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국가인권위원회가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관련 인권침해 방지 대책 권고 및 의견 표명"이라는 충격적인 결정문을 발표했다. 단언컨대, 인권위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기록될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김용원 상임위원 등 5명의 인권위원이 제출했던 초안과 이번에 채택된 결정문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이번 사태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다. 초안은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의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이었는데, 최종적으로는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관련 인권침해 방지 대책 권고 및 의견 표명"으로 바뀌었다.
초안은 1)한덕수에 대한 탄핵소추 철회 및 공직자 탄핵소추 남용 자제 권고, 2)한덕수 탄핵심판 신속심리 3)윤석열 탄핵심판 피청구인 방어권 보장 및 적법절차 준수, 4)계엄 관련 피고인 불구속재판, 5)계엄 관련수사 무죄추정 원칙 준수, 피고인 보석허가 및 불구속재판 등으로 주문을 구성했으나, 최종적으로는 1)과 2)가 제외됐다.
탄핵심판 자체에 대한 의견을 내는 것이 인권위의 권한이 아니라는 내외부의 비판을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애초에 "국가위기 극복 대책"을 전면에 내세웠다가, "인권침해 방지"로 슬쩍 바꾼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정문에서는 "모든 사람의 인권은 존중돼야 하며, 그 어떤 이유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는 기관이어야 한다."는 거창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인권'은 동원된 수사에 불과하다. 결정문의 의도는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공표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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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도 근거도 없는 결정문
애초 의도가 그러하니 결정문에는 인권침해에 대한 근거와 논리는 없고, 비상계엄을 옹호하는 엉성한 논리들로 가득하다. 인권기구의 결정문이 아니라 부실한 정치선언문 같은 느낌이다. 대통령 윤석열, 국무총리 한덕수, 법무부장관 박성재에 대한 탄핵심판의 옳고 그름 자체를 판단하는 것은 인권위의 권한이 아니다.
결정문에서는 탄핵으로 인해 국민 선거권과 공무담임권이 침해된다고 주장하며 이를 '인권침해'로 연결하지만, 이런 논리가 가능하려면 비상계엄령이 정당했고 탄핵심판이 부당하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결정문에는 막연한 추측과 의심만으로 가득 차 있다. 결정문의 서술어는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주장되기도 한다", "의심을 받기도 한다", "논란도 있었다", "견해가 있다"는 식의 추측성 문구로 가득 차 있다.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실제로 비상계엄 선포를 정당화하기 위해 기술한 구절을 보면, 대통령 담화문에 담긴 주장을 그대로 소개한 뒤 "대통령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는 이를 수긍하는 국민도 있고, 수긍하지 못하는 국민도 있다. 다만, 국민 여론은 대통령의 주장에 긍정적인 의견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 주장에 찬성하는 국민 여론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인권위가 탄핵의 부당함을 설명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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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관이 이런 식으로 의견표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그 다음으로는 비상계엄이 통치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법심사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고 있지만, 이는 자신들의 유리한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대법원 판례의 전체 취지를 왜곡하고 있다.
내란죄 수사와 재판에 관련해서는 인권의 관점에서 점검해야 할 여지가 있기는 하다. 대역죄를 지은 권력자도 인권이 존중돼야 한다는 게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문에 담긴 불구속재판 원칙이나, 적법절차 준수 등은 인권위가 관심을 가져야 할 논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권위 결정문은 형사절차에서의 인권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이 아니라, 구체적 당사자의 구체적 사건에 대한 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구속재판을 받는 수많은 피의자, 피고인들을 제쳐두고, 굳이 대통령 윤석열과 계엄에 연루된 고위 장성들에 대해서만 의견을 표명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제시돼야 한다. 하지만 결정문은 "피의자의 방어권에 대한 진지한 고려 없이 영장을 발부한 것으로 의심을 받기도 한다.", "영장담당 판사 쇼핑 논란도 있었다.", "(이재명은 불구속재판을 받는 것에 비춰) 계엄 선포 관련자들에 대한 영장 발부가 공정성을 상실했다는 주장도 있다.", "내란죄를 구성하기까지 하는지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다.", "하급심 법관들이 그 유죄를 단정하여 피고인들에 대한 구속을 유지함으로써 신체의 자유를 계속 박탈하는 것에 대해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는 등 형사절차를 둘러싼 논란을 단순히 '소개'하고 있는 것이 전부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세간에 논란이 있으니 불구속재판 원칙을 유념하라'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논란이 있는 온갖 형사재판에 대해 인권위가 의견표명을 해야 할 것이다. 왜 굳이 이 사건에 대해서, 이런 빈약한 논거로 의견표명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번 인권위 다수의견에 가담한 위원들이 평소 형사절차에서의 인권에 대해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지속적이고 일관된 관심을 가져온 것도 아니다. 위헌적, 불법적 비상계엄 자체가 중대한 인권침해인데, 이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계엄사태를 야기한 사람들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나선다는 것도 모순이다.
인권위 결정문의 취지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도, 이번 결정문은 윤석열 등 계엄 관련자들을 구하기 위한, 계엄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하기 힘들다.
질적으로 다른 인권위의 추락
2001년 인권위 설립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문제와 이번 계엄 사태로 불거진 위기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최악의 인권위원장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현병철 위원장 시절에도 인권위가 권한 범위를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정치적 사안에 개입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인권위가 해야 할 일을 방기하거나 소극적이었던 부분이 주로 문제가 되었다. 물론 인권위는 그래서는 안 되는 조직이기 때문에, 가차 없는 비판을 받았다.
인권위원은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지명, 선출하기 때문에 보수 성향의 인권위원들도 여럿 있었다. 상당수의 보수 성향 인권위원들은 인권위의 기본적인 이념과 지향을 존중했고 인권위원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인권위가 좀 더 신중하고 차분하게 인권옹호 임무를 수행하도록 견제하고 견인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권은 좌도 우도 아니고, 진보도 보수도 아니"라는 '말'을 '행동'으로 보여준 몇몇 인권위원의 면면도 떠오른다.
하지만 이번 인권위 결정문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치적 사안에 개입하고 사실상 '대통령 윤석열 구하기'에 나섰다는 점에서 이전의 인권위 문제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 우발적인 사건도 아니다. 이미 두 상임위원은 인권위 설립의 기본 취지에 위배되고 인권위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기행을 수차례 반복해왔고, 반인권적 세력과 조력해온 안창호 인권위원장의 취임으로 정점에 올랐다. 비상계엄 사태가 있기 전부터도 인권위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행보를 보여온 이들이 윤석열 대통령이 위기에 처하자 구하기에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희망의 불씨를 찾아서
인권위 감시와 비판을 해온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은 15년 동안 '인권위 제자리 찾기'라는 구호를 내걸고 활동해 왔다. 이번 비상계엄 관련 결정으로 추락한 인권위가 제자리를 찾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들 것이다. 인권위는 법적 강제력이 아니라 도덕적인 권위와 시민의 지지에 힘입어 돌아가는 기관이다. 이런 기관이 추락한 위상을 다시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에서 끝까지 저항하고 항의한 사람들에게서 희망의 불씨를 찾을 수 있다. 인권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사력을 다해 결정문 채택을 막았고, 인권위 직원들도 '인권위 직원다운' 결기를 보여줬다. 30여명의 전현직 인권위원들은 안건이 공개된 지 하루 만에 인권위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었고, 인권법학회와 인권학회 그리리고 인권연구자들은 불과 이틀 만에 655명의 서명을 받아 "불법계엄 동조 안건 상정한 안창호 사퇴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정문 채택에 반대한 위원 네 명이 반대의견 두 건을 역사에 남겼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실망과 충격 속에서도 인권위에 관한 관심이 아직은 식지 않은 것이다.
인권위는 정치권력과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인권위를 구성하는 권한은 어쩔 수 없이 정치권력에 있다. 이번 인권위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인권위 구성에 직접 관여한 기관, 특히 대통령과 국회에 있다. 문제의 위원들은 지명하고 선출한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의 책임은 말할 것도 없고, 야당도 인권위의 독립성 확보와 위상 제고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여왔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차기 대권에 도전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이번 인권위 사태에 대한 평가와 함께 '인권위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나는 이 비전을 보여주는 후보에게 기꺼이 나의 한 표를 던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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