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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블레이드>를 둘러싼 오인된 상징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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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블레이드>를 둘러싼 오인된 상징투쟁

[게임필리아] 여신이 된 사이보그와 스놉들의 문화전쟁

<프레시안>이 게임 칼럼 새 연재 '게임필리아'를 시작한다. 디지털 게임은 문화인 동시에 기술이며, 텍스트이면서 아키텍처이다. 컴퓨팅, 디자인, 건축, 극작, 공학, 물리학, 시네마의 기술이 공존하는 게이밍의 세계는 동시대 문화와 기술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기획연재 칼럼 '게임필리아'는 게임을 통해 소통하고, 언어를 만들며, 감정의 구조를 쌓아올리는 시대, '놀이하는 인간'의 공동체, 디지털 게임의 비평과 사회문화사를 다룬다.

* 이 글은 <스텔라 블레이드>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게임을 플레이할 예정인 독자들은 주의를 요합니다.

K-게임의 글로벌한 성공, D&I, 오인된 상징투쟁

<스텔라 블레이드>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전 세계 대중문화에 엄청난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게임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케이팝, 한국 시네마와 TV쇼는 최근 20년 동안 강력한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가해 왔지만 한국 게임이 이처럼 글로벌한 화두가 된 적은 없었다. 한국 게임 산업은 확률형 아이템, 인앱결제 유도, 천편일률적인 페이투윈 비즈니스 모델 등으로 악명이 높았고 매출만 크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인지도가 매우 낮다. 그런 중에 나온 <스텔라 블레이드>는 플레이스테이션5 독점으로 출시돼, 트리플A 게임 중에서도 최상위 품질을 자랑하는 게임이다. 아름다운 그래픽, 미려한 게임 디자인, 버그가 거의 없는 매끄러운 플레이, 시종일관 60프레임을 유지하는 퍼포먼스, 능숙한 성우들의 풀보이스 더빙, 사실상 콘셉트 앨범이나 다름없는 사운드트랙의 퀄리티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것이 없다. 출시 전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고 출시 후에도 평단의 호평과 함께 비디오게임의 본고장인 미국과 일본에서 판매 1위를 달성하는 등, 이 게임의 완성도와 상업적 성공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스텔라 블레이드>의 핫 이슈는 게임의 품질이 아니라 게임의 재현양식을 둘러싼 오인된 상징투쟁으로 촉발되고 있는데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게임의 주인공 '이브'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몸매와 외모로 출시 전부터 엄청난 바이럴(나는 이것이 논쟁거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을 생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년간 글로벌 문화산업은 다양성과 포용성에 관한 프로토콜 D&I(Diversity & Inclusion)를 스탠다드로 채택해 문화의 생산 단계에서부터 성별·지역·피부색·소수자·장애인의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 규율을 적용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진통이 있기는 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ness)을 지향한다는 미명 하에 이를 강요하고, 이 때문에 예술의 자율성이 억압된다는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또한 D&I를 종교처럼 지지하는 문화생산자들이 도덕적 정당성을 방패삼아 선민의식을 행사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대표적으로, 게이머들의 공동체에서는 한 개발자가 게이머들에게 경멸적으로 발언한 'Uneducated'가 하나의 밈처럼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I는 문화다양성을 확산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문화의 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 됐고, 유럽중심주의와 가부장제를 더 비판적인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됐으며, 여성과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서사에 사람들이 가까이 가도록 만들었다. D&I는 기본적으로 ESG 경영처럼 기업적이고 리버럴한 용어여서 진정으로 진보적인 평등·연대·형제애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것이 현실에 즉각적으로 미친 긍정적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D&I를 운동이라고 규정할 순 없어도 그것은 여전히 상징투쟁의 자장 안에 있는 무엇이다.

<스텔라 블레이드>가 공개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브'의 12등신에 가까운 몸매와 섹스어필하는 전신 수트 디자인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게임이용자들은 최근 몇 년간 남녀불문 의도적으로 못 생기게 디자인된 캐릭터들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바이럴은 눈사태처럼 커졌다. 이브는 숭배의 대상이자 반동분자로 전화했다. '동의하지 않으면 넌 Uneducated야!'라는 식의 고압적인 정치적 올바름에 지쳐있던 게이머들(특히 남성 게이머)에게는 해방구가 되었고, 성평등과 문화다양성의 당위성을 지지하는 게이머들과 식자층에게는 불안의 대상이 되었다. 이브의 성상품화에 대한 이의제기와 이에 대한 반박이 레딧과 커뮤니티, 인플루언서들의 콘텐츠를 가득 메웠다. 미디어는 이 현상을 두고 '문화전쟁'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나는 '문화전쟁'이란 용어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화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전쟁이 실재하려면 무엇보다 공론장이 존재해야 하고, 서로 다른 의제들이 마찰을 일으키고 진통을 겪으며 조율하는 과정에서 민주적인 동의가 발생해야 한다. 다시 말해 '문화전쟁'이란 교차성을 동반하는 담론의 생산인데, <스텔라 블레이드>는 담론의 과정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각자가 각자의 의제들만 이야기했을 뿐, 이 안에서 어떤 협상이나 새로운 프레임의 형성을 엿보기는 힘들었다. 즉 <스텔라 블레이드>는 문화전쟁이 아니라 오인된 상징투쟁의 스타디움이 됐다. 두 권투선수가 링 위에서 경기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상상적인 상대와 섀도 복싱을 하는 형국이다.

성상품화와 섹시즘의 경계

섹시하고 매력적인 이브를 둘러싼 서로 다른 기의들의 상징투쟁은 왜 미끄러짐을 반복할까? 첫 번째 오인은 성상품화와 섹시즘의 경계를 혼동하는데서 출발한다. 섹시즘(sexism)은 고정적인 성 역할, 성의 생물학적 결정주의, 성에 대한 차별적인 사회적 관습과 고정관념을 내재한 문화적 재현을 뜻한다. '여자는 원래 그래, 여자는 말이야, 여자답게'는 섹시즘의 대표적인 문구다. 남편에게 순종하며 밤에는 요부가 되는 현모양처, 남자 상사에게 커피나 타 주고 의사 결정에서는 빠지는 금발의 여성 비서, 남자 예술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여성 뮤즈, 모성애를 가졌으면서 성적욕망의 대상이 되는 매력적인 여성상(즉 매춘부이자 어머니인 여성) 등이 섹시즘의 주요 표상들이다. 섹시즘은 여성주의 문화정치에서 주요한 의제이고, D&I 프로토콜이 가장 먼저 바로잡고자 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섹시즘은 외적인 요소보다 내적인 요소들, 즉 상징과 기호 영역에서 생성되는 가부장제 및 남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타깃한다.

<스텔라 블레이드>는 대놓고, 공개적으로 성상품화를 추구하는 게임이다. 주인공인 이브 뿐 아니라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 모두가 놀라우리 만치, 과장되게 섹시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다. 이브의 상사이자 친구인 타키, 이브의 엔지니어인 릴리, 이브와 극한 대립하는 레이븐, 인류 최후의 도시 '자이온'의 바에 버려진 채 노래를 부르는 엔야, 근위대원 라엘 모두가 그렇다. 게임의 총괄 디렉터이자 아티스트인 시프트업 김형태 대표는 2000년대 초반 <창세기전3> 시리즈부터 이처럼 과장된 여성 캐릭터 디자인으로 유명했다. 개발자 인터뷰에서도 <스텔라 블레이드>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19금 게임으로, 표현의 한 방법으로 봐주면 좋겠다고 거침없이 발언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요컨대 <스텔라 블레이드>는 노골적으로 성 상품화를 시도했고, 이를 개발자들조차 부정하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이브는 성상품화의 디자인이다. 게임에서 획득할 수 있는 77개의 복장도 몇몇 개를 제외하면 한결 같이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성상품화와 섹시즘을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스텔라 블레이드>는 성상품화를 표방하고 있긴 해도 섹시즘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브는 섹스 심볼인가? 섹스 밤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브는 마릴린 먼로가 그랬듯이 남성들로부터 차별적이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게임의 설정과 내러티브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만 한다.

이브는 오버마인드 인공지능 '마더스피어'가 창조한 존재, 안드로-에이도스(안드로이드)이다. 마더스피어는 라파엘 마크스라는 인간 과학자(게임 속 등장인물 아담)에 의해 창조된 인공지능으로, 처음에 인간과 안드로-에이도스는 공존하지만 마더스피어는 신인류의 진보를 위해 인간을 폐기하고 안드로-에이도스를 직접 생산하기로 결정한다. 긴 전쟁 끝에 인간은 패배하고, 국면을 뒤집기 위해 라파엘 마크스는 마더스피어에 대항하는 인공지능 '라피'를 다시 만들어낸다. 라피는 안드로-에이도스를 무너뜨리고자 바이오 테크놀로지를 동원, 인류를 개조해 물리적 능력만 극단적으로 발달하고 지성을 잃어버린 존재, '네이티브'로 만들어버린다. 지상은 네이티브의 차지가 되지만 인류와 문명은 말살되고, 마더스피어와 안드로-에이도스는 지구 궤도의 콜로니로 피신한다. 안드로-에이도스는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믿으며, 마더스피어는 지구를 수복하기 위해 강하부대를 파견한다. 이브는 그 강하부대의 대원 중 하나로 지상에 살아남은 인류(안드로-에이도스이면서 마더스피어로부터는 선택받지 못한)로부터 '천사'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게이머들은 이브의 매력적인 외모를 보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브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거나 폭력적으로 대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브에게 휘파람을 불거나, 캣콜링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예의를 갖춰 행동한다. 타키는 이브를 친한 후임으로 아끼고, 아담은 이브를 유능한 조력자로 여겨 협업하며, 릴리는 이브를 친한 언니처럼 따른다. 최후의 도시 '자이온'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태도나 대사도 담백한 존경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될 수 있다. '천사님'이라는 호칭에 모성숭배나 성적 대상화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이브도 딱히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어필하지도 않으며, 남성을 매혹하는 대사는 단 한마디도 없다. 성적 상품화라는 형식과 섹시즘이라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게 전개된다는 뜻이다. 섹시즘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내연적인 문화적 관습에 관한 것이라면, 이 게임은 섹시즘을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배제하기까지 한다.

▲<스텔라 블레이드>. 플레이스테이션 블로그 갈무리.

여성들의 연대

두 번째 오인은 이브가 '바보 같고 무식한 남성들 가운데 부각되는 홍일점' 같은 존재가 아닌데서 온다. 많은 게이머들이 이브의 몸매에 정신 팔려서 잘 포착하지 못하지만, <스텔라 블레이드>는 철저한 여성연대의 서사다. 게임 속에서 이브가 돈독하게 관계 맺고 교류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여성들이다. 안드로이드인 이브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의지하던 동료 타키가 전사한 뒤 네이티브가 되어 자신을 공격하면서도 죽여 달라고 부탁하기 때문이다. 엔지니어인 릴리가 의지하는 친구는 함께 강하한 뒤 뇌사상태에 빠진 이베리스이고, 릴리는 이브를 후배처럼 따르며 칭찬을 받으면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자이온의 상점 '자매 고물상'을 운영하는 카야의 유일한 가족은 언니이며, 이브는 언니의 시체를 찾아내 메모리스틱(기억이 담긴 안드로-에이도스의 뉴럴 반도체)을 그녀에게 돌려준다. 정보상 록산느는 이브에게 추파를 던지는 유일한 인물이자 여성이며, 펍 '마지막 한 모금'의 가수 엔야는 이브와 릴리의 도움으로 하반신을 수리해 걸어 다닐 수 있게 된다. 이브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타락한 천사 '레이븐'도, 궤도 엘리베이터의 호텔 메이드 '아리사'도 여성이다. 중요한 것은 게임 안에서 이 여성들이 게이머(즉 이브)와 관계 맺는 방식일 것인데, 남성이 부재한 세계에서(혹은 남성이 파괴한 세계에서) 여성들의 연대가 남성들의 형제애와는 달리 상실감, 친밀감, 정체성, 애도 등으로 매개된다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

섹시즘과 거리가 먼 게임 내면 요소들의 디자인 덕분에 김형태 디렉터의 유서 깊은 성상품화 디자인은 <스텔라 블레이드>에서는 허용 가능한 수준의 데포르메(déformation)로서 기능한다. 몸이 하나의 디자인 요소이고, 그것은 표현주의 영화처럼 과장된 세트나 표현으로 재현양식을 구축한다. 무려 77종이나 되는 이브의 복장도 몇몇 수영복 등을 제외하면 독특함을 넘어 작품처럼 여겨진다. 그 집요함은 섹스어필을 넘어서 '이렇게 하면 신체 부위가 옷에서 예쁘게 부각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할 정도다. 남녀 할 것 없이 게임 속에 들어오면 이 복장들을 찾아내고 입혀보는 데 혈안이 된다. 즉 이 게임의 핵심 테마는 화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상품적 여성이 아니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성들끼리 오손도손 쌓아 올려가는 친밀감이다.

남신을 흡수해 여신이 되는 사이보그

<스텔라 블레이드>의 마지막 오인은 이브를 여신(Godness)이라고 인식하는데서 온다. 대표적인 예가 IGN 프랑스의 한 칼럼니스트가 "스텔라 블레이드의 캐릭터는 명백한 편견을 강조한다. 여자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성적 판타지로 묘사한 인형 같다"라고 비평했다가 서구 게이머들로 엄청난 비난을 받고 결국 사과한 사건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서구의 신화·전설은 여신을 섹스어필의 성스러운 화신으로 그린다. 제우스와 아폴론 등의 남신은 매력적이고 정력적인 남성성의 화신이며,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 아킬레우스 등은 반신이거나 영웅적인 남성의 설정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제우스의 부인이자 신들의 여왕인 헤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지혜의 여신 아테나,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등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성을 표상하며 칼리스토나 프쉬케, 에우리디케, 아리아드네 등은 님프로서 미와 재생산의 상징이다. 서구의 기호계에서 여신은 곧 아름다움, 젊은 여성, 섹스, 출산과 결부되어 있다. 이 때문에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유명한 마지막 구절, '나는 여신이 아닌 사이보그가 되겠다' 는 언명을 남겼다.

사이보그는 횡단적이고 교차적인 존재다. 우리가 기술적 보철물을 통해 스스로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어떤 존재로 규정될 수 있을까? 기계 신체가 된 사이보그에게 피부색, 성별, 인종, 나이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금속 피부에는 흑백이 없고, 유기체가 아닌 신체에는 재생산이 필요 없으며,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여신이 아닌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주어진 유기체적 신체의 한계(즉 인간)를 뛰어넘어 다른 존재와 함께-되기(becoming-with)를 추구한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 인간중심의 정치를 뛰어넘어 모든 존재가 공거하는 포스트휴먼을 지향하는 것이다. 포스트휴먼 정치학에서 여신은 지양되어야 하는 존재이고, 인간중심주의(남성 중심주의)의 케케묵은 유산이다.

그런데 이브는 인공지능 마더스피어에 의해 창조되어, 처음부터 지상의 인간들에게 천사라고 존경받는 님프이다. 게임이 진행되면 네이티브와 마더스피어의 창조자가 지금까지 함께 해온 동료 아담(라파엘 마크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아담은 네이티브(구 유기체 인류의 굴절된 진화물)와 안드로-에이도스(인공지능이 만든 신인류) 간의 결합을 위해 이브에게 융합을 제안한다. 게이머는 여기서 융합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결말도 달라지게 된다. 융합을 거부하면 아담을 제거해 지상에서 네이티브를 말살하고 마더스피어로 복귀한다. 융합을 받아들이면 아담을 흡수한 이브는 여신이 되고, 마더스피어에 맞서 싸우게 된다. 이는 <사이보그 선언문> 이후 지속되어온 포스트휴머니즘적 알레고리에 대한 안티테제이자 도전인 것처럼 다가온다.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 이브의 살갗이 보인다는 이유로 일차원적인 비난에만 몰두하는 워크(woke) 및 가짜 진보와 달리 포스트휴먼 정치는 우리 시대의 혐오와 갈등을 넘어서기 위한 주요한 규제적 이념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게이머들과 비평가들, 그리고 한국인들조차 간과하는 문제가 있다. <스텔라 블레이드>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게임이며, 이 게임의 등장인물들 대다수가 아시아인의 외형을 하고 있고, 한국의 여신 개념은 서구의 여신과 상징계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한국에서 여신은 삼신할매, 마고할망, 조왕신, 터주신 등 아름다움이나 매력적인 여성과는 거리가 멀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삼신할매는 출산을 관장하는 세 명의 노파들이고, 마고는 여러 파생형 여신(마고 할망, 노고할미)들이 있는 산신이며, 조왕신과 터주신은 각각 부엌과 집터를 관장하는 여신이다. 그들은 인자한 할머니거나, 바위, 짚으로 만든 인형 등 토템의 형태를 띤다.

요컨대 한국에서 여신이란 섹스어필이 빠져있는 재생산·돌봄 상징계다. 이는 <스텔라 블레이드> 직후 서구 평론가들이 일제히 '이브는 충분히 섹시하지 않다' 라고 역설적인 평가를 내놓은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게임 속에서 이브의 갈등은 인류에게 복을 주고,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으며 미색과 치정이 주요 사건인 서구 여신의 스테레오 타입과 큰 괴리가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비록 기계공학적으로는 사이보그가 아니지만 남신 아담을 흡수하고 여신이 되는 이브의 여정을 '사이보그가 된 여신' 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거창하긴 하지만 재생산과 돌봄의 여신으로 승천하는 이브의 이야기, 그러나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아니라 함께-되기와 공거를 향한 포스트휴먼적 여정의 한국적 맥락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개발자들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그들의 진짜 의도는 성상품화를 넘어 자신들의 미려한 캐릭터 디자인을 뽐내기 위해 이브의 신체를 전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여신 개념에 흐르는 정치적 무의식은 희미한 탈인간정치의 맹아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스놉들의 문화전쟁

그러니까, <스텔라 블레이드>를 둘러싼 '문화전쟁' 이란 사실 일어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발발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게임은 외형적으로는 성상품화를 추구했지만 품질이 매우 높아 데포르메로 허용할 수준까지 도달했고, 내적으로는 섹시즘과 오히려 정 반대편에 있다. 물론 어디에나 바보들은 존재한다. #FreeStellarBlade 같은 해시태그를 달며 이브의 복장이 검열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 예다.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찌든 소니의 명령에 개발자들이 굴복해서 이브의 복장이 '덜 야하게' 변경되었다고 믿으며, 자신들만의 전쟁(즉 섀도 복싱)을 혼자 펼치는 21세기의 문제적 개인들이다. 그러나 루카치가 환생해 <소설의 이론>이 아닌 <게임의 이론>을 쓴다면 이들을 문제적 개인이 아니라 스놉이라고 명명하지 않을까? 스놉이란 실존하지 않는 대타자와 거대 서사를 믿으면서 명예롭게 자신만의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할복자살하는 20세기 사무라이나 일루미나티 음모론을 실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론장도, 협상도, 대항적 의미의 생산도 기각하는 민주사회의 적이다. 그들과 몇몇 이 게임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의 언설을 '문화전쟁' 이라고 치켜세워주지 말자. 때때로 우리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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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저술로는 <게임의 이론>(공저), <인공지능, 플랫폼, 노동의 미래>(공저) 등이 있으며 계간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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