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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의 사회, '고운'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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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이후의 사회, '고운'을 보라

[고등학생운동사 한 장면] 우리들의 유배된 기억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며칠 뒤였다. 점심시간에 학내 비공식 동아리인 풍물패 부원 모집이 시작됐다. 곧바로 면접을 신청했다. '비공식' 동아리라는 말에 끌렸던 것 같다. '공식'의 세계 바깥, 그곳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무척 예민했는데, 차별이나 폭력적 현실과 가까이 살다 보니 책을 도피처 삼아 빠져 살았다. 세계문학 전집을 몇 질 읽고 나니 중학생이 되었고, 더는 읽을 책이 없자 대학생 언니의 책장에서 1980년대 운동권들이 흔히 읽던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인간의 역사> 같은 책을 읽었다. 공식의 세계가 시시하다고 여기게 됐고, 그 바깥에 더 큰 진실이 있다고 막연히 여기게 됐다.

학교에서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교사들과 마음껏 말할 수 있지만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는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사회와 역사를 배우면서도 5.18이나 분신 정국에 대해서는 질문하거나 토론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점차 학교 성적이나 규칙도 우습게 느껴졌다. 전교생에게 수학여행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결석을 하거나, 수업시간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농담'을 하는 교사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모범생의 사춘기 일탈로 취급될 뿐이었고, 학교가 숨 막히게 느껴졌지만 벗어날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1993년 서울 변두리 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풍물패 땅울림을 만났다. 1989년에 결성한 풍물패는 학교에서 행사비나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학생에게 돈을 걷어온 관행을 끊어내는 것에서 시작했다. 풍물패 선배들은 '모금' 문제와 싸운 것에 이어 직선제 학생회를 건설 운동을 했고, 학생들의 전폭적 지지 속에서 쟁취했다. 직선제 학생회에서 준비하는 체육대회가 열렸고, 풍물패는 학교의 허가 없이 만든 비공식 동아리임에도 공연을 했다. 기존에는 체육대회 본경기가 끝나면 주로 디스코를 잘 추는 학생들이 공연했는데, 그해에는 풍물패 공연에서 '안경 쓴 사람 나와라' '머리 긴 사람 나와라' 하며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불러냈다. 성적이든 춤이든 잘하는 소수만 박수받는 학교에서,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대동제를 만들었다.

이런 배경이 있는 동아리였지만, 내가 들어갔을 때는 정치적이지 않은 '순수한 풍물패'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선배들은 운동적으로 여러 성과를 냈으나, 장기적 전망 속에서 체계적 활동가 재생산으로 조직을 탄탄하게 만들지 못한 결과였다. 이는 우리 학교뿐 아니라, 그 시기 고운(고등학생운동)의 여러 단위에서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나는 고운의 성과와 한계 위에서 고운을 시작한 마지막 세대였던 셈이다.

▲풍물패 학교 밖 정기공연. ⓒ조한진희

신사임당과 자주적학생회

'순수한 풍물패' 논쟁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을 때, 풍물패 선배의 제안으로 가게 된 기독교 사회운동단체인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활동은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종교는 없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저항과 투쟁도 비교적 낯설지 않은 문화였다. 중학교 때 혼자서 보던 책들을 여기서는 함께 읽었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로 4.3제주항쟁을 다시 배웠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로 세계대공황과 팔레스타인을 알게 됐고,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역사적 유물론이나 다양한 철학책을 읽으며 인간은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지 토론했다. 나는 공개단체라고 불리는 KSCM 활동과 학내 풍물패를 기반으로 고운을 시작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뿐 아니라 1980년대 중반부터 전국적으로 직선제 학생회 요구가 본격화 됐지만, 직선제 학생회 이후에도 교사들의 의사를 전달하는 통로 정도로 학생회 역할이 제한적인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학내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당시 표현으로 '자주적 학생회' 건설은 형식적 직선제 학생회를 넘어서기 위해 중요한 운동과제였다. 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상당했다.

1990년 10월 <자주적 학생회건설을 위한 공청회>가 대학로에서 열렸다. KSCM 주최였고, 행사장 앞에는 이미 전경차 3대가 깔려 있었다. 장학사들도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해 도착해 있었다. 그럼에도 위협과 감시를 뚫고 200여명의 학생이 행사장을 꽉 채웠다.

나는 KSCM 전국 대표 역할을 맡으면서 일종의 자주적 학생회 건설 위원회를 꾸렸다. 학내 운동 기반이 취약한 학교는 소모임부터 꾸렸고, 기반 조직이 있는 경우 구체적인 후보단을 꾸리고 준비를 시작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자주적 학생회 건설을 위한 준비위를 꾸렸다. 학내 여러 현실을 비판했는데 특히 신사임당에 대해서 말했다. 교실마다 신사임당 그림이 있었는데, 교사들은 '좋은 대학을 가야 신사임당처럼 훌륭한 현모양처가 된다'고 자주 강조했다. 우리는 그것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누구의 어머니나 아내로 존재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 게 아니며, 그런 발언은 차별임을 주장했다.

당시는 이 정도의 주장도 학교에게 공격적으로 느껴지거나 학생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일까봐 고민을 거듭했다. 나와 친구들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설명했으나, 1990년대 초반은 '성평등'이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조차 대중적으로 낯설었다. 우리는 현모양처가 되라는 교육 방향이 성차별이라는 주장을 좀 더 정교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언어가 부족하기도 했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쏟아지던 시기지만 페미니즘 서적은 드물었고, 고운 안팎에서 페미니스트를 만나는 것 자체가 희귀했다.

긴 준비 끝에 결국 자주적 학생회를 건설했다. 그리고 신사임당과 현모양처 사례처럼, 학교가 가부장제를 비롯한 체제 유지의 중요한 기관임을 명확히 깨닫게 됐다. 인간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박정희가 선포한 국민교육헌장의 일부로 모든 학생이 외워야 했다) 존재로 만드는 것에 더 강력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그 외에도 나는 KSCM에서 동료들과 우루과이라운드 국회비준 저지 국민결의대회에 참여해서 전농 회원들과 연대하고, 5·18광주 비디오 상영회, 열린배움터 같은 이름을 붙인 정치학교, 고등학생 대상 소식지 같은 것을 발행했다.

'고등학생 주사파' 색출과 조직사건

고등학생운동은 1980~1990년대에 뜨거웠다. 고등학생이 변혁의 주체가 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87년 6월 항쟁 거리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고, 참교육 쟁취와 사학비리근절, 자주적 학생회 건설, 1989년 전교조 교사 지키기, 학생인권탄압 분쇄까지 많은 투쟁을 하며 전진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 소멸했다.

그 배경은 복잡하지만, 고등학생운동이 '빨갱이'로 낙인찍히게 된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1994년 7월 서강대 총장이었던 박홍은 청와대에서 열린 대학 총장들의 오찬 자리에서 “학생운동 세력인 주사파의 배후에 북한의 김정일이 있고, 북측이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반대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곧바로 공안 정국이 형성됐고, 몇 년째 전국적으로 열리던 우루과이라운드 무역자유화 관련 집회는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주사파 색출'이 휘몰아쳤다.

고등학생운동 활동가 사이에서도 학생들을 색출하라는 지침이 교육청에서 계속 내려오고 있다거나, 조직 사건이 터질 것 같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한 달 뒤 청소년 월간 잡지 <새날열기>와 관악구 청소년문화단체 '민족사랑의 통 큰 이정표 <샘>(이하 '샘')'이 고등학생 주사파 단체로 지목됐다. 고등학생운동을 해온 단체들이었다. 경찰은 '샘'이 “고등학생들에게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우루과이라운드 국회비준 저지 국민결의대회'에 고등학생을 참석하도록 배후 조종해 왔다”고 밝혔다. <새날열기>는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고 북한의 남침 사실을 부인하는 등 고교생의 의식화를 목표“하고 “국가보안법철폐, 연방제통일, 고교생의 정치세력화 등을 주장”했으며 <샘>은 “통일운동이 군비축소, 미국 철수 등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고, 고교생의 정치활동 보장, 18세 선거권 쟁취, 고교생의 정치세력화 등을 주장”했다며 공격했다.

<샘>과 <새날열기>의 강령이나 주장은 언론에서 일부 왜곡했으나 기본적으로 '국가보안법철폐, 연방제통일, 미군철수, 고교생 정치세력화'와 같은 내용은 당시 고운 조직들 사이에서 흔했다. 물론 정파에 따라 달랐고, 사회주의를 주요한 가치로 설정한 조직을 비롯해서 저마다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0대의 정치활동은 더욱 통제의 대상이다. 고등학생운동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대적 통제와 탄압이 이어졌다. 전위조직을 비롯한 언더 조직들은 살얼음판이 됐고 숨죽였다. 각 고등학교에서 어렵게 확장 중이던 자치활동은 빠르게 금지되거나 폐기되었다.

▲중고등학생문화제_친구야세상이희망차보인다_1995년 대학로 신바람소극장. ⓒ조한진희

학생자치권 보장하라!

'박홍 주사파 발언'의 파장은 내가 다니던 학교 풍물패에도 왔다. 매년 해오던 체육대회 공연 금지 통보가 떨어졌다. 우리는 전교를 돌며 학생자치권 탄압에 대해 교사들에게 한 줄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전교생이 대부분 각자의 주장을 썼고, 체육대회 전날부터 학교에 숨어 있다가 이른 새벽 교무실 책상마다 복사한 항의 편지를 놓았다.

다음 날 아무 일 없다는 듯 체육대회가 시작됐다. 원래대로라면 땅울림 공연 순서에, 우리는 달려 나가 공연을 시작했다. 교사들의 제지가 시작했고 교장이 앉아 있는 단상 앞으로 뛰어가서 무릎 꿇고 공연 허가를 요청했다. 일부 교사들의 거친 욕설이 시작됐고, 곧이어 머리와 등에 주먹질과 발길질이 정신 없이 날아들었다. 교사나 전경들의 폭력에 익숙했지만 차원이 달랐다. 스탠드에 있던 학생들은 때리지 말라며 울부짖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주임은 마이크를 잡고 우리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징계 소식을 알렸다. 대부분은 근신이나 정학이었고, 이미 여러 징계 경험이 있던 나는 퇴학 처분을 받았다.

분노한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스탠드에서 징계 철회를 외쳤다. 교사들은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일어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누구의 선창인지 모르지만 '상록수'와 '아침이슬'을 시작으로 수없이 노래가 반복되며 울려 퍼졌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았고, 담임들이 소리치거나 어르기도 했지만, 노랫소리에 묻혔다.

몇 시간 뒤 퇴학 처분은 철회하고 근신과 정학으로 수위를 낮추겠다는 방송이 나왔다. 공연을 강행하며 퇴학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단결된 학생들의 저항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학내에서 풍물패나 자주적학생회 건설 활동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소모임을 만들었고, 친구들을 KSCM이나 흥사단에서 하는 공개 행사에 초대했다. 대중운동으로서 고운의 토대를 두껍게 만들기 위한 활동이었다. 그저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세상을 향한 길을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누적된 힘이 얼마큼인지 가시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날 단결된 함성을 듣는 내내 인간은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전교생이 스탠드에서 울 때 함께 울었다. 승리한 투쟁이었다. 당연히 이는 학생자치권 투쟁의 승리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날 불의 앞에 물러서지 않고 싸워봤던 경험은 고운과 전혀 접점이 없던 평범한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드물게는 졸업 후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 더 많게는 소시민으로 살더라도 불의한 일이 있을 때마다 광장에 나가 짧게라도 구호를 외치고 오는 삶을 살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 단결된 힘으로 부당함에 맞서봤던 그 하루가, 자신의 세계관을 바꿨다는 이야기를 30년이 지난 지금도 한 번씩 듣는다.

광장 너머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고등학생운동사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 고운이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끝내 고운은 소멸하였다. 그리고 고등학생운동은 사회적으로 거의 기억되지 못했다. 주지하다시피 역사는 선별적으로 기억된다. 기록된 역사만 존재하고 사회적으로 평가되며 의미가 생성된다. 1980, 1990년대 고등학생운동은 집단의 기억으로 담론화되지 않았다. 왜일까?

고운 활동가들은 대부분 기억을 묻어두고 살았다. 개별 투쟁은 승리했을지라도 고운 전체의 성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머뭇거리게 된다. 고운은 소환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 실패한 운동이라는 좌절감, 살아남았다는 미안함 혹은 소위 86세대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태도와 독점에 질려버려서…. 많은 이들에게 고운은 유배시킨 기억이었다.

나는 고등학생운동을 개인의 유배된 기억 넘어, 사회적 기록으로 만들고 싶었다. 고등학생운동이 한국 사회에 무엇이었는지 성찰과 토론, 비판적 평가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30여년 전 고운 활동가들을 찾아가서 글로 기록해 보자고 제안했다. 이번 연재글을 포함해서 고운 활동가 11명의 삶과 투쟁을 담은 <고등학생운동사>가 곧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고운을 기록하고 담론화하는 과정이 고운을 하다가 열사가 된 김수경, 김철수, 심경보, 정성묵의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고운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갖게 되거나 여전히 과거의 혼돈에 갇혀있는 동지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제자리를 찾게 되는 길이라 여기고 있다. 물론 고운을 과거의 무엇으로만 소환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주체로 늘 광장에서 외쳐왔지만, 이번 윤석열 탄핵 국면을 포함해서 매번 '재발견'되는 '미숙한 10대'라는 규명도 이제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 보호와 통제의 대상으로서의 푸르고 어린 청소년이 아니라, '정치적 존재로서의 10대'를 한국 사회에 새롭게 소환하고자 한다. 역사에서 잊힌 고등학생운동을 주목하는 것은, 탄핵 넘어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 논의에도 유의미한 현재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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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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