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본 체육계 수장은 힘이 없고 한국 체육계 수장은 힘이 세다. 일본 체육계 권력은 분리돼 있지만 한국 체육계 권력은 일원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일본 체육계 권력을 하나로 통합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게 됐다. 반대로 한국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체육계 권력을 정부가 나서서 지속적으로 견제해 왔다.
흥미롭게도 일본 체육계 수장의 권력이 약화된 것은 한국의 영향이 컸다. 1986년과 1988년에 일본은 한국 스포츠의 비약적인 성장에 깜짝 놀랐다.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종합 2위를 차지했다. 일본은 3위였다. 그런데 두 국가의 금메달 수 차이는 무려 35개였다. 일본 정부는 일본 체육계에 더 많은 재정을 투자해 일본 스포츠의 위상을 되살려 놓으라는 주문을 했다.
하지만 2년 뒤 펼쳐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도 한국은 종합 4위를 차지 했고, 일본은 14위로 추락했다. 일본 체육계는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성공 신화는 각종 체육단체장을 맡았던 재벌 기업 총수 일가의 재정적 후원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일본은 일본체육회와 일본올림픽위원회(JOC)를 분리시켰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일본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한국과 같은 모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JOC가 엘리트 스포츠의 진흥을 위해 독립을 한 셈이다. JOC 회장에 세계 최고의 부호였던 세이부 그룹 총수 스스미 요시야키(90)가 취임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그가 진두지휘해 이뤄낸 성과는 나가노 동계 올림픽 개최였다. 이는 그가 당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의장의 숙원 사업이었던 '올림픽 박물관' 건립을 위한 거액의 후원을 약속한 대가로 얻은 선물이었다.
'왕따'가 된 야마시타 일본올림픽위원회(JOC) 회장
스스미 회장 이후 존재감을 발휘했던 JOC 회장은 사실상 전무했다. 일본 유도의 영웅인 야마시타 야스히로 현 JOC 회장은 그야말로 '존재감 제로' 회장이다.
그가 지난 해 회장으로 재선임 됐을 때 일본 언론들은 "(그의 재선임은) 일본 스포츠 계의 인재난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일갈했을 정도다.
야마시타 회장이 일본 체육계의 '들러리' 수장이라는 비판은 지난 2020년에 굳어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도쿄 올림픽을 1년 연기하도록 결정하는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과의 전화 회담에서도 야마시타의 자리는 없었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무려 203연승이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세운 스포츠 영웅은 '왕따'가 됐다. "(일본)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그 의의를 높이고 싶다"던 그의 공약도 이 순간 완벽하게 의미를 상실했다.
그는 앞서 전일본유도연맹 회장 시절에도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했었다. 그는 연맹 사무국 내에서 갑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은폐하고 조용하게 내부적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조직 운영의 투명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결정은 리더십에 악영향을 미쳤다.
2019년 그가 JOC 회장이 됐을 때 일본 정치권에서 "다시 JOC와 일본스포츠협회(일본체육협회의 후신)가 통합돼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던 이유다. 쉽게 말해 행정력과 리더십도 결여된 야마시타 회장에게 일본 스포츠의 전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일본은 최근 10년 간 정부 주도로 100억 엔(약 946억 원)에 달하는 선수 육성 비용을 썼고 스포츠 조직 구조 개편 작업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JOC의 역할은 지극히 미미했다. 지난 해 11월 부상을 당해 병원에서 요양 중인 야마시타 회장이 교체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와 대립해 '스포츠 대통령'이 된 '정치 9단' 이기흥
스포츠 스타 출신인 야마시타와 달리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은 정치력이 뛰어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 26대 신도 회장을 역임했던 그의 최대 강점은 친화력이다. 그의 이런 능력은 체육계에서 '우군'을 확장시키는 데 특장점으로 나타났다.
그의 이런 장점은 정부와의 대립구도에서 더욱 크게 발현됐다. 이 회장은 지난 2016년 최초로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승리할 때부터 정부와 대립 각을 세우며 실익을 챙겼다. 여기에는 체육계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정치는 스포츠와 분리돼야 한다'는 공식이 도움이 됐다.
개인적으로 '정치와 스포츠가 분리되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문명국가에서도 정치와 스포츠의 분리를 완벽하게 실행한 경우는 없다. 그저 정치가 스포츠에 되도록 개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어쩌면 이것보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은 스포츠계의 내부 정치다. 예를 들면 정부가 스포츠 행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스포츠계는 여기에 반기를 드는 인물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려는 특징이다.
이기흥 회장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는 2016년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영연맹 부회장 등 집행부 비리 혐의로 그는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출마해 체육계 인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그를 도왔다. 당시 박근혜 정권은 엘리트와 생활체육 단체 통합을 추진했다. 이와 중에 통합 정책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던 문체부가 물밑 지원을 하는 후보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나올 것이다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때부터 이기흥 당시 부회장은 문체부의 무리한 단체 통합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조급한 일정 속에 진행되던 단체 통합을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체육계 인사들은 이기흥 부회장의 행보에 지지를 보냈다. 결국 그는 '친(親)문체부 후보'를 제치고 체육계 수장 자리에 올랐다.
이기흥 재선에 도움이 된 정부의 KOC와 대한체육회 분리 방안
2021년 그의 두 번째 대한체육회장 선거 때도 정부 개입이 그를 도왔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와 대한체육회의 분리를 추진 중이었다. 표면적으로 정부는 국제대회에서 대표선수 파견과 성과를 담당하는 KOC와 생활체육 중심의 정책을 펴는 대한체육회가 분리되어야 한국 스포츠의 균형적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내심 정부는 엘리트스포츠, 생활체육은 물론이고 KOC 위원장 자격으로 IOC 위원이 된 '체육계 대통령' 이기흥 회장에게 너무 권한이 집중돼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무기력한 JOC 회장 때문에 JOC와 일본스포츠협회의 통합을 얘기했던 일본과는 정반대의 경우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기흥 회장에 대한 견제가 핵심이었다.
스포츠계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만약 KOC와 대한체육회가 분리되면 정부가 KOC를 통해 스포츠계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치권 인사가 KOC 위원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던 이유다. 당시 스포츠계에 공헌을 한 바가 없었던 모 기업 회장을 정부가 IOC 위원 후보로 추천했다가 IOC로부터 거절당한 사례가 알려지기도 했다.
결국 이기흥 회장은 정부가 추진하려는 KOC와 대한체육회 분리 정책에 반대 입장을 내세우면서 체육계 인사들의 표밭을 다졌고 재선에 성공했다.
탄핵 정국에 힘 잃은 정부의 이기흥 제거 프로젝트
윤석열 정부는 이기흥 끌어내리기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1월 대의원 총회를 열어 스위스 로잔 국외연락사무소 운영 계획 안건을 의결했다. 한국 대표 선수들의 유럽 전지훈련 거점 센터 설립을 위해 상주 직원을 파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는 국회 예산 심의까지 마친 국외연락사무소 조성 사업을 승인하지 않았다. 굳이 8억 원씩이나 들여서 사무소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는 게 문체부 의견이었다.
이후 문체부와 대한체육회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지난해 10월 유인촌 장관이 취임한 이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문체부는 대한체육회 산하 종목 단체와 지역 체육회에 예산을 직접 지원하겠다는 입장까지 내놓았다.
이에 대해 이기흥 회장은 문체부를 향해 "국정 농단 세력이 부활했다"고 비난했다. 문체부가 대한체육회 회장이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면서 표심을 얻을 수 있는 종목 단체와 지역 체육회에 대한 예산 배분권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대한체육회에 대한 강도 높은 감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이기흥 회장은 직원 부정 채용과 금품 수수 등 비위 혐의가 포착됐다. 국무조정실 정부합동 공직복무점검단은 이 사건을 서울경찰청 반부패 수사대에 의뢰했다. 문체부는 이 회장을 직무정지 시켰지만 이 회장은 이에 불복해 직무정지 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냈다. 이기흥 회장의 3선 연임 행보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대한체육회 노동조합은 불공정하고 부당한 체육회 운영을 했던 이기흥 회장에게 차기 체육회장 선거에 출마하지 말라는 내용의 성명까지 발표했다. 이 회장의 3선 도전에 대해 국민의 82.1%가 반대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리얼미터)도 12월 6일에 발표됐다.
하지만 이 회장은 지난달 26일 대한체육회 회장선거준비TF팀에 '후보자 등록 의사 표명서'를 이미 제출했다.
2025년 체육회장 선거는 2016년의 데자뷔?
그러던 차에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다. 국회와 시민들의 민첩한 대응으로 비상계엄은 곧 해제됐다. 이 회장과 정면충돌 했던 유인촌 문체부 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비상계엄 사태로 궁지에 몰렸고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여론이 강하게 형성됐다.
이는 3선 연임을 꿈꾸는 이 회장에게는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사면초가에 몰려 있던 그에게 반전의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치 2016년에 이 회장이 대한체육회장이 됐던 과정과 유사하다.
2016년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펼쳐지기 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해 12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발의가 이뤄졌다. 이기흥 회장과 대립했던 정권이 흔들리자 그는 선거에서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반대 여론 때문에 이 회장이 선거 출마를 포기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싸웠던 정권이 붕괴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 이 회장은 조만간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할 가능성이 크다. 스포츠에 깊숙이 개입했던 정부의 몰락이 이 회장에게는 당선으로 가는 '순풍'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풍'이 '역풍'으로 바뀌려면 후보 단일화가 절실해 보인다. 2025년 1월 14일 열리는 제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출마의사를 밝힌 인사 가운데 7명은 모두 반(反)이기흥 노선을 취하고 있다. 좌초 위기 상황에 놓인 정권과 야권 후보의 난립은 이기흥 회장에게는 반전의 계기를 만들 수 있는 유리한 선거 지형도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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