는데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으니 열 대는 넘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도 앞쪽으로도 뒤쪽으로도 옆쪽으로도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그냥 서 있었다. 바짝 붙어선 몸들 때문에 서 있으려는 의지 없어도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울적했고 성질이 났다.
아저씨, 숨쉬기가 갑갑해요, 라고 나는 말했는데 스스로 듣기에도 그 말투가 매우 불량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내 등을 누르고 있던 경찰이 움직여서 공간을 조금 터주었다. 사물처럼 꼼짝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 움찔하는 기색에 무안해졌다. 그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를 잊었으니 내가 불량한 것이 맞았다. 누가 나에게 이런 불량 열매를 먹였나. 나가면 트럭 때문에 다쳐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사람들의 몸에 닿지 않으려고 손등과 손가락을 어색하게 구부리고 있었다. 좀 서글펐다. 해군기지에 관한 결정권도 가지지 못한 우리가 서로에게 가해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사 차량들이 다 빠져나오고 그 많던 경찰들도 어디론가 사라진 뒤, 강정천으로 내려가는 내리막엔 꽃씨가 날렸다. 사방에 손가락 한 마디는 되는 꽃씨가 굴러다녔고 날아다녔다. 이 정도의 꽃씨를 날린 것을 보니 큰 나무겠다고 생각했다. 근처 어느 군락지에서 날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이 계절에 꽃씨를 뿌리는 나무가 있나? 일순 그런 의문도 품었으나 제주니까. 제주에 그런 식물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듣기로는 강정에 머물며 공사를 몸으로 지연시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의 점퍼에서 터져 나온 거위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을 듣고도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져 봐도 그것은 꽃씨였다. 그토록 많은 꽃씨를 날려 큰 나무를 상상하게 만든 사람과 또 다른 사람들이 강정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신발과 겉옷과 머리카락 중에, 땅에 쓸리고 끌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옷이며 신발은 닳아서 터졌고 머리카락엔 먼지가 수북해서 잿빛이었다. 레미콘과 덤프트럭이 드나드는 길목에 엎드려 있다가 경찰 수십 명이 달려들어 바닥에서 떼어내고 밀어낼 때까지 각자의 힘으로 서로의 힘으로 버티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일 벌어지는 일이라서 일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강정에 가서, 그런 일을 겪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런 반나절을 보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프레시안(손문상) |
이럴 줄 짐작했으나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그 자리에 갔던 것은 근래 보았던 어떤 묘지에 관한 기억 때문이었다.
내게는 이번이 세 번째 제주 방문이었다.
지난여름 첫 번째로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콩밭 옆을 지나다가 아무래도 묘(墓)인 것을 보았다. 밭 한가운데 나지막하게 쌓인 검은 돌담 안에 봉분이 있었다. 제주도의 독특한 장례 풍습으로 산담이라고 한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이 산담이 궁금했다. 재방문 계획을 잡으며 산담을 포함한 제주의 장례 풍습을 알아보는 중에 4·3사건에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접했고 그쪽으로도 관심이 이어졌다.
제주 서남부, 사계리 공동묘지 곁엔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池)라는 곳이 있다.
조상이 다른 백서른 두 명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다, 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제주를 방문했을 때는 이 장소에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운전할 줄 아는 친구와 함께 갔으므로 차를 빌려서 내비게이션을 사용했다. 이름만 입력해도 자동으로 안내되는 식당은 숱했는데 백조일손지지라는 장소는 내비게이션 속에 없었다. 백조일손지지, 백조일손, 무엇으로 검색해도 없는 장소였다. 사계리 공동묘지 곁에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니 일단은 묘지를 찾아가기로 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사계리까지는 진입했는데 공동묘지가 어느 쪽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을 안팎을 수차례 들락거리며 헤매다가 마침 마주친 할아버지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사계리 공동묘지를 물으니 자전거를 딱 세우고, 거긴 뭐 하러 가느냐며 표정이 바뀌었다. 험악했다. 괜히 욕이라도 한 마디 들을 것 같았다. 외지인에 관한 제주 사람의, 은근하고도 완강한 경계심을 귀띔 받은 바 있어 식은땀이 났다. 제주 4·3사건의 영문명은 Red Hunt다. 그 연배의 노인에게는 더욱 예민한 화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는 거길 뭐 하러 가는지 말하면 그 대답을 듣고 자신이 대답해주겠다고 했다. 4·3에 관심이 있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소심하게 대답하자 할아버지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4·3에 관심, 에서 이미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오해일 가능성을 조금 감당해서 말해보자면, 그 정도의 조그만 관심이 반가워 웃는 얼굴이었고 그 정도로도 낯선 사람을 향해 단번에 열려버린 얼굴이었다. 백조일손지지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하자 아, 예비검속, 하고 할아버지는 혼자 말하듯 말했다. 내게는 듣기로는 말하기로도 낯선 그 말을 그는 쌀, 보리 하듯, 가위, 바위 하듯, 익숙하게 말하고 있었다. 의식으로든 무의식으로든 제주 사람에게 4·3은 여태도 강렬한 흔적이로구나, 싶었다.
예비검속이란 말 그대로 미리 검속한다는 의미이다.
1948년에 벌어진 4·3사건 이후 약 3만 명의 양민 학살이 이어진 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4·3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던 사람, 그 밖에 공산당에게 협조할 것 같은 사람, 범죄를 저지를 것으로 짐작되는 사람을 군경이 미리, 강제 구속해서 처벌한 일을 말한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은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이 일을 육십여 년 전 제주에서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었다가 재판이고 뭐고 없이 새벽에 학살당한 사람들의 뼈를, 후손들이 나중에 옮겨 묻은 곳이 백조일손지지다. 할아버지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마을 너머 남쪽 방향을 가리키면서 자신의 삼촌도 한림읍에서 체포되어 사살 당했다고 말했다.
그가 국민학교 5학년이던 시절의 일이었다고 한다.
제주는 밤이 어둡다.
도시가스 설비가 없어 LPG가스나 기름을 연료 삼기 때문에 쓸데없이 가로등을 밝히지 않는다.
1950년이라고 지금보다 더 밤이 밝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어둠 속에서 트럭에 실렸다가 학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십대 삼십대 남자들로 가장이었다. 당시의 계엄군은 한 사람 앞에 한 발씩, 252명을 총으로 쏘아 넘어뜨리고 돌과 함께 구덩이에 묻은 뒤, 그 장소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유족들이 시신을 거두려고 한밤을 틈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끄집어냈다가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파낸 시신을 그대로 묻어두고 돌아가기를 반복하다가 육년이 지난 뒤에야 시신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살은 이미 흔적 없고 뼈만 남아 서로 얽혀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으므로 유족들은 의논 끝에 두개골 하나에 팔 두 개, 다리뼈 두 개씩으로 구색을 맞춰 백삼십이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
백 서른 두 명의 할아버지를 조상으로 두었으나 뼈가 얽혀 하나의 몸이 된 사람들, 백조일손지지에 이장된 사람들이 학살당해 본래 묻혔던 장소는 알뜨르라는 이름의 제주 남단 벌판에 있다. 섯알오름이라는 곳이다. 1950년 8월에 벌어졌던 예비검속으로 제주 각지에서 체포된 천 삼백여명 가운데, 이 장소에서 발굴된 유해만 이백 오십 여구에 달한다. 이 장소는 학살 장소가 발각되어 시신을 발굴해낸 유일한 장소라고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에서 죽고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려진 바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만든 도내 최대의 탄약고가 있었으며, 가미가제의 출격지이기도 했다던 알뜨르 벌판 곳곳엔 비행기 격납고가 남아 있었다. 바람이 세고 너른 벌판, 고구마와 감자 밭 너머로 용암산인 산방산이 밥공기를 엎어둔 듯한 모습으로 솟아 있었다. 첫 번째 방문 때는 다만 규모와 외양이 굉장한 산이었던 그 산이 이제, 사람의 역사와 무관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제주 곳곳에 이런 장소가 있다. 4·3에 관련된 장소를 따로 찾아다닐 것도 없이, 산방산이고 성산일출봉이고 돌아다니다보면 지나게 되고 만나게 된다.
이 땅의 근현대사가 진행되는 동안 제주와 제주도민은 섬 바깥 사람들의 이념과 욕심으로 숱하게 난데없는 고난을 당해왔다. 알뜨르 벌판의 격납고들 너머로 먼 듯 가까운 듯 솟은 산방산을 바라보며 뜻밖에도 강정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제주의 그런 사정을, 그런 사정의 구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강정 사람들의 박탈감과 분노는 이런 제주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업이, 생활이, 무엇보다도 마을 공동체가, 외부의 간섭으로 붕괴된다. 제주엔 이런 일이 이미, 너무, 자주 벌어졌다.
벌어졌다, 라고 과거완료형으로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도 그런 일은 벌어지고 있다.
이제는 웬만한 경우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장소, 일단은, 강정에서.
* 새누리당이 제주해군기지 예산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이 다급해 쓴다.
황정은. 소설가. 1976년 생.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백의 그림자> <파씨의 입문>. 한국일보문학상,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지난 11월 21일, '작가행동 1219'의 <강정마을 평화도서관 만들기> 사업 제안식에 참여한 후 이 글을 보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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