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뀌었다 하지만,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묘수처럼 이야기되는 게 있으니 바로 규제개혁이다. 문재인 정부가 드라이브를 걸고, 여야가 8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가 불발된 규제'개혁'법안들이 다시 열린 9월 정기국회에서도 현안이다. 국정과제에서 규제의 '재설계'를 이야기했지만, 지금 문재인 정부가 보이는 행보나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법안들을 살펴보면 결국 그 방향은 '이명박근혜' 정부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규제프리존이 규제샌드박스로 돌아왔다
19대 국회 임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던 '지역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규제프리존의 지정과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은 20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16년 5월 30일, 지금의 자유한국당인 새누리당 의원 전원이 참여해 발의한 첫 번째 법안이었다. 규제를 암덩어리로 비유하며 규제 그 자체가 없어져야 할 악인 것처럼 이야기했던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혁신의 기치로 내걸며 규제프리존법 처리를 강조해왔다. 규제프리존법은 지역에서 특화사업이 추진될 경우, 관련법들에 명시된 규제조항이 적용되지 않는 '특례'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2016년 가을, 국정농단과 함께 규제프리존법이 박근혜-최순실-전경련의 합작품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촛불의 적폐청산 요구에는 기업의 돈 벌 자유만을 보증하는 규제프리존법의 폐기도 포함된다고 시민사회는 이야기해왔다. 민주당도 대기업의 청부입법인 규제프리존법이 환경, 의료, 안전 등 공공성을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규제샌드박스'라는 또 다른 이름의 '규제프리'를 밀어붙이고 있다.
규제샌드박스 도입을 위한 입법과제로 '규제혁신 5법'을 제시했다. 우선 '행정규제기본법'을 개정해 기존의 '원칙적 허용-예외적 금지'였던 규제 적용 방식을 '우선적 허용-사후적 규제'로 바꾸겠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분야별 규제 특례를 위해 '금융혁신지원법', '산업융합촉진법', '정보통신융합법'을 제‧개정하고, 규제프리존법의 닮은꼴인 '지역특화발전특구에 대한 규제특례법'을 병합‧개정하겠다는 것이다.
모래 놀이터를 뜻하는 샌드박스라고 이름 붙이며 문재인 정부가 제시한 규제 '재설계'는 결국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환경을 열겠다는 것이다. 단서를 붙이기는 했다. 신산업‧신기술 분야에 한해,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 환경을 저해하는 경우는 예외라고 말이다. 하지만 의문과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떤 규제인지는 사라진 채 규제 혁파만 난무할 뿐
행정규제는 국가나 지자체가 특정한 행정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법령‧조례‧규칙에 규정되는 사항을 뜻한다.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불필요한 행정규제 폐지와 비효율적인 행정규제 신설 억제를 위해 규제개혁위원회를 두는 것을 골자로 1997년 행정규제기본법이 제정됐다. 어떤 규제냐에 따라 규제의 성격이나 효과가 다를 수밖에 없지만, 탄생 배경에서 알 수 있듯 규제를 양적으로 접근하면서 이를 줄이는 것 그 자체가 언제나 개혁의 방향이었다.
정책과 제도는 그것이 시행되고 적용되는 과정과 결과에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어떤 기준을 정하고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규제는 정책과 제도에 늘 동반될 수밖에 없다. 공장 입지조건에 대한 규정이 없어서 집 근처에 공장이 들어선다고 생각해보자. 소음과 매연, 폐수 때문에 불안하고 피해가 있어도 어디서부터 시정할 수 있을지 막막할 것이다. 이렇듯 규제는 일상과 연결된 문제지만, '규제' 자체를 문제시하는 규제개혁 논의에서 일상에 미칠 수많은 영향들은 가려지게 된다.
문화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정책과 제도는 사라지기도 하고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에 따라 불필요해지는 규제도 있고 새롭게 요구되는 규제도 있다. 이렇게 '규제들'마다 어떤 규제인지, 누구를/무엇을 위해, 왜 필요/불필요한지 각각의 맥락들이 있다. 그런데 '규제개혁'을 하겠다며 규제를 다룰 때는 어떤 규제냐는 사라져버린다. 그저 혁파되어야 할 목표로서 '규제' 그 자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시대를 막론하고 늘 똑같다. 규제 때문에 경제가 가로막힌다는 것, 규제가 사라져야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권리는 사라지고 '산업'만 우선시되는
그동안 산업발전과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취급되며 추진된 무분별한 규제완화가 어떻게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흔들고 위협하는지를 세월호 참사는 총체적으로 보여줬다. 노후선박 연령기준이 완화되지 않았다면, 과적에 대한 처벌이 엄격했다면, 정기적인 안전점검이 부실하지 않았다면, 승무원에 대한 안전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는 달라져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이제 누구나 생명과 안전을 권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권리와 현실의 간극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지난 7월 19일 분당서울대병원 헬스케어혁신파크를 시작으로 규제혁신을 내세운 문재인 대통령의 현장방문이 이어졌다. 의료기기 규제혁신 정책발표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의사의 진료와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되도록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새로운 의료기기를 만들어내려는 열정에 정부가 날개를 달아드리겠다'고 말했다. 그 날개라는 게 의료기기를 선 시판-후 규제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환자의 진료 받을 권리, 건강할 권리를 우선시하는 방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의료기기가 더 많이 출시되는 게 건강권의 증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의료분야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권리는 단지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규제개혁의 이유이자 결과로 늘 짝지어지는 경제효과를 대표하는 게 바로 일자리 창출이다. '신산업이 우리의 새로운 먹거리가 될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이전 정부와도 고스란히 겹쳐진다. 박근혜 정부에서 규제개혁 성과로 소개했던 사례가 "기존 5인 이상 사업장에만 해당된 중소기업 청년인턴제 지원 대상을 문화콘텐츠, 지식기반서비스 등 유망분야 업종의 경우 5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청년일자리를 창출했다며 고용확대의 성과로 평가했다. 하지만 어떤 일자리이고, 누구를 기준으로 한 유망분야인가. 근로기준법 적용 예외가 되는 5인 미만 사업장은 노동권의 사각지대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의 굴레에서 열악함을 감수해야 하는 청년노동자들에게 유망한 일자리인가. 규제개혁 홍보물에는 몇 개의 일자리가 창출됐고, 경제효과가 얼마라면서 숫자들이 쏟아진다. 그 숫자가 타당한지도 의문이지만, 숫자로는 드러나지 않는 삶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규제개혁'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라 부르며 우선 허용-사후 규제 원칙으로 전환하겠다는 정부와 국회에 묻고 싶다. 어떤 사후인가. 이용자가 피해를 입은 경우 손해배상해야 한다는 알량한 규정만 있을 뿐인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어떤 피해냐에 따라 배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피해가 생명과 안전에 대한 것일 때 '온전한' 배상이 가능할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사라지고, 책임을 묻기 위해 고통스런 싸움을 해야 하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우리 사회는 계속 만들어왔다. 꼬리 자르기에만 그칠 뿐,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누구도 제대로 진 적 없는데, 규제개혁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규제개혁은 언제나 규제 철폐가 최선이자 최고라는 인식과 논리로 반복되어 왔다. 혁신과 발전, 성장이라는 찬란한 미래를 보증할 것 같은 말들이 쏟아진다. 문재인 정부가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규제혁신, 내 삶을 바꾸는 힘"인데, 그 힘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규제의 고삐에서 자유를 얻은 '산업'이 미칠 힘과 영향력이 있을 뿐이다. 규제를 산업의 영역으로 보느냐, 인권의 문제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규제 '재설계'를 위한 시작점을 어디에 찍을 것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제개혁'에 대한 개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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