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4년에 펼쳐진 파리 올림픽에서 '선수촌'이 처음 생겨났다. 이전까지 올림픽 기간 중에 선수들이 호텔, 군사 시설, 가정 집에서 머물렀던 시대는 1924년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는 각국에서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에게 숙박, 음식 등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선수촌의 등장은 올림픽이 세계 최고의 스포츠 제전으로 탈바꿈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올림픽 개최 도시에 선수촌 건립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건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올림픽 이후 선수촌 활용 문제를 계획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올림픽 선수촌은 대회 이후 일반인들이 머물 수 있는 주거시설이 되거나 공원으로 변모했다.
어느 순간부터 올림픽 선수촌 주변에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가 함께 진행됐다. 강제퇴거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올림픽 레거시(Legacy, 유산)라는 이름으로 개최 도시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도시 재생의 결과는 외관만 보면 휘황찬란하지만 원주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2024년 파리 올림픽의 최대 하이라이트다. 파리 올림픽의 대대적인 도시 재생 프로젝트가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파리 외곽의 샌 생드니(Seine-Saint-Denis)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런던 올림픽의 교훈, "낙후된 공간이 현대식으로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파리는 2024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삼수'를 했다. 가장 뼈아픈 올림픽 유치 실패는 영국 런던과 경쟁한 2012년이었다. 4라운드까지 가는 치열한 경쟁 끝에 파리는 런던에 불과 4표 차이로 고개를 숙였다.
파리가 런던에 패한 핵심적 이유는 올림픽 레거시라는 측면에서 런던이 파리에 비해 솔깃한 유치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런던은 슬럼가인 이스트 엔드 개발계획과 올림픽을 잘 접목시켰던 반면에 파리는 그런 접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미 올림픽 개최는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국제적 여론이 팽배했던 시기에 IOC는 올림픽 자체보다 포스트 올림픽이 잘 준비된 도시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개최도시 시민들을 위한 올림픽 레거시라는 그럴 듯한 표현도 런던 올림픽에서부터 널리 퍼졌다.
런던 올림픽은 경제적으로 기념비적이었다. 경기장 건설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축 경기장 건설을 최대한 억제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크게 인기가 없는 종목의 경기장들은 임시로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농구장은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를 주로 활용해 공사비 7억 원이라는 적은 비용을 들여 임시경기장으로 만들었고 2013년에 철거됐다. '경제적 올림픽'을 실천하기 위해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이 경기장의 좌석을 철거해 잉글랜드 프로축구 3부리그 팀에 팔기까지 했다.
런던에서 빈곤층 비율이 매우 높아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스트 엔드 지역은 올림픽 경기장, 선수촌과 각종 상업시설이 들어서자 바뀌기 시작했다. 버려진 가구와 폐기물들이 가득했던 이스트 엔드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이제 우리도 진짜 런던 시민이 됐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이스트 엔드에는 공원과 녹지공간도 많이 자리잡았다. 런던은 이 공간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여가 시설이 되기를 바랐던 셈이었다.
하지만 런던은 '낙후된 도시 공간이 현대식으로 바뀌면 그 곳에 사는 사람도 바뀐다'는 젠트리피케이션의 공식을 바꾸지 못했다. 런던 올림픽 선수촌이었던 이스트 빌리지는 50%가 임대주택이나 조합공동소유 형태로 원주민들에게 제공할 계획이었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불가능해졌다. 이스트 빌리지의 분양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스트 엔드 원주민들의 연평균 소득은 4500만 원 수준이었지만 방 두 개짜리 기본형 주택의 임대료를 충당하려면 적어도 연평균 소득이 7500만 원은 되어야 가능했다. 결국 이스트 빌리지를 포함해 이 지역에 새롭게 건축된 주택에 살 수 있는 원주민은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런던을 벗어나 또다른 슬럼가로 떠나야 했다.
98 월드컵의 톨레랑스 정신은 방리유에 없다
이민자 거주 비율이 높은 파리 외곽 지역인 방리유(Banlieue)에서도 해외에 가장 잘 알려진 지역은 샌 생드니(Départment)다. 이 곳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만 호에 달하는 저소득층을 위한 대단위 아파트가 공급된 지역이다.
파리의 부활은 샌 생드니 주민들로부터 시작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후 프랑스 경제재건을 위한 이들의 공헌은 대단했다. 현재 샌 생드니는 일 드 프랑스 지역(Région) 중에서도 가장 외국인 거주 비율이 높은 곳이며 아프리카 계열 거주자가 50%를 상회한다.
일종의 게토이며 우범지대로 악명 높은 샌 생드니는 오래 전부터 파리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정부 차원에서 이곳에 대대적인 재개발을 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월드컵 주경기장인 스타드 드 프랑스는 생드니에 들어섰고 이 주변에 프랑스 국유철도회사, BNP파리바 은행과 통신사 SFR 등이 사무실을 열었다.
하지만 이런 기업들이 제공하는 양질의 일 자리는 샌 생드니에 살고 있던 이민자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파리 시내에서 허드렛일을 하느라 출퇴근 시간에 교통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월드컵 축구장에서는 다문화 세대가 중심이 된 프랑스 대표팀이 국민통합과 유색인종에 대한 톨레랑스(관용) 정신의 상징이 되고 있었지만 샌 생드니의 냉혹한 현실을 그렇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2005년 샌 생드니를 비롯한 파리 외곽의 방리유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표면적으로는 이민자 출신 소년의 감전사가 폭동을 추동 했지만, 본질적인 원인은 프랑스에서 멸시의 대상이던 방리유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이었다.
이에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파리와 피리 외곽을 연결하는 그랑 파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방리유 개발과 재정비 사업에 60조 원이 넘는 돈을 쏟아 부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오히려 2015년 파리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용의자들이 샌 생드니로 숨어 들면서 이곳 주민들은 프랑스 사회로부터 이슬람 테러집단의 공범자라는 의심까지 받게 됐다.
이민자들을 위한 배려는 머리속으로만 하는 파리지앵의 이중성
오는 7월 26일에 개막하는 파리 올림픽은 과연 샌 생드니에 어떤 선물을 안길 수 있을까. 가장 눈에 띄는 건 수영장이다. 파리는 올림픽을 앞두고 경기장을 거의 짓지 않았다. 기존의 시설을 주로 활용했고 파리의 주요 관광지에서 경기를 펼친다.
하지만 수영장은 예외다. 올림픽이 끝나면 청소년들에게 개방할 목적으로 샌 생드니에 아쿠아틱스 센터를 지었다. 지금까지 수영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대부분의 이민자 가정 청소년들을 위한, 의미있는 결정이었다.
이보다 중요한 건 역시 생드니에 건립된 올림픽 선수촌이다. 런던 올림픽 이후 나타난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하기 위해 파리는 노력을 경주했다. 하지만 샌 생드니의 상황은 런던 이스트 엔드를 닮아가고 있다.
원래 올림픽이 끝난 뒤 선수촌의 3분의 1은 샌 생드니 원주민들이 살도록 계획돼 있었지만 현재 선수촌 가격은 이 지역 평균 주택 가격보다 30% 가량 높아졌다. 올림픽 이후 집값이 더 상승하면 대다수 원주민들에게 선수촌은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파리지앵들이 선수촌에 입주해 살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올림픽 선수촌 주택 분양 판매가 이미 시작됐지만 파리지앵들은 이 곳을 외면하고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파리지앵들도 굳이 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악명높은 샌 생드니에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우파 정치인인 에릭 제무르는 그의 저서 <프랑스의 자살>을 통해 이런 파리지앵의 이중적 태도를 고발한 바 있다. 이민자들이 만든 프랑스와 파리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은 머리 속에만 존재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들은 (파리의 중산층 지식인) 공립학교 그리고 '(이민자들과) 함께 살기'를 찬양하지만 그들 자녀들의 학교가 이민자 자녀들로 덮이는 순간 학군 지도를 교묘히 회피하기 위해 그들의 인간관계를 이용한다". 한마디로 이민자들의 문제가 '나'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순간 온 몸으로 거부한다는 의미다.
사실 이런 문제는 파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다문화 도시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미국 조지아주의 애틀랜타도 그랬다. 1960~1980년대에 애틀랜타 도심에 거주하고 있는 백인이 50%이상 감소했다. 이들은 도시 외곽으로 이주했다. 도심에 흑인들이 많이 유입됐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시 정부 지원으로 공원, 실내수영장, 학교 등이 건립 됐을 때 백인 중산층들은 세금은 우리가 많이 내는 데 정작 시는 흑인들의 복지에만 신경 쓴다는 푸념을 했다. 애틀랜타의 백인 중산층들이 도심을 떠난 이유였다.
고백하자면 필자도 이 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하철을 탔을 때 이주민 노동자들이 많아 나도모르게 다른 지하철 칸으로 급하게 옮겨갔던 경험이 있어서다. 이 때 처음 난 정치적 올바름의 한계를 몸소 체험했다.
샌 생드니의 봉디 시에서 가나 출신 아버지와 알제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킬리안 음바페가 이번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다면 최고의 프랑스 스타로 각광 받게 될 게 분명하다. 봉디 시에는 축구 영웅 음바페를 기리기 위해 한 아파트 벽면에 그의 모습을 그려 넣은 벽화가 있다. 이 벽화는 봉디 시뿐만 아니라 파리 외곽의 방리유에서 출생해 프랑스 축구를 이끈 수많은 선수들에 대한 일종의 헌사다.
이 벽화에서 어린 음바페는 축구공을 머리에 배고 꿈을 꾸고 있다. 과연 방리유 소년들은 음바페처럼 자신의 꿈을 꾸거나 이룰 수 있을까? 올림픽에서 대활약하는 이민자 가정 출신 프랑스 선수들에 열광할 파리지앵들은 그들의 자녀가 방리유 소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볼까? 샌 생드니 재개발을 표방하는 파리 올림픽이 남겨야 할 진정한 유산은 이 두 질문과 맥이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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