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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는 제 발로 달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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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는 제 발로 달리지 않는다

[인권으로 읽는 세상] 가짜뉴스의 힘은 가짜뉴스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어느 날인가,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기사님 나라 걱정이 끝이 없었다. 나라가 위기라는 수많은 레퍼토리는 며칠 전 광화문에서 시위대가 폭동을 일으켰다는 얘기로 이어졌다. "네? 제가 그날 광화문에 있었는데요?" 못 믿겠다는 내게 기사님이 증거라며 보여준 것은 카카오톡 채팅방의 사진 몇 장이었다. "이 사진 보세요. 경찰 버스가 이렇게 망가졌다니까요."

채팅방에는 마치 당일 취재 기사인 것처럼 쓰인 글도 있었다. 그러나 사진에 찍힌 상황 '당일'도 나는 현장에 있었다. 2015년 세월호 집회 사진이었다. "기사님, 이거 벌써 몇 년 전 사진이에요. 이날 제가 광화문에 있어서 다 기억해요." 기사님은 슬그머니 휴대폰을 내려놓긴 하셨지만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주장하지도 않았으나, 자신의 믿음을 포기할 마음도 없는 눈치였다. 가짜뉴스의 힘은 가짜를 지적한들 흔들리지 않는다.

가짜뉴스, 규제로 충분한가


<한겨레>가 최근 ''가짜뉴스' 뿌리를 찾아서'라는 기획연재를 내면서 가짜뉴스 대응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가짜뉴스를 "민주주의 교란범"으로 진단하며 신속 수사와 엄정 처벌을 주문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허위조작정보는 보호 받아야 할 영역 아니다"라며 더욱 강력한 대책을 독촉했다. 경찰은 이미 허위사실 유포로 가짜뉴스에 대응해왔다며 기지개를 켰고 법무부는 검경 합동대응의 지휘자로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그동안 '자율 규제'로 방향을 잡아온 방송통신위원회는 더욱 강한 대책을 마련하려고 고심하고 있다.

가짜뉴스를 가려주겠다는 정부 대책은 감시나 검열과 한끗 차이다. 반가울 리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 앞에서 규제책을 미리부터 제외해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무엇을 위한 규제인지 사회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런 과정이 생략된다면 가짜뉴스 생산·유포 세력과 정부 사이의 '진짜' 경쟁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발의된 가짜뉴스 방지를 위해 발의된 법안을 포함하여 정부 대책은 다음과 같은 전제에서 출발한다. '가짜뉴스가 혹세무민하며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는데, 가짜뉴스는 판별될 수 있고 추방될 수 있으므로, 강력한 규제를 통해 근절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가짜뉴스의 힘은 가짜뉴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1986년 '북한이 금강산댐으로 200억 톤 규모의 물을 내려보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고 한다'는 가짜뉴스는 '평화의 댐'을 남겼다. 그러나 대국민 사기극이 가능했던 이유는 가짜뉴스 자체가 아니라 전두환 정권의 힘이었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뉴스는 조작과 유포의 주체가 권력을 장악한 국가가 아니라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짜를 교정하는 것보다


<한겨레>의 기획연재는 가짜뉴스 유포 세력의 실체를 밝혔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에스더기도운동'으로 지목된 그들은 "인터넷 사역"이라며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유포하고 있었다. 주된 전파 수단이 되고 있는 유투브 극우채널 중에도 종교 채널이 많았다. 가짜뉴스에 대한 확신이 종교에 의해 보증되는 셈이다. 그래서 <한겨레> 보도를 그들은 "한국 교회에 대한 탄압"으로 규정하며 규탄한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은 '한국 교회'에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자신의 이름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무산시키고 각종 인권 관련 법과 조례가 파괴되는 것을 방치했다. 교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고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 문제에 대해 여러 입장을 낼 수도 있지만 타인의 시민권을 부정하거나 정체성을 교정하려 드는 것까지 종교의 이름으로 허용될 수는 없다. 10여 년 동안 가짜뉴스에 근거한 여러 주장이 기독교의 공식 입장인 것처럼 포장된 것을 지금이라도 바로잡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의 자정에만 기댈 수 없는 사정이 있다.

가짜뉴스의 범람은 신자유주의가 남긴 불평등에 기인하고 있다. 불평등은 사회가 정의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바닥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는 국가가 더 이상 나의 미래를 품어주지 않는다는 절망과 분노의 문제다. 원인 제공자로 특정 집단을 지목하는 것은 손쉬운 해법이다. 난민이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으며 동성애자가 가족과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북한과 내통하는 집권세력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레퍼토리는 가짜뉴스를 끝없이 갱신해가며 이어질 것이다. 가짜를 교정하는 것보다 이들의 신념을 반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가짜뉴스가 자신의 '그럴싸함'만으로 전파되고 있는 것이라면 가짜뉴스를 가려내는 독해력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짜뉴스를 믿는 사람들은 '가짜뉴스도 가려내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을 때 한국사회는 그들을 '역사의식이 부족한', '인간에 대한 예의가 부족한', '교양과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로 취급했다. 사회로부터의 일탈이 문제였으므로 사회는 문제시되지 않았다. 혐오표현을 보면서 표현에만 경악하고 금지에만 급급해 정작 혐오에 대처하지 못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가짜뉴스는 허위 정보가 유포되거나 미디어 독해력이 부족하거나 저널리즘이 무너졌거나 하는 문제 이상이다. 가짜뉴스는 정치의 문제다.

가짜뉴스는 정치의 문제


수많은 내용의 가짜뉴스가 떠돌 때에 그 효과는 저마다 다르다. 팩트를 체크해주고 다른 분석과 주장을 전하는 자원과 네트워크가 얼마나 있는지에 따라 가짜뉴스는 해프닝이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적 소수자들이 가짜뉴스의 가장 큰 제물이 된다.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와 이주민, 난민이 가짜뉴스의 대상이 되고 폭력에 노출될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항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가짜뉴스를 교정하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은 공론장에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를 가르치고 에이즈가 확산되고 목사가 처벌받는다' 류의 가짜뉴스 앞에 오히려 정치는 무릎을 꿇었다. 혐오를 소수자의 문제로만 여기고 동성애 찬반 프레임을 깨기는커녕 교회를 찾아가 절하던 행위들이 지금의 상황을 자초했다. '진짜'를 회피하는 태도가 가짜뉴스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촛불로 대통령도 끌어내린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가짜뉴스에 발목이 잡혀있는 현실에, 지금의 집권세력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가짜뉴스는 자신의 발로 달리지 않는다. 가짜뉴스를 통해 결속하는 사람들의 발로 달린다. 가짜뉴스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타자와 조우할 때의 불편함이나 불안함에 편견과 혐오라는 비난 대신 나름의 근거를 얻고 싶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다. 그들이 가짜뉴스로부터 확신을 구하고 싶어할 때, 혐오에 휘말리지 않고 차별에 가담하지 않을 방법을 알려주는 사회에서는 가짜뉴스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어렵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방치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세력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을 제공한 탓에, 가짜뉴스가 혹세무민할 지경에 이른 것. 이것이 지금 사태의 진실이다. 가짜를 교정해도 혐오는 남는다면 민주주의는 회생하기 어렵다. 가짜뉴스의 판별과 추방을 위한 강력한 규제보다, 혐오와 차별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단호한 선언이 절실한 이유다.

차별금지법 제정 서둘러야


차별금지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 2007년 '차별해도 된다는 차별금지법'을 정부가 발의한 이후, 10여 년 넘도록 '차별하지 말자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차별해도 된다는 국가의 암묵적 신호가 혐오에 기댄 가짜뉴스의 자리를 만들어줬다. 이런 상황을 종식시켜야 한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은 혐오표현을 금지하고 처벌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혐오표현을 지목하여 처벌하는 것보다 표현되는 혐오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다뤄야 할지 해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혐오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깃들 수 있지만 그것이 타자에 대한 증오와 차별로 이어지는지 여부는 사회의 역량에 달려 있다. 차별금지법은 혐오와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선언이자, 그 방법을 사회적으로 모색해가는 여정의 출발선이다.

불평등에 대한 해법이 보이지 않고 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각자의 목소리와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정치의 장을 열어야 한다. 누구도 혐오에 노출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누구도 혐오표현에 이끌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가짜뉴스는 '강력한 규제'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혐오와 차별로부터 인간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강력한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가짜뉴스가 추방될 수 있다. 갈 길이 멀다. 차별금지법부터 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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