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 더불어민주당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딥페이크(이미지 합성) 성범죄를 비롯한 성착취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권의 '초당적 합의'를 촉구했다.
박 전 위원장과 장 전 의원 등으로 구성된 '디지털 성폭력에 함께 분노하는 정치인들'은 5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토론회를 열고 딥페이크 성범죄가 만연해지고 있는 사회 흐름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한편 함께 딥페이크 성범죄 근절을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장혜영 "이런 사회 마주하게 해 죄송…사태 해결에 초당적 합의 필요"
21대 국회에서 여성혐오 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내온 장 전 의원은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믿고 살아온 모든 시민분들에게 이런 사회를 마주하게 해 죄송하다"며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딥페이크 성범죄 가해자 중 다수가 10대는 통계를 언급하며 "가해 청소년들이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한 건 어른들의 책임이고 정치인들의 책임"이라고 했다.
딥페이크 성착취 사태에 대해 "위협이 과대평가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주장한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을 겨냥한 비판 발언도 했다. 장 전 의원은 "딥페이크 성폭력으로 인한 공포는 정치를 포함한 공적인 영역에서 존중돼야 마땅하다"며 "(위협이) 과장됐다며 평가절하하는 건 그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정치는 엄연한 현실을 이름 붙이고 존중할 책무가 있다"고 거세게 비판했다.
아울러 정부 여당을 향해 "포퓰리즘을 위해 '여성가족부를 폐지해야 한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는 한 여론이 다른 이슈를 향할 때 현 대책들이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어 "디지털성폭력은 우리나라 사회적 신뢰의 붕괴를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됐다"라며 "내 곁에 있는 가족, 친구, 동료, 이웃이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고 언제든 성적인 대상으로 착취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이 사태는 국가비상사태라는 수식어가 적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토론회에 참석한 시민들에게 "윤리적 합의를 포함한 정치 일반의 윤리가 필요하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정치적 합의 없이 구조적 해결은 가능하지 않다는 목소리에 함께 해달라"고 당부했다.
박지현 "텔레그램 비롯한 해외 플랫폼, 정부 협조하게 만든 사례 있다"
텔레그램을 중심으로 미성년 여성을 집단 성착취한 'N번방' 사건 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박 전 위원장은 "(디지털성범죄는) 가족과 지인에 대한 배신감, 사회에 대한 불신, 가해자를 잡을 수 없다는 무력감, 피해자의 일상에 붕괴를 가져오는 범죄"라며 "이 상황을 해결하지 않는 국가에 미래란 없다. 지금 상황은 분명한 국가적 재난"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디지털성범죄의 온상으로 지목된 해외 플랫폼들에게 수사협조를 받아내기 어렵다는 정부와 수사기관의 변명과 달리 강도 높은 압박으로 수사 협조를 받아낸 해외 사례가 있다고 설명하며 정부 역할을 강조했다.
박 전 위원장이 언급한 브라질의 경우 지난 2022년 연방대법원이 마약 확산, 위조지폐 유통, 가짜뉴스 유통의 창구가 된 텔레그램 사용을 중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텔레그램 CEO는 브라질 정부에 사과하고 해당 범죄들에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변했다. 브라질 정부는 지난달 31일 허위 정보 유포 계정 차단 요구를 무시한 X에 대해 접속 차단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독일도 정부와 정치인들이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와의 온라인 미팅을 통해 소아 성범죄, 테러 등의 강력 범죄에 대해 수사 협조 요청을 받아냈다. 인도 뉴델리 고등법원도 텔레그램에 "범죄자의 IP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등을 제출하라"고 명령해 현지 대리인에게 해당 정보가 담긴 밀봉 서류를 받아냈다.
박 전 비대위원장은 이같은 사례를 열거하며 "텔레그램이 정부에 협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만으로도 범죄자들의 행위를 위축시킬 수 있다"며 "여기에 필요한 것은 정부의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디지털성범죄를 총괄하는 강력한 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호주에서는 디지털 성범죄 대응을 위한 컨트롤타워인 인터넷안전위원회(Office of eSafety Commissioner)가 연방정부법정기관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디지털 문제 위원회를 통해 현안적인 인터넷 정책 문제를 전담하는 위원회가 있다"며 "이러한 기구는 디지털 성범죄 예방을 위한 교육, 관련 법률 개정, 기술 개발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인능욕 피해,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게 돼"
이날 박 전 위원장은 4년 전 딥페이크 성착취와 스토킹 피해를 입었던 '지인능욕' 피해자 A 씨의 발언을 대독하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느 스무 살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자유를 즐기며 지내던 저는 한 DM을 받았습니다. '이 링크에 A 님 사진이 올라가 있는 것 같아요.' 링크를 타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정말 제 사진들과 함께 온갖 모욕적인 글이 적혀져 있었어요. 제 이름, 나이, 거주지, 신체 사이즈와 더불어 성희롱적 발언. 이 당시 까지만 해도 몰랐어요. 너무나도 당연했던 저의 자유가 이날 이후로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걸요."
A 씨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폭언과 딥페이크 사진을 A 씨에게 보냈다. '너는 평생 트루먼쇼 인생을 살게 될 거야', '평생 돌아다닐 네 사진을 보여 나중에 네 동생이 커서 X 칠거야' 등 어린 동생까지 이용해 협박했으며 X(옛 트위터)에 A씨의 일상생활을 전시하는 '중계방'까지 만들어 스토킹했다.
경찰은 가해자 추적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A 씨가 처음 사건을 접수한 날 "증거를 찾아오라"고 말했으며, 박 전 비대위원장이 몸 담았던 '추적단 불꽃' 활동가들과 함께 수 개월간 가해자들을 추적하고 있는 A 씨에게 '수사에 진전이 없어 수사가 종결됐다'고 통보했다. 충격을 받은 A 씨는 정신과 약을 털어먹고 의식을 잃은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A 씨는 "지인능욕은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확인하기 어렵고, 가해자가 지인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에 다다르게 되는 범죄"라며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행한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출구를 찾아 영원히 헤매는 기분"이라고 호소했다.
이어 "온라인 범죄 특성상 잡기 어렵다는 실태는 뼈저리게 느꼈지만, (디지털성범죄를) 예방할 수는 있을 것"이라며 "디지털성범죄 박멸이 하루빨리 찾아와 저 같은 피해자들이 더는 생기지 않길 바란다. 가해자의 변명보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달라"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학생, 교사, 개발자, 사회복지사 등 딥페이크 성범죄를 마주하고 있는 시민 70여 명이 모여 각자 현장에서 목격한 성범죄 현황을 나누고 원인과 대책을 의논했다.
시민들은 공기처럼 퍼져 죄의식조차 흐려진 딥페이크 성착취 가해자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복지관에 거주하는 노인들이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소비하며 복지사들에게 '우리 나이대 영상은 없느냐'고 물었다"는 한 사회복지사의 발언에는 탄식이 쏟아졌으며, "우리는 왜 남성들의 시민성을 길러내는 데 실패하고 여성들에게는 피해의 시민성이 부여됐는지 논의해야 한다"는 한 대학생의 주장에는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둔감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며 대책을 찾는 남성들도 있었다. 한 남성 참가자는 "중학교 때 40~50명 남학생 무리가 여성 교사의 치마 속을 찍는 모습을 보고 내 주위에 성폭력이 만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성범죄 심각성에 대해 여성과 남성이 느끼는 절박함의 수준은 차원이 다르다는 걸 오늘 다시 알게 됐다"며 "남성 시민으로서 남성 권력에 흠집 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점에 사과하고 싶고, 앞으로 남성 집단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사태 해결을 위해 정치적 세력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이견이 없었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이 문제에 전문성·문제의식·솔루션을 제공해왔던, 이 자리를 준비한 두 명의 여성 정치인들을 다시 원내에서 만날 수 있는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세 자녀를 키우고 있다는 한 여성도 "온라인에 누적된 디지털성범죄 데이터를 (지표로) 정리하면 정부를 압박하고 정치를 세력화하는 커다란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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