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에 발의된 4개의 차별금지법안이 임기 종료로 모두 폐기된 가운데, 시민단체들이 새로 열린 22대 국회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평등의 원칙을 세울 수 있도록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이하 차제연)는 4일 서울 영등포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과 혐오로 불평등이 심화되는데 왜 아직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는지 묻는다"며 "22대 국회는 평등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레나 한국여성노동자회 활동가는 "21대 국회에 발의된 비동의 강간죄는 법무부의 반대로 무산됐고,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온 지 5년이나 지났지만 관련 법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특히 여성 시민들의 삶을 가장 효과적으로 바꿔낼 수 있는 차별금지 법안이 4건이나 발의됐음에도 모두 폐기됐다"고 지적했다.
또한 성평등 정책이 사라진 지난 4월 총선에 대해 "거대 양당은 여성 공약을 아이 돌봄과 저출생 공약으로 대체했다. 이는 여성들을 출산과 양육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행태"라며 "여성들의 삶이 변하기 위해서는 차별의 구조를 바꿔내야 하는 걸 정치권만 모르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래로 단 한 번도 성별 임금 격차 1위를 놓쳐본 적 없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가졌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는 한국 정부에 수차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며 "22대 국회는 책무를 다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지수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은 "거대 야당은 20억 원짜리 아파트를 소유한 청년, 신혼부부가 지불할 종합부동산세는 사회가 나서서 감면해줘야 하는 문제로 취급하면서도 반지하에서 벌어진 화재로 목숨을 잃은 30대 청년, 전세사기로 인한 피해를 죽음으로 탄원한 청년의 목소리는 정쟁의 도구로만 삼았다"고 규탄했다.
또한 "다양한 이주 배경을 가진 이들의 주거 불안을 묵살한 채 노동력을 착취하고, 도시경쟁력을 명분으로 가난한 이들과 세입자들을 도시에서 함부로 내쫓고 있다"며 "국회는 한국사회 자본주의를 계승할 자격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집을 구매하게 해주며 이미 차별당하고 있는 이들의 주거 문제는 계속해서 배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함부로 밀어내지도, 지워내지도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초석이 될 것"이라며 "22대 국회는 반드시 차별금지법 제정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 평등의 원칙을 바로 세우기 위한 길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종걸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은 "최근 동성 간 결합이라는 이유로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주지 않는 것은 헌법에 명시된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판결이나,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과 관련해 성전환수술을 요건으로 두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이라는 판결 등 우리나라 사법기관은 성소수자의 차별과 배제에 대한 합리적인 판결을 내놓고 있다"고 했다.
이 국장은 "정치인들은 차별금지법이 성소수자를 위한 법안이라며, 이를 추진할 시 총선 때 투표하지 않겠다는 교회의 겁박에 법안을 제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며 "더 이상 입법 공백으로 피해를 입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평등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22대 국회의 문을 지속적으로 두드리겠다"고 했다.
차제연은 22대 국회가 다뤄야 할 차별금지법의 방향성으로 △차별을 적극적으로 구제하고 시정하는 다양한 구제조치 포괄 △혐오의 확산을 방지하고 혐오에 대항할 기준점 제시 △다양한 차별이 중첩돼 발생하는 '복합차별'에 대한 접근 △빈곤과 차별 사이의 연관고리 대응 △평등 실현 위한 국가책무 구체화 등을 제시했다.
이는 앞서 지난 2022년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소수자 권리 보호: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실용 지침서(Protecting Minority Rights: A Practical Guide To Developing Comprehensive Anti-Discrimination Legislation)'를 발표하며 소개한 차별금지법 제정 가이드라인이기도 하다.
한편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3일(현지시각) 제9차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 최종 견해를 발표하며 한국 정부에 차별금지법에 대한 구체적인 입법 일정을 정하라고 권고했다. 위원회는 여성차별철폐협약에 가입한 국가들이 정기적으로 제출하는 협약 이행 상황을 심의한다. 한국은 1984년 12월 협약에 가입한 이래로 4년마다 관련 분야의 정책 성과를 제출해 왔다.
차별금지법은 성별, 장애, 나이, 인종, 국적,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이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예방하는 데 목적을 둔 법안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각각 장혜영, 이상민, 박주민, 권인숙 의원 등이 각각 차별금지법을 발의했으나 논의에 진전이 없는 상태로 국회 임기가 종료돼 모두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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