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 무렵까지 존재했던 중·고등학생들이 주체가 된 운동을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이라 부른다. 고등학생운동은 87년 12월에는 노태우 당선을 규탄하며 명동성당 농성을 하기도 했고, 폭력 교사 규탄, 두발자유화와 보충수업 철폐 등 학생의 인권 보장을 외쳤으며, 1989년에 전교조 출범 당시에는 함께 참교육을 외치며 학내외에서 대중적인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고운은 그간 제대로 기억되고 불리지 못했다. 고운이 '전교조 선생님을 지키려는 순수한 학생들의 우발적 시위'라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아직 많고, 개중 상당수는 전교조 교사기도 하다. 그런 기억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듯 최근 고운의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고 나름의 역사적 평가와 반성을 정리한 소중한 책, <고등학생운동사>(동녘 출판사)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87년 전후로 민주화 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운동의 주체로 나서, 독재 정권 퇴진을 비롯한 학교 민주화(직선제 학생회, 두발 복장 자율화, 입시경쟁 폐지 등)와 전교조 교사 탄압 중단 등을 요구했던 투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등학생운동사> 속 서술에 따르면 고운을 언급하지 않으려는 활동가들의 의식적 노력, 또는 정치적 존재로서의 10대를 지우려는 사회의 압력 등 다양한 이유로 고등학생운동은 아예 기록되지 않거나 축소되었다. 그래서인지 고운이 활발하던 때와 동시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조차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한 번도 고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왜 고운을 만날 수 없었는지, 그리고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만난 고운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책을 읽는 동안 돌아보고 정리하고 싶어졌다.
<고등학생운동사>에는 광주, 서울, 부산, 대구 등 여러 지역에서 종교적 배경을 가진 공개적 동아리 활동에서부터 직선제 학생회 쟁취를 위해 학내에서 비밀리에 조직을 시도하고 대중적 기반을 다지려 노력한 활동, 그리고 대학생 지도 선배들을 통해 또는 자생적 학습과 토론을 통해 스스로 운동의 역량을 확장하고 운동의 주체로 서고자 노력했던 이야기들이 있다. 참다운 삶의 조각들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책의 내용을 따라가는 동안,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 이 사람들과 연결됐다면, 교사가 되기 전 혹은 교사가 되어서라도 조금 더 일찍 이 소중한 삶의 조각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덜 부끄러운 교사로 살았으리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왜 고등학생운동을 만나지 못했나?
나는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나는 학생회 부회장으로서 교사들의 학습지 리베이트 사건에 맞서 학생들의 요구를 수렴하고 학교 측에 사과와 부당한 차액 환수를 위한 협상단 활동을 했다. 또한 학내에서 순 한글 티셔츠를 제작하여 판매하고, 학내 역사 동아리 및 종교 동아리에 속하여 자치활동을 활발하게 했지만, 그러는 동안 고운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측하건대, 그건 아마도 내가 동학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나는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살았는데, 동학에 대해 전혀 들은 바도 주변에서 본 것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남원에서는 김개남이 지도한 동학 운동이 활발했다고 하는데, 이 운동은 왕을 확실하게 부정하면서 남원 부사와 순천 부사를 처단하였고, 이후 남원 쪽에서는 동학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다고 한다. 기존 질서에 비판적이고 불온할수록 기득권에게는 큰 위협이 됐을 것이고, 그만큼 흔적 지우기에도 더 집착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등학생들, 10대들이 사회운동이나 정치적 활동을 하면 "대학 가서나 하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 (대)학생운동(대학생운동이 별다른 구분 없이 곧 '학생운동'이라고 불리는 것도 고운을 지우는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은 학벌주의 사회에서 그래도 기성세대들에게 어느 정도 수용될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반면 고운은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공부가 아닌 불온한 운동을 했을 뿐 아니라, 학벌주의 사회 자체에 대한 실천적 부정으로서 대학 진학을 거부하거나, 대학 진학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진 보충수업 및 자율학습 폐지 같은 주장을 밀어붙였다. 고운과 같은 청소년들의 불온하고 발칙한 시도는 의미를 인정받지도 못했고, 더욱 탄압받고 지워졌다. 실제로 <고등학생운동사> 책 속에서 고운 활동가들은 징계와 구속, 수감을 비롯해 매우 극심했던 탄압을 증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내가 고운을 만나지 못한 건 어쩌면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 스스로 고운을 무의식적으로 경계하거나 두려워했었기에 못 들어봤을 가능성도 충분히 큰 것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사범대에서 학생회장 선거를 준비하던 큰형이 죽었다. 경찰에서는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식 중에 교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던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기에, 또 학생운동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던 부모님의 걱정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고등학교에서도, 대학교에서도 스스로 고등학생운동과 (대)학생 운동 근처에는 얼씬도 않으며 귀를 막고, 눈을 감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수경 열사의 유서가 남긴 감각과 청소년인권운동
이런 내가 교사가 되어서 고등학생운동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청소년인권운동과 만나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 김수경 열사의 유서를 읽으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 나를 이끌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오늘 청소 시간에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따귀를 맞고,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OOO! 그 사람은 제게 반항적인 행동이 보였느니, 순종이 좋지 않느니 그러다가 퇴학이 어쩌니저쩌니 앞으로의 사회생활이 어쩌니저쩌니 그러곤…."
고등학교 시절 일상적 체벌에 시달리며 그렇게 교사를 증오했던 나는 교육에 대한 별다른 소신 없이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내게는 직장인 학교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장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전교조에 가입했다. 하지만 주로 학생들을 '교육'하기보다 '통제'하는 방법을 배웠고, 당시의 학교에는 폭력이 난무했기에, 나 역시 학생과의 관계에서 한계에 부딪히면 체벌에 의존했던 게 사실이다. 분명 내가 가한 체벌로 인해 삶에 부정적인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있고 이는 큰 잘못이었다. 더 큰 문제는 내가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싫어서, 체벌이 아니더라도 학생에게 무안을 주거나 창피를 주려고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졸렬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학생을 더 무시하고 상처 입히며 그것이 교육이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이런 행위야말로 '정서적 아동학대'라고 생각하고, 나는 스스로를 좋은 사람/교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정서적 아동학대 조항이 정당한 교육활동을 위축시키기 때문에 없애자는 일부 교사들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다.)
시골 학교의 도서관을 담당하면서 책을 읽을 시간이 어느 때보다 많았고, 한겨레 신문을 읽으면서 나의 삶을 돌아볼 기회가 주어졌던 때가 있었다. 당시 버트런드 러셀의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을 읽으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나 자신에게 체벌은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변명해봐도 계속 일어나는 부끄러운 마음, 체벌이 교육이 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꼭 신체적 고통을 가하지 않아도 학생들에게 공포를 심어서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행위 자체가 교육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 느꼈던 당혹감, 고등학생 때 그렇게 증오하던 폭력적 교사가 되어버린 나의 분열된 모습을 발견한 순간의 무너져내림…. 고등학생운동의 김수경 열사, 김철수 열사의 유서를 읽고 느낀 감정과 비슷한 이 감정은 내가 전처럼 살아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또 이런 부끄럽고 화나는 감정들과 죄책감을 완화하기 위해 소수의 소외된 학생들이 학교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만난 학생들이 오타쿠, 페미니스트, 그리고 퀴어 학생들이다. 그들은 내가 가진 편견을 깨닫게 해주었고, 그 편견이 신체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에 못지않은 폭력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교사가 보내는 가벼운 눈짓과 몸짓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삶의 경계를 오간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때부터 오타쿠 되기, 여성 되기, 퀴어 되기, 학생 되기와 같은 경계를 넘는 '되기'의 삶을 살아야만 편견을 줄이고 폭력을 덜 행사하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 나는 그것이 곧 교육운동이라고 믿는다.
고운에서는 열사들을 애도하고 계승하는 투쟁은 물론 '자살학우추모제'를 여는 등 학생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사회적 문제로 이야기하려 했다. 이런 활동은 2003년 동성애 혐오에 대한 비판을 담은 유서를 남기고 죽은 육우당을 추모하는 청소년성소수자인권운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학교와 사회가 만든 편견과 굴레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고자 노력했던 그들이 외면받고 멸시받은 끝에 선택한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려는 것이 아닌가.
고운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
소수자 학생들이 만나게 해준 청소년인권운동의 동지들과 <고등학생운동사>라는 책이 만나게 해준 고운 동지들. 나는 이 동지들이 만나서 서로가 겪었던 폭력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그 죽음들을 다시 애도하는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청소년인권운동가들이 고운 열사들을 호출하듯이, 고운을 했던 운동가들이 장애 청소년, 퀴어 청소년, 페미니스트 청소년, 오타쿠 청소년들을 호출하면 좋겠다. 같이 편견과 폭력에 맞서는 동지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고운을 전교조 교사를 지키려 한 '순수한' 학생들의 우발적 시위라고 기억하며, 전교조 행사에 초청하여 "선생님 사랑합니다"를 외쳐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교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들이 있다. 첫째, 고운 활동가들은 교육운동의 동지로서 전교조 교사들과 연대하고 함께 참교육을 외쳤다. 그들을 전교조의 투쟁에 연대했던 활동가로 대우하고 초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참교육을 함께 외친 전교조 교사들 가운데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하고, 경쟁교육을 강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더불어 오늘날의 전교조 조합원인 교사로서 전교조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교권을 지키고자 하는 사업은 노조로서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참교육을 외치며 세상에 나와 한때 큰 지지를 받았던 교육운동의 주체로서의 전교조가 교권 사업에 '올인'하는 것이 진짜 학교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전략이라고 믿는지 궁금하다. 오히려 여전히 폭력적인 학교에서 상처받고 스러져 가고 있는 소수자 학생들과 연대하고 함께 투쟁하는 것이 참교육이 아닌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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