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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해석 논쟁의 이면을 보자

[최창렬 칼럼] 기득권 연합 對 노동·복지 연대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불평등과 양극화다. 개별적 경제정책과 장단기 해법들이 있겠으나 본질적으로는 사회운영 방식과 구조를 바꿔야 한다. 부정의한 관행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기득권의 이해가 지배적으로 관철되는 구시대적인 네트워크와 인식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이는 혁신적인 패러다임의 도입과 법의 제·개정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시민적 합의가 아래로부터의 압력으로 작용하고 국회와 정부가 조응할 때 성과를 얻을 수 있음은 말 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이 변화는 혁명에 버금가는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 헌법적 절차에 근거했던 정권교체를 촛불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분배 구조를 개선하고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기본 경제정책 방향인 소득주도 성장의 일부일 뿐인 최저임금 인상이 야권과 보수언론으로부터 고용과 분배 구조 악화의 주범으로 낙인찍히고 있다. 청와대와 야당 사이에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고, 경제 투톱이라는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정책실장의 갈등설까지 부각됐다.

정책이란 특정 가치에 기반해 수립된다. 따라서 모든 계층을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다. 정책 수립과 집행이 노리는 효과가 있으나 새로운 정책 시행으로 손해를 보는 계층과 수혜 계층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최근 보수야권은 최저임금 인상과 아직 본격적으로 시행되지도 않는 소득주도 성장 정책은 수혜 계층이 전혀 없는 백해무익한 정책이므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정책이 없듯이, 국민을 사지에 빠뜨리려고 작정한 국가가 아니라면 아무도 혜택을 보지 못하는 정책도 존재하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은 정책 시행 시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부족했다. 자영업 가맹점 수수료와 건물 임대료, 카드 수수료 등의 인하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인건비 부담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 등이 검토된 다음 최저임금 인상을 보다 속도감 있게 추진했어야 했다. 또한 기업과 정책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당사자들과의 사전 교감과 국회와의 소통도 필요했다. 여권은 정책적 정교함의 부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를 지양하고자 하는 정책의 폐기를 요구하는 것은 성장 패러다임을 유지하자는 기득권 강화의 논리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고용과 분배 지표의 악화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혁파라는 본질적 측면과 중단기적 해법이 동시에 모색될 때 개선될 수 있는 문제다.

소득 하위 20%와 상위 20%의 소득격차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에 대한 성찰이 없이 최저임금 인상에 모든 혐의를 씌우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최저임금 논란은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 셈이다. 지방선거 이후 지리멸렬한 지지층과 기득권의 결집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적 셈법도 작용했을 법하다.

일자리와 분배를 동시에 그리고 단기간에 가시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낙수효과를 내지 못했다. 한국사회의 분배구조와 경제적 격차가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통계 수치의 악화가 최저임금 인상의 폐기로 해결될 수 있다면 애당초 사회경제적 갈등은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관점을 달리 한다면 경제정책을 둘러 싼 사회적 논쟁은 블록화한 강고한 기득권 연대와 분배적 정의를 요구하는 느슨한 노동·복지연대와의 대립이 본질이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표본 수와 구성에 따라 다른 결과와 해석이 가능한 통계 수치와 미시적 정책 실패를 빌미로 성장만능주의의 패러다임의 복원을 꾀하는 시도는 참으로 수구적이고 반민주적이다.

최근의 지표 논쟁은 정치개혁과 각종 사회개혁 의제를 희석시키는 블랙 홀로 작용하고 있다. 이미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의 축소, 경제력의 집중 해소를 위한 재벌 개혁의 실종, 공공기관과 사학 및 교육 혁신의 부재 등 '촛불'은 희미한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 후 불과 5년, 국민공회안의 온건파가 일으킨 쿠데타를 역사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일컫는다. 피로 얼룩진 혁명도 보수화하는데, 촛불혁명이라고 반동이 없으란 법이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와대와 내각, 민주당과 정의당 등의 연대가 기득권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평등과 공정과 정의라는 사회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정교한 전략과 정책적 수단의 적절한 구사만이 목표에 조금이라도 다가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그러나 집권연대의 전술적 미숙은 통계청장 교체에서도 나타났다. 무기력한 시민의 절망이 다시 촛불로 전화(轉化)되기 전에 전방위적인 개혁의 흐름을 드러내야 한다. 집권 2기 개각으로 '쇄신'한 집권세력은 이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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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다양한 방송 활동과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해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검증된 시사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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