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에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인권단체가 안창호 위원장을 향해 "가짜 인권은 필요 없다"며 안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등 36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 활동가들은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을 기념해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24 인권의 날 기념식' 행사에 참석하려는 안 위원장을 가로막고 "군이 국민에게 총구를 겨눌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비상계엄 관련해 시민들이 겪은 인권 침해 사례가 없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몰아붙였다. 안 위원장은 입을 다문 채 묘한 미소로만 응대했다.
안 위원장의 침묵에 "비상계엄에도 권력의 눈치만 보고 있다. 부끄럽다", "비상계엄에 언제까지 침묵할 것인가"와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는 두 차례의 시도 끝에 기념식 시작 10분을 넘겨 행사장에 들어갔다.
안 위원장이 입장하자, 기념식 자리에 착석해있던 김수정 전 비상임인권위원과 원민경 현 위원은 불참 의사를 밝히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김 전 위원은 "인권위에서는 아무 입장도 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인권위원장이 (세계 인권의 날)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오늘 내란죄의 주범인 대통령의 표창 수여도 있는데 그런 행사가 절대 진행돼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인권위는 계엄 사태 일주일이 된 이날까지도 공식 입장을 내고 있지 않다. 인권위는 사태 이후 상임위원회(5일)와 전원위원회(9일) 등 두 차례 회의를 개최했지만 윤 대통령이 계엄 선포가 가져온 국민적 트라우마에 대한 성명 및 사태 직권조사 여부에 대한 입장 등을 결정하지 못했다. 인권위의 다음 전원위는 오는 23일로 예정되어 있다.
공동행동은 이에 앞서 프레스 센터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계엄 사태를 "국가 공권력에 의해 행해진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멈추고 국민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짧은 시간에 계엄이 해제됐지만 그 여파는 계속되고 있고 국민들은 지금도 2차 계엄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어 "위협받은 이들은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뿐만이 아니다"라며 "계엄사령부의 포고령은 우리 헌법이 보장한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정면으로 거스른 것은 물론 윤 대통령과 비상계엄에 동조한 이들을 제외한 모든 국민의 인권을 무참히 침해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동행동은 "법원, 검찰, 경찰은 물론 일부 국무위원들과 비상계엄의 주축이었던 군마저도 '비상계엄은 잘못된 것'라고 선언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 선포의 인권침해를 지적하고 인권침해를 자행한 이들을 꾸짖어야 할 인권위원장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국가 인권기구의 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송두환·최영애 등 전직 인권위원장을 비롯한 전직 인권위 구성원들은 지난 6일 "인권위는 반헌법적 사태에 더 이상 침묵하지 말라"며 비상계엄에 대한 직권조사를 촉구했다. 이들은 인권위의 침묵이 국민의 불안과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우려 또한 증폭시키고 있다고 질타했다.
시민단체들은 제76회 인권선언의 날을 맞아 발표한 기자회견문과 성명을 통해 계엄 사태가 가장 취약한 이들의 인권을 짓밟았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고착된 차별 구조의 민낯을 드러냈다고 성토했다.
공동행동과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등은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는 자유, 정의, 평화를 위해 싸우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합법적 정치 권력 하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가치해질 수 있는지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경험했다"며 "윤석열 즉각 퇴진"을 한목소리로 외쳤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수자인권위원회도 성명을 내고 "시민들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모이고 말할 자유를 박탈하는, 헌법적으로 그 어떤 정당성도 찾아볼 수 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포고령 앞에 수많은 사람들의 싸움으로 지켜낸 인권의 가치는 참혹히 훼손되었다"고 한탄했다.
위원회는 특히 "위기는 소수자에게 더욱 가혹하다"며 "위헌적 비상계엄과 군대의 국회 난입 등 급박하게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음성과 화면만으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시청각장애인과 한국어가 낯선 이주민은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장애인, 거리로 내몰린 홈리스, 차별과 혐오 속에 고립되기 쉬운 성소수자는 비상계엄 선포로 더 큰 공포와 불안을 느껴야 했다"며 "비상계엄 사태는 우리 사회에 고착되어온 차별의 구조와 약한 고리의 민낯을 드러낸 순간"이라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은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격분시키는 만행을 초래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며 "한국 사회에서 인권과 그 토대가 되는 민주주의가 무시된 지금, 우리는 더 큰 만행을 막고자 소수자 시민들의 투쟁에 연대하며 다시 한 번 외친다. 윤석열은 즉각 퇴진하라! 국민의힘은 탄핵에 동참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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