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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행 이송열차에서 나는 지옥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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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수용소행 이송열차에서 나는 지옥을 봤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06]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34

[기차에 올랐다. 좌석도 통로도 창문도 없는 가축 운반용 화물열차였다. 축사(畜舍)나 다름없는 화물칸 안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겼다. 찌릿한 암모니아 냄새가 콧구멍 깊은 곳까지 훅 들어왔다. 그나마 공기가 통하는 곳이라곤 지붕 슬레이트 틈새뿐이었다. 칸마다 60~80명의 사람들과 그들의 소지품이 꽉꽉 들어찼다. 더 이상 움직일 공간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빈 양동이 하나와 물 양동이 하나가 밀어 넣어졌다.](록산 판이페런, <아우슈비츠의 자매>, 아르떼, 2024, 333쪽)

윗글은 네덜란드 변호사이자 작가인 록산 판이페런의 책(The Sisters of Auschwitz, 2019)에서 옮겨왔다. 지난 2012년 네덜란드 시골의 한 오래 된 주택을 사들여 리모델링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모든 방바닥에 지하실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다. 나치 게슈타포(비밀경찰)가 들이닥칠 경우 몸을 피하는 통로였음을 곧 알아챘다. 넓은 지하실엔 타다 남은 양초와 더불어 그곳 유대인들이 몰래 찍어낸 저항 신문들로 가득했다.

수용소행 열차에서 지옥을 보다

알고 보니 그곳은 1944년 9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유대인 자매(린테, 야니)가 숨어 살던 곳이었다. 판이페런은 슬픈 과거사를 지닌 그 집 가까이에 살았던 유대인 후손들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유대인 자매에 관한 책을 써냈다. 자매가 아우슈비츠행 열차에 실려 가던 상황을 그린 대목을 더 보자.

[문이 꽝 쾅 닫혔고 화물칸 안은 순식간에 칠흙 같은 어둠에 잠겼다. 마치 생매장당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아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바깥 승강장에서 고함소리와 묵직한 군홧발 소리가 울렸다. 독일군들은 서로 농담을 던지며 낄낄댔다.](록산 판이페런, 335쪽)

우리 인간이 극한상황에 내몰리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이라도 지켜야 할 품위와 타자에 대한 배려일 듯하다. 화물열차에 실린 사람들은 처음엔 예의를 지켰다고 한다. 옆 사람 발을 밟거나 부딪치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고, 밟힌 사람은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빽빽이 들어찬 데다 악취로 숨쉬기조차 어려웠기에 거의 기절하려는 사람이 생기면, 천정 슬레이트 틈새 쪽으로 들어 올려 공기를 더 마시도록 돕기도 했다.

그러나 열차 안의 열악한 환경은 사람들의 열린 마음을 조금씩 닫아갔다. 오줌도 그냥 제자리에서 옷을 입은 채 싸야 했다. 문명(文明)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바뀌어 갔다. 발이 밟히면, 험한 욕설을 해댔다. 분위기는 갈수록 흉흉해졌다. 다들 힘들었지만 저마다 내 몸이 불편하지 않도록 챙겨야겠다는 생각들이 앞섰다. 작은 자극에도 거칠게 반응했다. 수용소행 열차에서 유대인들은 이미 지옥을 봤다. 수용소에 닿아서도 14세기 이탈리아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神曲)>에서 그렸던 지옥도와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 바르샤바게토 봉기 끝 무렵인 1943년 5월9일 벙커에서 나와 항복하는 유대인 청년. ⓒ위키미디어

"무장투쟁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열차는 짧게는 하루나 이틀, 길게는 열이틀까지 걸렸다. 수송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목마름, 질병으로 죽었다. 종착역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 또는 노예노동이었다.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은 유럽의 원주민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았지만 이렇다 할 저항을 보여주지 못했다. 20세기 나치 독일의 명령에도 순한 양처럼 수용소행 지옥열차에 올라탔다.

굴욕과 무저항의 2000년 유대인 역사에 비춰볼 때, 1943년 봄 수용소 이송을 거부하면서 750명의 유대인이 일으켰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다. 그래서일까, 이스라엘 학교 교실에선 바르샤바 봉기를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2000년 전(서기 73년) 로마제국의 지배에 맞서 결사 항전했던 마사다(Masada) 요새의 전사들만큼이나 바르샤바 게토 전사들을 기린다.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기념관이나 미국이나 폴란드 곳곳의 홀로코스트 기념관들을 가보면, 바르샤바 봉기와 관련된 공간을 꼭 마련해두고 있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홀로코스트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라울 힐베르크(버몬트대, 1926-2007)는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이 보여 왔던 굴종적 태도에 견주면 게토 봉기는 '혁명적'이라 했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엑세터대)는 유대인들이 '사냥 당한 동물처럼 죽지 않고 존엄하게 죽겠다'면서 총을 들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연재 105). 물론 힐베르크와 오버리, 이 두 연구자들은 게토 봉기의 한계도 지적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교과서나 기념관들은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지닌 문제점이나 한계를 다루지 않는다. 투쟁의 의미만을 강조할 뿐이다. 문제점을 요약하자면, △봉기가 너무 늦었고 △봉기 참여자 숫자가 매우 적었고 △무장조차 형편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봉기 참여자 숫자가 겨우 몇 백 명에 그쳤던 것이 실패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독일군에 맞서 봉기해야 한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자신이 나서는 걸 꺼렸다. 어떤 이들은 봉기를 일으키자는 투쟁론에 아예 손사래를 쳤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는 "무장투쟁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며 유대인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비판했다.

[폴란드 유대인들이 무장투쟁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독일인들의 명령에 자동으로 순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폴란드 게토의 유대인 지도부는 순응의 선두에 섰고, 평의회 의장은 게토 유대인들의 순응을 관철시켰다. 그들은 언제나 일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다른 일부 유대인들을 넘겨주었고, 상황을 '안정'시킨 뒤 남은 사람들을 또다시 반분했다. 그러한 반분 과정은 계속되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674쪽)

힐베르크가 보기에는, 나치의 명령에 고분고분하기만 했던 유대인 게토의 장로들(대개는 유대인 평의회의 중심인물들)이 누구보다 봉기를 막아섰다. 그들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도왔다. 폴란드 서남부 슐레지엔의 유대인 평의회 간부 모제스 메린도 그런 인물이었다. 강제이송을 앞두고 메린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나는 우리 공동체의 5만 명을 구하기 위하여 5만 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귀중품 대부분을 던져버림으로써 가라앉는 배를 항구에 안전하게 입항시키는 선장과 같습니다. 나는 굶주리고 분노한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철창 앞에 서 있습니다. 나는 맹수가 철창을 부수고 튀어나와 우리 모두를 갈기갈기 찢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입에 형제와 자매의 살을 채워 넣고 있습니다."(라울 힐베르크, 674쪽)

나치에 저항 못한 세 가지 이유

유대인들이 나치에 제대로 저항을 못한 이유를 두고 여러 논란이 있지만,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의 글을 모아보면 큰 틀에서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로, 유대인들은 허튼 희망을 품고 있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버티면 독일이 전쟁이 지는 날이 올 것이고, 그러면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이런 헛된 희망을 품은 이들은 게토로 들려오는 나쁜 소식들(이를테면 어디어디 게토 유대인들이 모두 열차에 실려 수용소로 끌려가 독가스로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을 사실이 아닐 거라고 여겼다. 확실한 정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최악의 상황이 닥쳐올 거란 비관적 전망을 '지나친 상상(想像)'이라고 내치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어디서나 유대인 공동체(게토주민)들은 자기들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어느 정도만 알고 있었고, 최악의 소식이 진실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 강한 경향을 보였다. 바르샤바 게토의 누군가는 일기에 유감스럽다는 투로 '무서운 소문들은...어지간히 부풀린 상상의 산물'이라 썼다.](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2>, 책과 함께, 2024, 1143쪽)

특히 독일인 기업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사이에선 이런 생각들이 퍼져 있었다. "독일의 패망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때까지 열심히 일하다 보면 우린 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주 글에서도 봤듯이, 바르샤바 게토 주민들을 하루에 6000명씩 열차에 실어 보내겠다고 하면서도, 나치는 공장 숙련공들을 이송 명단에서 빼놓았다. 독일군이나 친위대가 쓸 군수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그들마저도 끝내는 수용소로 끌려갔다. 다만 죽음의 문턱을 남들보다 늦게 넘었을 뿐이다.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힘들더라도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허망한 꿈이었다.

둘째로, 나치 독일에 맞선 봉기가 잔혹한 보복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두려움이 컸다. 나치 독일은 군인이나 경찰 1명이 누군가의 기습공격을 받아 죽으면 100명의 민간인을 처형한다는 방침을 내밀어왔다. 실제로 그런 보복들이 곳곳에서 이뤄졌다. 섣부른 저항은 유대인 공동체를 위험에 빠트리기 마련이었다. 내가 봉기할 경우 내 가족이 더 어려운 처지에 빠질 것이라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컸다. 나치에 비폭력으로 대응하고 명령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 내 가족을 지킨다는 생각들이 앞선다면, 총을 잡기 어렵다.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비참한 상황을 기록한 한 유대인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왜 숲으로 도망치자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왜 저항하라는 외침이 없는가? 우리는 모두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괴로워하고 있지만, 그러나 답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저항하면, 특히 독일인이 한 명이라도 죽으면, 그것은 유대인 공동체 전체, 혹은 몇 개 공동체의 말살을 불러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울 힐베르크, 679-680쪽)

▲ 1942년-1944년 무렵 나치 집단학살 수용소를 향한 주요 수송 경로.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헛된 반란보다 나치 명령 따라야 산다"

빌뉴스(리투아니아 수도) 게토의 경우를 보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엔 폴란드 영토였던 빌뉴스에는 주민 20만 가운데 유대인이 30~40% 살고 있었다. 1941년 6월 빌뉴스가 독일군의 점령 아래 놓이자, 그곳 유대인들은 2개의 게토에 나뉘어 갇혔다. 유대인들은 독일 군수품 생산을 위한 노예노동자로 살아가야 했다. 수용소로 떠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1943년 3월 봉기가 터졌다. 그때 총을 들었던 유대인은 30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숫자가 적었던 데엔 봉기에 신중해야 한다는 유대인 장로들의 만류가 있었다.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인 야초프 겐소는 이렇게 주장했다. "헛된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나치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죽지 않고 목숨을 이어갈 가능성이 더 크다." 겐소가 신중론을 펴자, 게토 주민들 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 게토에 살았던 헤르만 크루크는 일기에다 '헛된 희망이 이 게토 최악의 질병'이라 적었다(리처드 오버리, 1144쪽). 다른 게토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셋째로, 유대인 공동체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모스크바에 선이 닿는 공산주의자냐, 독립적인 사회주의자냐, 유대 민족주의자냐, 팔레스타인 귀환을 내세우는 시온주의냐로 갈렸다. 종교적으론 보수 정통파 유대인이냐, 기독교인이냐, 세속적인 무신론자냐로 나뉘어 서로를 은근히 멸시했다. 일부 유대인들은 "야훼 하느님께서 예비해두신 게 틀림없는 운명을 아무도 방해할 권리가 없다"면서 봉기를 반대했다. 이런 분열은 벼랑 끝자락에 내몰린 유대인들이 한뜻을 모아야 하는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1942년 1월20일 베를린 교외 반제 호숫가의 친위대 별장에 모인 나치 차관급 간부들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위해 '수용소 이동과 집단학살'을 결정했다. 반제 회의는 유대인들에게 내린 죽음의 선고를 뜻했다(연재 91 참조). 그로부터 수용소로의 강제이송과 학살이 본격화됐다. 유대인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아무리 나치가 잔인하더라도 설마 몇 백만 명의 유대인을 모두 절멸하기야 하겠는가'라며 생존 가능성 쪽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1942년 봄이 지나면서 유대인의 운명이 더 끔찍하게 바뀔 것이란 으스스한 소문이 유대인들 사이에 나돌기 시작했고, 그 소문은 현실로 바뀌어 갔다.

"6만 명만 이송" 소문에 기대감 품어

그 무렵 유대인들이 저항의지를 갖고 있었다 해도 실제로 행동에 나서긴 조심스러웠다. 봉기가 수용소로의 유대인 추방 속도와 규모를 키울 것이란 걱정도 한몫했다. 그런 걱정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게토에서의 부실한 배급량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무기를 들기에는 너무 허약해졌고, 게토 인구의 다수는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리거나 몸이 아팠다. 카빈총이나 권총, 수류탄 등 맞서 싸울 무기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게토 유대인들이 모두 무기력하게 나치의 손에 운명을 내맡기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1942년 봄 지하신문이 처음 나왔다. 독일의 살인적인 게토 정책을 비판하면서 저항의지를 북돋는 기사들로 지면이 채워졌다. 게토를 감시하던 나치 비밀경찰(게슈타포)는 주민 51명을 처형함으로써 경고 겸 보복을 했다.

그때 유대인 평의회가 보인 태도는 논란을 불렀다. 평의회 의장 체르니아쿠프는 "지하 신문이 유대인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토 유대인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지하신문 발행을 그쳐야 한다고 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바르샤바 게토는 표면적으론 조용했다. 하지만 1942년 7월22일 친위대 장교가 평의회 사무실에 나타나 "하루 6000명씩 열차로 이송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지하신문을 막으면서까지 나치에 고분고분했던 평의회 의장 체르니아쿠프는 절망한 나머지 자살했다.

체르니아쿠프의 자살 소식이 알려진 늦은 밤, 유대인들은 즉각적인 저항에 나설 것인지를 논의했다. 하지만 봉기를 일으키자는 데 찬성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봉기 반대자들은 나치가 당시 38만 명으로 추정된 바르샤바 게토의 모든 유대인을 이송하려는 게 아니라 6만 명쯤만 이송할 것이란 소문을 믿고 싶어 했다. 그들은 봉기가 자칫 게토 유대인 모두의 몰살을 앞당길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소문은 잘못된 것임이 곧 드러났다. 1942년 7월 말 6만 명 넘는 게토 유대인이 수용소로 떠났고, 이송이 늦춰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갈수록 한계상황에 내몰린 유대인들은 나중에야 무기를 들고 일어났지만 너무 늦었다. 언젠가는 전쟁이 끝나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이 말 그대로 '희망 고문'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뒤에야 무기를 잡았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1943년 5월 처참한 실패로 마무리됐다. 그 뒤로 너무 늦게 봉기를 했다고 자책하는 말들이 오갔다. 1943년 10월 한 유대인 역사학자 엠마누엘 링겔블룸은 이런 물음을 던졌다.

[그들이 30만 명을 이주시키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도살장의 양처럼 순종했는가? 적은 어떻게 만사를 자신의 뜻대로 그토록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는가? 도살자들은 왜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는가? 결코 이주를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길거리로 뛰어나가 보이는 모든 것에 불을 지르고, 게토 벽을 허물고, 반대편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랬더라면 물론 독일인들은 복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으면 우리는 30만 명이 아니라 수만 명만 희생되었을 것이다.](라울 힐베르크, 685쪽)

나치에 맞선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던 한 유대인 지도자도 30년 뒤 그 봉기를 되돌아보면서, 수용소 이송이 본격화되기 앞서 '무슨 일이든 했어야 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유대인 치안대는 곤봉과 단도로 무장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총이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죽여야 했다. 그들 중 몇 명이 죽었으면, 사람들은 치안대 가입을 꺼렸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한밤중에 전봇대에 목매달아 죽여 그들을 위협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청년들을 매복시켜서 치안대를 공포에 떨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라울 힐베르크, 687쪽)

수용소 이송대상 220만 명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이 논의된 뒤 1000개가량의 게토 안에 갇힌 유대인들은 수송열차 편이 닿는 대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무렵 이미 게토 유대인은 적어도 50만 명이 사망했다. 나치는 수용소로 강제 이송해야 할 유대인 숫자를 220만 명으로 꼽았다. 폴란드 총독령 160만 명, 독일 병합지역 40만 명, 비아위스토크 지구(벨라루스에 가까운 폴란드 북동부 국경도시)의 20만 명을 합쳐서였다(라울 힐베르크 662쪽). 여기에 서유럽과 발칸반도의 유대인들이 더해졌다.

이렇게 숫자가 구체적으로 남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독일인들의 특징이랄 수도 있는 '정확한 기록' 덕이다. 유대인들을 학살수용소로 이송하는 임무는 하인리히 힘러를 우두머리로 한 친위대(SS)가 맡았지만, 열차를 운용하는 '제국철도국'이 관련됐다. 동부철도 총국은 유대인에게 받아낼 운임을 계산하기 위해서 '승객' 숫자를 되도록 정확히 기록하려고 했다.

제국철도국은 군인과 군용물자를 때 맞춰 실어나는 것이 최우선 임무였다. 그러나 친위대가 유대인 수송에 필요하다고 '신청' 하면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베를린의 교통부는 제국철도국에다 "친위대가 요구하는 대로 이주열차를 내주라"고 지시했고, 동부철도 총국으로도 지시가 전해졌다(열차 우선배정 문제로 친위대와 독일군 수뇌부 사이엔 갈등이 일었다).

나치 수용소로 가는 '죽음의 열차'는 아무런 비밀 표시도 달지 않았다. 군 병력과 대포 등 무기를 수송하는 기차들과 시간차를 두고 수용소로 내달렸다. 이송자의 대부분은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게토에서 화물열차를 타고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로 향했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 독일이 점령한 서유럽에서 붙잡힌 유대인들도 열차를 타고 폴란드 수용소로 보내졌다.

유대인 수송 열차는 수용소에 닿기도 전에 많은 사망자를 냈다. 사례 하나를 보자. 1942년 9월10일, 화물열차가 유대인 8205명을 싣고 남부 갈리치아(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동부 일부에 걸친 지역)의 콜로미야 도시를 떠났다. 가는 도중에 1000명의 유대인을 더 태웠다. 대부분이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악취와 목마름으로 초죽음이 됐다. 마침내 열차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성격의 수용소인 베우제츠에 닿았다. 그 열차에 경비병들과 함께 탔던 나치 치안경찰 분대장이 올린 보고서를 보자.

[열차 1량에 250명까지 탑승시킨 과부하와 그로 인한 열기, 그리고 시체 썩는 냄새로 유대인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하차할 때 확인해보니 시체가 2000여 구였다. (이런 방식의 초과밀) 이송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었다.](라울 힐베르크, 676쪽)

▲ 폴란드 로츠 게토의 유대인들이 헤움노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 화물칸에 실렸다(1942-1944년 무렵).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아기 엄마들, 나흘 동안 물 달라며 흐느껴

이탈리아 유대계 화학자 프리모 레비(1919-1987)는 1945년 1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접수하면서 살아남은 이른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1941년 토리노대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파시즘에 맞선 지하운동에 함께 했다가 붙잡혔다. 1944년 1월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뒤 전범기업으로 악명 높은 IG 파르벤의 합성고무 공장에서 일했다. 1년 동안의 수용소 시절을 돌아보며 레비는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섬세한 눈길로 담은 여러 책들을 써냈다. 레비가 이탈리아 포솔리 감옥에서 아우슈비츠로 가는 나흘 동안의 열차 속 상황을 그의 책(Se questo è un uomo, 1958)에서 보자.

[우리는 갈증과 추위로 고통 받았다. 기차가 정거장에 설 때마다 큰 소리로 물을 달라거나 아니면 눈이라도 한 뭉치 달라고 소리쳤지만, 우리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호송 병사들은 열차에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 쫓아버렸다. 갓난아기들을 데리고 탄 젊은 엄마 둘이 밤낮으로 물을 달라고 애원하며 흐느꼈다. (나흘 동안) 배고픔, 피로와 수면부족이 그나마 덜 고통스럽고 덜 가혹하게 느껴진 것은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들은 끝도 없는 악몽의 시간이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19-20쪽)

미국인 작가인 테렌스 데 프레(콜게이트대, 영문학)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며 나치 독일과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관한 글을 써왔다. 그가 1976년에 낸 책(The Survivors: An Anatomy of Life in Death Camps)은 한계상황에 놓인 인간군상을 둘러싼 깊이 있는 통찰을 담았기에 홀로코스트 분야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책도 폴란드 수용소로 가는 열차 안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화물차는 창문도 없이 밀폐돼 있어서 사람들의 체온이 빠져나갈 틈이 없었기에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마침내 새벽이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지치고 병들어 있었다. 그것은 피로 때문만이 아니라, 숨이 막히는 축축한 공기와 배설물의 악취 때문이기도 했다. 변소는 고사하고 그 대용품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질식 상태에서 마룻바닥에 토해놓은 것들이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열차 안에서) 그 고약한 냄새를 맡고 살아야만 했고, 얼마가지 않아 오물 그 자체 속에서 살게 됐다.](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서해문집, 2010, 105쪽)

유대인들에게 음식은 물론 마실 물 없이, 소변도 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열흘 넘게 열차에서 지냈다. 그런 끔찍한 '열차 여행' 뒤 닿은 수용소는 또 다른 지옥이었다. 수용소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우슈비츠다. 흔히 "유대인 600만 명이 홀로코스트로 죽었다"고 말한다. 홀로코스트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라울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510만 명쯤으로 꼽았다. 이 가운데 아우슈비츠에서만 1백만 명 가까운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721쪽).

나치 수용소에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흐릿했다. 그곳에선 인간의 목숨이 그야말로 휴지처럼 가볍게 다뤄지고 내버려졌다. 볼프강 벤츠(베를린기술종합대, 독일현대사)는 수용소를 가리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거대한 살인기계'이며 '인간의 상상력 너머에 있었다'고 잘라 말했다(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2002, 138쪽). 만주에서 세균무기를 개발한답시고 생체실험을 거듭했던 일본군 731부대의 만행과 마찬가지로, 나치 수용소에선 인류문명사에서 지우고 싶은 '야만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야만은 21세기로 이어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유대인들이 되풀이했다. 다음 주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 수용소의 지옥도를 독자들과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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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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