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 대선후보들이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 정책공약을 쏟아내고 있는 것은 변화의 바람에 올라탄 것에 불과하다. 사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복지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고, 5년 내내 이명박정부의 747 허상에 시달려 온 탓에 야권진영에서 경제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경제민주화 바람을 정치권에 끌어들인 것은 가장 먼저 대통령 출마 의사를 밝힌 박근혜 후보다. 그런데 경제민주화와 관련해서는 박근혜 후보도 정치적 과거가 전무하다. 경제민주화의 상극에 있는 '줄푸세'철학이 정치인 박근혜의 과거 전적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문재인 후보의 정치적 전적은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경제민주화 과거 전적에서는 완전 정치신인 안철수 후보가 두 후보를 앞선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삼성동물원'이라는 한 단어로 한국경제를 단순명쾌하게 정리하고 따가운 비판을 쏟아내 사람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후보 개인의 과거 전적이나 미래의지로 경제민주화의 실천력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왼쪽부터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대선 후보. ⓒ연합뉴스 |
경제민주화를 가로막는 최대의 적은 과거의 체제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득권세력과 그들이 만들어낸 특권공화국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재벌과 고위관료가 서로 얽혀 하나의 뿌리를 이뤄 키워진 특권공화국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특히 50년 이상 특권공화국을 지켜왔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강고하다. 이제 막 불기 시작한 경제민주화라는 변화의 바람이 대적하기에는 버거운 상대다.
그런데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정치적 대결구도가 보이지 않는다.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후보가 마치 일심단결이라도 한 듯 경제민주화를 외친다. 줄줄이 길게 늘어선 경제민주화 공약에서 정치적 색깔을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특권공화국과 이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가 철옹성같이 버티고 있는데도 공격과 반격의 치열한 싸움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안철수현상'으로 상징되는 역설에 이은 두 번째 역설이다.
요즘 같은 변화의 시대는 주인이 없는 텅 빈 무주공산과 같다. 어제의 진리가 더 이상 오늘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데, 그렇다고 해서 어제의 진리를 대체할 새로운 진리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당연히 버려진 산을 차지하려는 싸움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벌어져야 정상이다. 친기업정당답게 새누리당의 이한구 원내대표가 먼저 포문을 열었지만 선거캠프가 나서서 입을 틀어막는다. 선거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불협화음을 제거하려는 심정을 백번 양보해 이해한다고 치자.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경제민주화의 바람이 단순히 선거용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고 선거가 끝나면 바로 사그라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무엇보다도 반드시 치러야할 싸움을 권력자의 권위로 눌러버리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무시하는 처사다. 경제민주화의 운명이 권력자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으나 권력을 불편하게 만드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세우는 일이 경제민주화 숙제를 푸는 열쇠가 되어야 한다.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이 손을 맞잡고 세상을 제 입맛대로 쥐락펴락하는 것에 제동을 걸고 양 권력을 견제하는 민주주의가 사회 모든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 토양에서 국회에 올라와있는 경제민주화 법안을 통과시키는 힘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논쟁이 죽어버린 경제민주화 논의지만 그것이 한국사회를 바꾸는 변화의 시대를 상징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던 그 시대의 흐름 자체를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상황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전 지구적인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세상을 호령했던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은 현실의 문제를 푸는 처방전으로서 그 효력을 상실했고,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기둥들이 하나둘씩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변화의 시대를 이끄는 화두는 양극화 해소다. 양극화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 모델을 재구성하는 논쟁을 필두로 과거의 진리에 도전하는 변화의 세력과 기득권세력 사이에서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양 전선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거대한 전환을 이끌어내는 그 싸움은 쉽게 승부가 나지 않는 장기전이다. 한국에서 경제민주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글로벌 차원에서도 무주공산의 새 주인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세세한 정책영역에서의 방향전환과 새로운 실험들이 보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IMF가 변하고 있고, 물가안정목표제를 사실상 폐기한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대안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대변인 역할을 해온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양극화 해소의 답안을 내놓고 '진정한 진보주의'의 조언자로 나섰다. 달팽이걸음 속도로 작지만 의미심장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대선정국의 '한철 장사'를 뛰어넘어 민주주의의 힘으로 이제 막 시작된 변화의 바람이 길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권력을 감시하고 정당을 압박하는 시민사회와 언론의 역할이 더 막중해졌다는 뜻이다. 대선이 끝나면 경제위기를 빌미로 시장권력과 보수언론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경제위기에 경제민주화가 웬 말이냐" 라며 난리법석이 날 것이다. 2009년부터 20조짜리 4대강사업을 포함 총 50조 규모의 경기부양책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잘해야 3%를 겨우 채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명박정부의 경제 성적이 워낙 초라한 탓에 반격도 그만큼 거셀 것이다. 그 반격에 정치권이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늘 그랬던 것처럼 경제민주화 진영의 시민사회와 언론이 외로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의 토목경제가 남긴 온갖 상처에 더해 향후 성장률 2-3%의 저성장의 도전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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