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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가스와 노예노동으로 100만 명 숨진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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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가스와 노예노동으로 100만 명 숨진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08]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36

"(히틀러) 총통께서는 유대인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라 하셨네. 그렇기에 우리를 포함한 모든 친위대(SS) 대원들은 그 명령을 받들어야 할 것일세. 동유럽에 현존하는 절멸용 수용소는 당장 예상되는 거대한 임무를 이행할 수가 없네. 그러므로 나는 이 임무를 아우슈비츠에 주고자 하네. 그곳이라면 유대인들을 수송하기 위한 교통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지역적으로도 고립돼 있는데다, 시설 자체도 위장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이지"(루돌프 회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헤스의 고백록>, 범우사, 2006, 267쪽).

위에 옮긴 글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1901-1947)가 독일 패전 뒤 폴란드에서 전범재판을 받으며 옥중에서 남긴 114쪽 분량의 <고백록>이다. 1959년 <아우슈비츠의 사령관(Kommandant in Auschwitz)>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됐다. 100만 명 가까이 유대인들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죽음의 수용소' 관리자가 교수형을 앞두고 써내려간 기록이다. 여기서 회스는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1900-1945)의 '유대인 처리'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던 친위대 장교로 그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친위대(SS)가 세운 '죽음의 수용소'

친위대 중령이었던 회스는 3명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가운데 가장 오래 근무했다(1940년 5월-1943년 11월, 1944년 5월-1945년 1월). 1945년 1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로 다가오자 도망쳐 농장 인부로 신분을 감추었으나, 1946년 3월 영국군에게 붙잡혀 두 달 뒤 폴란드로 압송됐다. 자신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사형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회스 자신도 잘 알았을 것이다. <고백록>을 마무리한 뒤 폴란드 최고국가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1947년 4월16일 교수형으로 죽었다.

회스의 <고백록>에 따르면, 1941년 여름,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가 그를 베를린으로 불렀다. 헤르만 괴링에 이어 나치 권력 서열 3인자로 행세했던 힘러는 (회스의 표현에 따르면) '거의 유럽 전역에 이르는 유대인의 대량학살이란 꺼림칙하고 가혹한 명령'을 그에게 내렸다. 관련 대목을 보자.

[그 결과(힘러의 명령에 따라) 아우슈비츠는 사상 최대 규모의 학살시설을 갖추게 됐다. 더구나 노동할 수 있는 유대인을 선별하여 수용하는 일, 그것에 따른 파국적인 인원 초과와 갖가지 현상 때문에 본래 같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 많은 유대인이 질병과 전염병으로 죽어가야 했다. 그 질병은 병원의 부족, 식량 부족, 위생상태의 저하 등에서 비롯되었다. 이것도 오로지 단 한 사람, 힘러의 책임이었다](루돌프 회스, 314쪽).

나치 독일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그 뒤를 이었던 12개의 '뉘른베르크 후속재판'에서 피고인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들이 저질렀던 범죄를 부인했다.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지도급 인물들은 "우리가 피고석에 선 것은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라며 전범재판을 '승자의 재판'이라 주장했다. 회스와 같은 실무자급 전범자들은 "상관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란 투의 변명을 늘어놓곤 했다. 위의 회스 글에서도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이 보인다(유대인들의 강제 이송에 실무자로 일했던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도 1961년 예루살렘 재판에서 회스처럼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는 논리를 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논란이다. 이에 대해선 곧 따로 살펴볼 참이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 패전 뒤 도망 쳤다가 영국군에 붙잡혀 폴란드 전범재판 끝에 1947년 교수형을 받았다. ⓒ위키미디어

3개의 수용소 실상은 지옥 그 자체

지난날 폴란드군의 화포 기지가 자리 잡았던 아우슈비츠를 폴란드 현지 사람들은 '오시비엥침'이라 부른다('아우슈비츠'는 독일식 명칭).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뒤 독일군은 그곳에 공병대를 주둔시켰다. 1940년 초, 친위대의 수용소 감찰국이 둘러본 뒤 그 일대에서 오랫동안 삶의 터전을 일궈오던 폴란드 농민들을 내몰고 수용소 말뚝을 박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3개의 수용소로 이뤄졌다. 1940년 6월에 문을 연 제1수용소(수용인원 1만 2000~2만 명), 1942년 3월 제2수용소(비르케나우, 수용인원 최대 9만 명)와 1942년 10월 제3수용소(부나 또는 모노비츠 수용소, 수용인원 최대 1만 1000명)다.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1945년 1월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려운 '전쟁범죄의 잔혹사'로 채워졌다.

1940년 6월14일 728명의 폴란드 정치범들을 태운 첫 번째 호송열차가 아우슈비츠에 닿았다. 바로 그 날을 제1수용소 정식 가동일로 잡는다. 처음엔 강제노동으로 수감자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집단수용소로 출발했다. 하지만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결의한 반제회의 직후인) 1942년 2월 제1수용소는 가스실과 소각장을 갖춘 죽음의 수용소 모습을 갖추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버몬트대, 1926-2007)의 글을 보자.

[모든 수감자는 노동조로 편성되었고, 감독 수감자들(상위 카포, 카포, 십장)의 통제를 받았다. 학살센터의 목적이 이중적이었던 만큼, 수용소 유지에 투입된 노동조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일상적인 업무(식당, 병원, 변소, 전기, 배관 등)에, 다른 하나는 학살과 관련된 업무(유대인들이 하차한 뒤의 열차 청소, 유대인이 남긴 귀중품 분류, 소각장 작업)에 투입되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278).

수용소는 1개 동에 400~500명쯤이 함께 지냈다. 대체로 36개의 이층 나무침대가 있고, 침대 하나에 5-6명, 6~7명씩 잠을 잤다. 침대라 해봐야 나무 널빤지를 댄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난방장치는 물론 없었다. 여름은 여름대로 문제였다. 한밤의 찜통더위로 실신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욕실은 물론 없었고 물 양동이 하나만 있었다. 수용소의 실상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수감자들은 가혹한 노동조건, 열악한 식사량으로 벼랑 끝에 힘겹게 매달린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수감자들은 배고픔으로 늘 고통 받았다. 수용소에서 주는 음식은 야생동물이라도 고개를 돌릴 것 같은, '음식'이라 말하긴 어려운 수준이었다. 상한 야채와 썩어가는 고기를 섞어 만든 묽은 수프, 약간의 빵, 싸구려 마가린이 전부였다. 성인 남자가 배를 채우기엔 양도 너무 적었다. 게다가 마시는 물이 깨끗하지 못하고 몸의 소화기능도 떨어져 걸핏하면 설사를 했다. 탈수증으로 허약해진 수감자들은 수용소를 감싸고도는 티푸스 등 전염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수감자들에게 강요된 노동은 여러 가지였다. 독일군이 쓸 자잘한 물품들을 만들거나 수용소 밖으로 나가 바위 채석장, 탄광, 터널 같은 곳에서 중노동을 했다. 총을 든 경비대가 지켜보고 있었기에 도망칠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같은 수감자 중에서 뽑힌 카포(kapo, 작업반장)의 폭력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카포 자리는 (초록색 역삼각형 표지를 가슴에 단) 독일인 강력 범죄자들이 많이 차지했지만, (별 모양의 노란색 표지를 단) 유대인들도 카포 완장을 두르고 동족 수감자를 마구 다뤘다. 그래야 카포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자칫 유대인에게 동정적 태도를 보였다간 도로 일반 수감자 신세로 돌아갔다.

대면 총살의 부담 던 독가스 학살

제2수용소(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출발도 처음엔 포로수용소였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소련군 전쟁포로가 크게 늘어나자,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는 독일군의 동의를 받아 아우슈비츠 바로 옆 허허벌판 늪지대인 비르케나우에 포로수용소를 세우려 했다. 12만 5000명 규모의 포로를 가둬둘 수용소 건설을 위해 소련군 포로 1만 명이 노예노동자로 동원됐다.

소련군 포로들은 혹사와 굶주림으로 죽어나갔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동료 포로를 죽여 그의 빵을 빼앗아 먹거나 인육(人肉)을 먹는 엽기적인 일조차 벌어졌다. 회스의 <고백록>에도 '인육을 얻기 위한 살인'을 언급하고 있다(루돌프 회스, 166쪽). 소련군 포로 가운데 1942년 여름까지 살아남은 자는 겨우 몇 백 명에 그쳤다.

제2수용소는 고압 철조망으로 두른 9개의 구역으로 이뤄졌고, 대규모 학살시설을 갖추었다(가스실 6개, 소각장 4개). 기차에서 내린 유대인들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제조품처럼 탈의실-가스실-시체소각장을 거쳐 연기로 사라져 갔다. 1943년 3월부터 6월까지 4개의 대규모 시체 소각장이 더 세워졌다. 가스실에선 단순계산으론 단 한번에 2,000명을 죽일 수 있었다. 가스실 규모가 제법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친위대가 운용했다. 초기에 그곳으로 실려 오는 소련군 포로와 공산당원을 친위대 경비대원들은 총으로 쏴 죽이곤 했다. 지난 글에서 나치 기동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 동유럽 점령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유대인 130만을 포함한 200만의 목숨을 총으로 죽였다는 사실을 살펴봤다(연재 94, 95 참조). 아무리 심성이 잔인하더라도 사람의 얼굴에 맞대는 총살형이 되풀이되면서 쌓이는 감정적 피로를 무시할 수 없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는 수용소장 회스가 치클론 B를 학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라 했다.

[아우슈비츠는 그 즈음(1942년 무렵) 친위대가 소련 포로와 공산당원을 데려와 죽이는 장소로 변모해 있었다. 회스가 출장 중이던 어느 날, 그의 부관인 프리치가 포로 몇 명을 지하실로 데려가서 소독용으로 보관되어 있던 시안화수소(치클론 B)로 죽였다. 회스가 돌아온 뒤에 더 많은 포로들을 상대로 하여 실험해보기로 했다. 시체안치소의 콘크리트 지붕에 구멍을 내고 시안화수소를 주입하자, 러시아 포로들은 "가스다!"라고 소리치면서 출입문을 부수려 했다. 그러나 문은 견고했다] (라울 힐베르크, 1238쪽).

1942년 이런 '우연한 실험' 뒤로는 치클론 B 가스가 집단학살의 주요수단으로 떠올랐다. 수용소장 회스는 치클론 B가 (희생자들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총을 쏴야 하는) 병사들의 심리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묘수라 여겼다.

"옷을 어디 벗었는지 기억해두라"

회스는 자신이 목격한 최초의 가스 살인 장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너무나 처참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 거라 했다. 회스의 부하들은 가스실로 보내지는 희생자들을 마지막까지 속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물이 차가워질 테니 빨리 옷을 벗고 들어가라"는 식이었다. 그런 속임수 재촉을 했던 이들은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로 불리던 유대인 작업반원들이었다. 게토의 유대인 평의회와 유대인 경찰이 동족을 배신했던 것처럼, 수용소 가스실에서도 유대인이 동족을 죽이며 손을 더럽혔다. 회스가 밝힌 학살과정을 보자.

[탈의실에서는 목욕을 함으로써 이를 잡아야 한다며 옷을 벗어야 하는 이유를 (유대인 작업자들이) 그들 자신의 언어로 자세히 설명했다. 또한 그들은 희생자들에게 옷을 가지런히 두라고 얘기해준 다음, 자신의 옷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해 두라고 충고한다. 그래야 이를 잡은 다음에 옷을 빨리 찾아 입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옷을 벗은 희생자들은 가스실로 들어가는데, 그곳에는 샤워기들과 수도관이 설치돼 있어 진짜 목욕탕 같은 느낌을 주었다](루돌프 회스, 294-295쪽).

탈의실로 들어간 유대인들 가운데 눈치 빠른 이들은 죽음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조용히 눈을 감았지만, 때때로 옷을 벗길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경우 그곳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이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곧 이어 그가 마주한 것은 무표정한 경비병의 총격이었다.

회스에 따르면, 나치는 가스실의 처리 용량을 늘리려 애를 썼으나 기술적인 한계에 부딪쳐 그만 두었다. 회스는 이렇게 썼다. "만약 (처리 용량을) 늘리려 시도할 경우 시설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왔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선 그 시설 모두를 사용할 수 없게 됐을 것이다"(회스, 282쪽). 수용소로의 강제 이송은 1944년 후반까지 이어졌지만, 가스실 운용은 소련군에게 밀려 철수를 고민하던 시점인 1944년 11월에 멈추었다.

▲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닿은 뒤 ‘가용 노동자’로 분류돼 머리를 깎인 뒤 막사로 가는 여성 신입 수감자들. ⓒ위키미디어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의 역설

나치 수용소의 희생자들 가운데는 독가스가 아닌, 다른 요인으로 죽은 이들도 많았다. 인간이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최소량의 칼로리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급식, 강제 노동으로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다가 그냥 숨을 거두었다. 신체의 명역기능이 떨어진 이들에게 전염병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곤 했다. 제때 갈아입지 못해 더러워진 내복에 기생하는 이(蝨), 깨끗하지 못한 물이나 음식 등은 티푸스(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전염병을 일으키기 십상이었다.

아우슈비츠에 관심을 지닌 독자들이라면, 그곳 정문 윗부분에 나붙은 짧은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이 문장을 새겨볼수록 기묘하고 역설적이다.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던 수감자들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아우슈비츠에 닿자말자 '노동 부적격' 판정을 받고 가스실로 보내진 사람들과는 달리, 가용 노동자로 분류돼 왼팔목에 문신(수감자 번호)을 새긴 이는 40만 명쯤에 이른다. 이들은 한시적이나마 '자유'를 얻었다. 수용소장 회스는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장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의 궤변을 들어보자.

[건강한 죄수에게 있어 노동은 갇혀 있는 몸의 공허함을 견디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가 자발적으로 일할 경우 노동은 갇혀진 나날의 번거로움을 뒤로 미루게 하면서, 그의 마음을 채워준다. 그가 자신의 직업에 따르는 일, 또는 자신의 능력에 알맞거나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을 발견했을 때는 그 어떤 불쾌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정신적 기반을 획득한다](루돌프 회스, 94쪽).

아마도 위에 옮긴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는 없을 듯하다. 수감자들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어긋나는 수감 생활을 하면서 강요된 노동에서 자유를 느낄 수감자가 도대체 몇이나 될까 싶다. 수감자들이 만든 것은 독일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품들이었다. 수감자가 노동으로 '자유'를 얻었다면 그것은 가스실로부터의 벗어나는 '한시적인 자유'였고 '노예의 자유'였다. 가혹한 노동 환경 아래서 '천천히 죽어가는 자유'였을 뿐이다. 한 마디로 수용소 노동은 회스의 궤변과는 거리가 한참 먼 '죽음에 앞서 강요된 고통스런 노예노동'이었을 뿐이다.

제3수용소의 노예노동자들

제3수용소는 처음부터 노동 착취를 노리고 세워졌다. 화공 복합기업인 IG 파르벤(연합화학)은 독가스 치클론 B를 생산해 아우슈비츠에 공급했던 전범기업이다(연재 103 참조). 베를린 정부의 승인 아래 IG 파르벤이 군수품으로 쓰일 합성고무(인조고무) 공장을 아우슈비츠 가까이에 세우자, 그 옆에 거대한 수감자용 막사들이 들어서게 됐다. IG 파르벤이 만든 합성고무의 이름이 '부나'였기에 제3수용소를 '부나 수용소' 또는 '모노비츠수용소'라 불렀다.

IG 파르벤을 비롯해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근에 세운 공장들은 친위대 기업과 민간기업(사기업)들로 나뉘었다. 이들 공장들은 저임금이긴 했지만 수감자들의 임금을 독일 정부에 지불했다. 정작 노동자인 수감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했다. 노동 강도는 친위대 기업이 운영하는 공장이 훨씬 높았고, 따라서 사망률도 높았다.

[친위대 기업들은 수용소 수감자들을 수천 명씩 고용했다. 친위대 사용자에게 동원된 유대인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친위대는 속도를 중요시했다. 유대인들은 자갈이 가득 담긴 손수레를 언덕 위까지 속보로 밀어 올려야 했다. 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 수밖에 없었다](라울 힐베르크, 1279쪽).

문제는 독일 민간기업의 경영자들도 친위대 기업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IG 파르벤 임원들이 친위대의 악랄한 심성에 얼마나 오염됐는가를 보여주는 보기 하나. 공장으로 들어가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임원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저 유대인 돼지는 일을 좀 더 빠르게 할 수 있을 텐데..." 그러자 다른 임원이 내뱉듯이 대꾸했다.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놈들은 가스실에서 죽여야 해요." 박사학위를 지녔던 그 '유대인 돼지'는 조금 뒤 실제로 친위대 소속인 경비대원에게 맞아 큰 상처를 입고 동료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라울 힐베르크, 1287쪽). 인간의 목숨이 지닌 무게는 아우슈비츠에서 휴지처럼 가벼웠다.

수감 노동자의 기대수명은 3~4개월

이렇듯 독일 민간인 경영자들은 친위대 방식을 따라 수감자들을 혹사시키려 들었다. 공장을 세울 때 그곳 십장들은 수감자들이 시멘트를 지고 내달리는 '친위대 속도'를 요구했다. 그러다 힘에 부쳐 쓰러지면? 경비대원에게 그를 넘겨 가스실로 보내고, 다른 노동자를 받았다.

[아우슈비츠 연합화학(IG 파르벤)을 거쳐 간 수감 노동자는 3만5000여 명이었고, 그중 최소한 2만5000명이 죽었다. 그곳 유대인의 기대수명은 서너 달이었다. 아우슈비츠 인근 탄광의 기대수명은 한 달이었다. 연합화학은 친위대와 같이 수감 노동자들을 산 채로 유지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것이다](라울 힐베르크, 1287쪽).

사망자가 늘어남에 따라 수용소의 노동력 관리는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티머시 스나이더(미 예일대, 동유럽사)는 유대인 학살과 관련, 여러 측면에서 '결핍의 경제학'이 작동됐다고 풀이한다. 유대인 노동력이 필요했던 나치 독일의 유대인 절멸정책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스나이더의 역작(Black Earth: The Holocaust as History and Warning, 2015)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폴란드 유대인의 운명에 관한 나치의 결정에서는 유대인의 칼로리 생산성 대 칼로리 소비가 한 가지 적절한 고려사항이었다. 식량이 더욱 긴요해 보이는 순간에는 유대인을 죽였고, 노동력이 절실해 보였을 때는 유대인을 살려 두었다. 유대인이 단순한 경제 단위였을 뿐인 그런 암울한 시장에서 전체적인 추세는 절멸(집단학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티머시 스나이더, <블랙 어스: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열린책들, 283쪽).

3개의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은 가스실로 끌려갈 때까진 노예노동을 강요받았다. 나치가 수감자들을 살려둔 이유는 자비심에서가 아니었다. 전쟁이 길어지고 전사자가 늘면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유대인을 죽이려 수용소로 데려왔지만 노동력이 필요해서 살려두는 상황이 됐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의 표현에 따르면, 그런 상황은 나치 친위대의 입장에서는 '역설적인 상황'이라 했다. 분명한 것은 아우슈비츠에서의 노예노동은 죽음으로 가는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수감 노동자는 죽음이 잠시 뒤로 미뤄진 존재였다.

▲ 아우슈비츠 정문 위에 걸린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는 현판.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수감자들을 조롱하는 듯하다. ⓒ김재명

슈페어 군수장관, "친위대가 우리 노동자 잡아가"

1942년 유대인 학살 작전이 잇달아 벌어지자, '유대인=값싼 노예노동력'이란 생각을 하던 기업인들, 그리고 유대인 수송에 열차가 몰리면서 군 병력 이송을 어렵게 하는 데 불만을 지닌 군부 등에서 볼멘 목소리가 나왔다. 독일의 한 군사경제 전문가는 독일국방군과 친위대 모두에게 익숙한 어투로 이런 비판적인 보고서를 올렸다.

"우리가 유대인을 총살하고 전쟁포로를 죽게 하면, 해답을 찾아야 할 다음 질문이 제기됩니다. 누가 경제적 가치가 있는 생산을 한다는 말입니까?"(볼프람 베테, <독일국방군: 2차대전과 깨끗한 독일군의 신화>, 미지북스, 2011, 171쪽).

'히틀러의 건축가'로 알려진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20년형)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한창 전쟁 중인 1942년 2월 군수장관에 임명돼 패전 때까지 3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던 슈페어는 힘러의 친위대가 마구잡이 학살을 벌여 가뜩이나 부족한 노동력을 없애는 데 불만이 컸다. 그가 감옥에서 남긴 회고록(Inside the Third Reich, 독일어 초판 1969년)에서 관련 내용을 보자.

[전쟁 중에는 노동력 공급이 모든 산업분야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1940년대가 시작될 무렵 친위대는 빠른 속도로 여러 개의 노동수용소를 세웠고, 항상 수감자들로 가득 채웠다. 나의 부관들은 1944년 봄 친위대가 매월 3만 명에서 4만 명의 노동자를 우리(독일군수공장)에게서 빼앗아 간다고 추산했다. 1944년 6월 초 나는 히틀러에게 '1년에 50만 명을, 더구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숙련시킨 노동자들을 빼앗아가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항의했다](알베르트 슈페어,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마티, 2007, 626쪽).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힘러와 의논해보라'면서 '아마도 슈페어 당신이 바라는 쪽으로 처리해줄 거다'라고 말했지만, 끝내 헛일이었다. 훗날 옥중에서 슈페어는 뇌우치는 모습을 보였다.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생산량과 통계에 온 정신이 팔려있는 상황에서, 인간 본연에 대한 모든 생각과 느낌이 흐려져 있었다"(알베르트 슈페어, 628쪽). 슈페어는 군수장관으로서 오늘날의 인권 개념 존중보다는 전쟁승리를 위한 물자 확보가 더 급했을 것이다.

독일 기업인들도 '집단학살은 노동력 상실을 낳는다'고 걱정했다. 그들은 유대인 학살에 앞장 선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에게 "전쟁 수행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작업장들은 유대인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힘러의 반응은 어땠을까. 크리스토퍼 브라우닝(노스캐롤라니아대, 독일현대사)은 독일의 보통사람들로 구성된 101예비경찰대가 어떻게 냉혹한 살인기계로 바뀌어 히틀러 전쟁범죄의 하수인이 됐는가를 추적했던 연구자다(연재 92, 93 참조). 그의 역작(Ordinary Men, 1992)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힘러는 그런 주장을 단지 공연한 트집이라고 보았지만, 일단 친위대의 통제 아래 있는 수용소와 게토의 일부 노동 유대인들을 강제 이송과 학살 조치에서 빼는 것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힘러는 전시 경제에 유대인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는 실용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유대인의 운명이 결국 자기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크리스토퍼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101예비경찰대와 유대인 학살>, 책과함께, 2010, 206쪽).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 가스실을 그야말로 풀가동시켜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힘러의 믿음은 그가 주군으로 받들었던 히틀러에 뒤지지 않았다. 히틀러의 희망대로 "언젠가는 유대인 유해병균, 기생충들이 유럽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힘러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치 독일의 전시경제에 도움 되는 쪽으로 일하는 유대인 노동자들도 결국은 '제거' 대상일 뿐이었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그곳을 접수했을 때 7000명이 남아 있었다. 소련군 병사들의 눈에 비친 생존자들은 대부분이 몹시 여위어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1940년부터 5년 동안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된 사람은 유대인 110만 명(헝가리 출신 44만, 폴란드 30만, 프랑스 7만, 네델란드 6만 등)을 포함한 130만 명쯤으로 추정된다. 유대인들 말고도 소련군 포로, 집시(로마족), 정신장애인, 동성애자, 반체제 저항분자, 강력범죄자(강도) 등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었다. 홀로코스트 하면 유대인 희생이 유독 강조되지만, 다른 집단의 사람들도 희생을 치렀다. 다음 주 글에서 나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수용소에 갇혀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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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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