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로 보면 산줄기요, 옆에서 보면 봉우리라.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에 따라 모습이 모두 다르네.(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소동파가 중국의 여산(廬山)을 두고 읊은 <서림사 벽에 쓰다(題西林壁)>의 한 구절이다. 이 시의 구절은 왕소군(王昭君)을 노래한 수많은 시를 떠올릴 때 잘 어울린다. 왕소군은 역사 속의 한 인물이었으나, 시대와 자리, 그리고 바라보는 이의 눈길에 따라 언제나 다른 형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왕소군하면 흔히 절세 미녀가 떠오른다.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서시(西施)·왕소군·초선(貂蟬)·양귀비(楊貴妃)에게는 각각 침어(沉魚)·낙안(落雁)·폐월(閉月)·수화(羞花)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던 왕소군은 흉노와의 화친 때문에 흉노의 왕, 호한야(呼韓邪)에게 시집가며 국경을 넘어야 했던 비련의 인물이었다. 떠나는 날에야 비로소 왕소군의 실제 모습을 본 원제가 천하의 절색임을 깨닫고 깊이 후회했다는 것이다. 후대에는 그녀가 궁중 화가인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초상화가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황제의 눈에 한 번도 들지 못한 채 흉노로 보내졌다는 유명한 이야기마저 덧붙여졌다.
왕소군이 변방의 땅 흉노를 향해 떠나던 길, 그녀가 비파를 타자 남쪽으로 날던 기러기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와 애절한 선율에 넋을 잃고 날갯짓을 멈추어 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로부터 왕소군은 '낙안의 미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러기마저 떨어뜨린 미인은 단순한 전설을 넘어, 사랑받지 못한 인간의 슬픔과 국가와 개인의 갈등, 전쟁과 화친, 고향과 이별, 그리고 한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누가 알아보는가를 묻는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물론 이는 상당 부분 후대의 윤색이 더해진 이야기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그 전설이 2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끊임없이 다시 쓰이고 다시 노래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후 이백과 두보에서 백거이·왕안석·구양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이 왕소군을 노래하면서 그녀를 신화화했고, 그녀의 운명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졌다.
초기의 왕소군을 노래한 시들은 대체로 '아름다운 얼굴은 짧은 운명을 지닌다'라는 즉, '홍안박명(紅顔薄命)'이라 하여 젊은 미인의 짧은 운명을 탄식하고, 화공을 원망하며, 흉노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당대에 이르면 왕소군은 단순히 불행한 미녀로 머물지 않는다. 시인들은 그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화친 정책을 비판하기도 하고, 국정을 잘못 운영한 군주의 책임을 묻기도 했으며,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왕소군에게 비추어 보기도 했다. 이백(李白)은 그녀가 국경을 넘어가는 순간을 단 네 구절로 압축해 노래했다.
"왕소군이 옥안장을 치켜올리며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흐른다. 오늘은 한나라 궁인이었다가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의 첩이 되는구나.(昭君拂玉鞍, 上馬啼紅頰.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
국가의 기록에서는 단 두 글자, '화친'으로 끝날 일이 한 개인에게는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과 신분이 모두 바뀌는 사건이었다. 이백은 또 이렇게 노래했다. "서쪽으로 시집간 왕소군은 돌아올 날이 없다.(明妃西嫁無來日)" 그에게 왕소군은 무엇보다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존재였다. 원대의 소사윤(蕭士贇)은 "원망한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원망의 그 마음은 이미 극에 이르렀다(不言怨而怨已極)"라고 하였다.
당대 시인들의 시선은 여기에서 정치로 향한다. 왕소군을 바라보는 눈길은 더 이상 한 여인의 비극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화친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로 확장되었다. 당시 시인들은 여인의 혼인을 통해 변경의 평화를 얻으려는, 곧 '여인의 미색으로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는(以色靖邊)' 방식에 날카로운 의문을 던졌다. 실제로 당 왕실에서도 공주를 토번 등 이민족에게 시집보내는 화친 정책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기 때문에, 왕소군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더 이상 먼 과거의 전설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 정치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 시인들은 왕소군 개인의 불운을 탄식하는 대신, 한 여인의 삶을 대가로 평화를 사려 했던 국가의 무능을 묻는다. 왕소군의 이야기는 이때부터 개인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질문이 된다. 융욱(戎昱)은 <오랑캐와 화친하다(和蕃)>에서 이렇게 묻는다.
"사직은 현명한 군주에게 의지하는 것인데, 나라의 안위를 어찌 한 여인에게 맡길 것인가! 어찌 아름다운 얼굴 하나로 변방의 전란을 잠재우려 하는가!(社稷依明主, 安危托婦人. 豈能將玉貌, 便擬靜胡塵.)"
반면, 송지문(宋之問)은 <왕소군>에서 "박명한 운명은 교만한 오랑캐 때문이요, 무정한 것은 화공이다(薄命由驕虜,無情是畫師)"라고 하면서 왕소군의 운명을 왜곡한 화공의 냉혹함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백거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화공만 원망하던 오래된 해석을 뒤집었다. 그는 "본래 임금의 은혜가 종이처럼 얇았던 것이니, 한결같이 그림만 원망할 필요가 없다.(自是君恩薄如紙, 不須一向恨丹青)"라고 했다. 즉, 책임은 모연수의 붓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림으로 판단한 권력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는 훗날 왕안석과 구양수의 새로운 해석을 예고한다. 두보의 <영회고적(詠懷古跡)>에서는 왕소군의 슬픔과 시인 자신의 슬픔이 겹쳐진다.
"궁궐을 떠나 아득한 북방 사막으로 가고 나니, 황혼 속 홀로 푸른 무덤만 남아 있구나. 천 년 지나도 비파는 이역의 가락을 전하고, 곡조마다 그녀의 깊은 원한이 또렷이 흐르네.(一去紫臺連朔漠, 獨留青塚向黃昏. 千載琵琶作胡語, 分明怨恨曲中論.)"
궁궐을 떠나 사막으로 간 뒤 남은 것은 황혼 속 푸른 무덤뿐이고, 천 년 뒤에도 비파곡에는 원한이 서려 있다. 두보 역시 정치적으로 뜻을 펴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았기에, 왕소군의 유랑과 소외 속에서 화친은 자신의 처지를 비추어 본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옛사람을 애도하면서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화친(和親)은 한편으로 끝없는 정신적 고통을 낳았다. 좌언(左偃)의 <소군원(昭君怨)>에서는 "경국지색을 부러워하지 말라. 왕소군의 한이 가장 많다(莫羨傾城色,昭君恨最多)"라고 했고, 송(宋)대 왕안석(王安石)에 이르면 더욱 과감하게 '뒤집어 보기'를 시도한다.
"사람의 정신과 자태는 본래 그림으로 다 그릴 수 없으니, 당시 모연수만 억울하게 죽였구나.(意態由來畫不成, 當時枉殺毛延壽.)"
이는 단순히 화공의 솜씨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 몇 장의 그림으로 사람을 판단한 황제와 제도 자체를 문제 삼은 말이다. 오늘날로 사진 한 장이나 이력 몇 줄, 가공된 이미지로 한 인간을 판단할 수 있느냐는 질문과도 닮아있다. 왕안석은 더 놀라운 말을 남겼다. "한나라의 은혜는 얕고 오랑캐의 은혜 깊으며, 인생의 즐거움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데 있다(漢恩自淺胡恩深, 人生樂在相知心)," 또 "인생 실의에는 남북이 따로 없다(人生失意無南北)"라고도 했다. 그는 한나라에 남는 것이 행복이고 흉노로 가는 것이 반드시 불행이라는 고정관념 자체를 흔들어 버린 것이다. 구양수는 다시 정치의 책임을 묻는다.
"화공을 죽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눈과 귀가 미치는 가까운 곳의 일조차 이와 같은데, 만 리 밖 이민족을 어떻게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雖能殺畫工, 於事竟何益, 耳目所及尙如此, 萬里安能制夷狄.)"
바로 곁의 사람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지도자가 어떻게 먼 변방의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겠느냐는 것이다. 왕소군은 이제 잘못된 정보와 판단이 만들어 낸 정치 실패의 거울이 된다.
왕소군은 고려와 조선에서도 다시 태어났다. 안축(安軸)과 서거정(徐居正)은 비파와 눈물, 청총 즉 푸른 무덤을 통해 떠나온 고향에 대한 망향의 한을 계승했다. 그러나 권근(權近, 1352∼1409)의 <명비곡>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다. 권근은 왕소군이 흉노로 가는 이유를 "화친하여 전쟁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爲欲和戎息兵革)"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왕소군이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 수많은 백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자신을 희생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녀는 개인적 불행 때문에 죽음을 택하지 않고, 더 큰 전란을 막기 위해 모욕과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가기를 선택한 인물로 재해석된다. 이는 왕소군을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감당하는 주체적 인물로 재해석한 것이다.
"변방에 전란의 먼지가 일어나 용과 범이 다투게 되면, 억만 백성이 칼날과 화살촉 아래 쓰러지게 되리라.(邊庭塵起龍虎爭, 億萬蒼生陷鋒鏑.)"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는 백성이다. 그래서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이를 막아내고 살아가는 방책을 마련하게 된다. 왕소군은 운명에 끌려가는 비련의 여인에서 전쟁과 평화, 백성의 삶을 생각하는 존재로 변화한다.
현대에 이르면 왕소군은 더 이상 국가의 상징이나 정치적 도구로만 남지 않고 다시 개인으로 돌아온다. 중국의 현대시인 오흥화(吳興華)의 <명비시>는 왕소군을 바깥에서 바라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고 말하면서 개인의 목소리를 강조한다. 국가가 개인에게 "나라를 위해 가는 것이니 개인의 득실을 잊어라"라고 요구할 때, 시인은 오히려 궁전의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의 한 개인의 미세한 떨림과 고통에 주목한다. 이는 집단의 서사 속에서 지워졌던 개인의 감각과 목소리를 되살리는 것이다.
"하늘과 땅, 부모가 나를 이렇게 낳았는데, 네가 어찌 나를 바꿀 수 있겠는가? …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리라.(天地父母生下我,你豈能改變? … 美仍然跟隨着我.)"
그녀에게 '출새(出塞)' 즉 궁궐을 떠나 국경 밖, 흉노 땅으로 시집가는 것은,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희생이었지만, 동시에 타인에 의해 강제로 결정된 추방이었다. 그러나 오흥화의 왕소군은 추방당한 채 끝나지 않는다. 짓밟히고 상처 입어도 자신의 아름다움과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추방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고, 다시 자기 구원으로 나아간다. 왕소군을 말하면서 시인은 사실 자신이 시대 속에서 겪은 고립과 소외를 말하고 있다. 오흥화의 왕소군은 곧 소외된 현대인의 존엄과 자기 존재의 문제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천 년 넘게 이어진 명비시는 단순히 한 불행한 미녀를 애도한 문학사가 아니다. 이백에게 왕소군은 돌아갈 수 없는 존재였고, 융욱에게 잘못된 화친 정책의 증거였으며, 두보에게는 자신의 불우한 삶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었다. 백거이와 왕안석은 화공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통념을 뒤집었고, 구양수는 통치자의 무능을 문제 삼았다. 권근은 그녀를 전쟁을 막기 위해 고통을 감당하는 존재로 만들었으며, 오흥화는 추방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현대적 개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렇다면 진짜 왕소군은 누구였을까. 우리는 아마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알 수 없음 때문에 왕소군은 지금까지 살아 있다. 시인들은 왕소군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시대를 말했고, 정치와 전쟁을 말했으며, 권력과 개인을 말했고, 끝내 자기 자신을 말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한 사람을 사진 한 장, 기사 제목 하나, 짧은 영상 하나로 너무 쉽게 규정한다. 영웅과 악인,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그 사람 전체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왕소군을 노래한 천 년의 시는 다른 사실을 알려 준다. 역사는 한 사람의 왕소군을 남겼지만, 문학은 시대마다 새로운 왕소군을 만들어 왔다. 산줄기를 옆에서 보면 봉우리로 보이듯, 한 인간 역시 어느 한쪽의 시선만으로는 다 볼 수 없다. 고전을 다시 읽는 까닭은 어쩌면 그 단순한 사실을 다시 배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왕소군의 이야기가 오늘의 국제정치에 던지는 문제는 전쟁보다 화친이 낫다는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것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누가 무엇을 양보해야 하며, 그 대가를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미국과 이란의 충돌처럼 오늘날의 국제분쟁에서도 협상과 타협은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토와 주권, 안전과 생존을 직접 내놓아야 하는 당사자와 이를 외부에서 중재하는 국가의 처지는 같을 수 없다.
따라서 평화를 말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전쟁의 비용을 감당하지 않는 이들이 타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강대국에게는 협상문의 한 문장에 불과한 양보가 약소국과 분쟁지역 주민에게는 그것은 곧 고향과 재산, 정치적 자유, 때로는 한 세대의 미래를 잃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평화라는 이름이 당사자의 의사와 권리를 무시하는 또 다른 강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러나 반대편의 문제도 외면할 수 없다. 정당한 명분과 권리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명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죽음과 파괴를 계속 감수할 수 있는가도 물어야 한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전쟁을 결정한 지도자가 아니라, 전장에 나간 병사와 삶의 터전을 잃은 민간인이다. 그렇다면 모든 타협을 곧바로 굴복으로 규정하는 태도 역시 책임 있는 자세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외교의 어려움은 정의와 평화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데 있지 않다. 정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죽음을 멈추고,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약자의 권리와 존엄을 희생시키지 않는 조건을 만드는 데 있다. 좋은 협상이란 단순히 총성을 멈추게 하는 합의가 아니라, 전쟁의 원인을 줄이고 당사자가 받아들일 수 있으며 다시 전쟁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질서를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이 점에서 왕소군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화친하라'고 가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가 평화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대로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동시에 묻게 한다. 전쟁과 평화를 결정할 때 마지막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국가의 체면이나 승패만이 아니라, 그 결정으로 삶이 바뀌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오늘의 외교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그 평화의 대가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대가를 실제로 치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평화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고, 이 질문을 외면한 정의 또한 인간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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