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처음 갔다. 모든 것이 신기했고 피엑스(PX) 미제 물건이 온 천지에 널려있었다. 한국 유학생 부부가 미국에 와서 처음 슈퍼에 가면 남편은 조니워커 위스키를 사고 아내는 쿠키를 산다는 농담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 저기 미국적인 체인점이 있었다. 각 체인점마다 독특한 특색들이 있다. 보통 미국의 체인점은 중서부의 어느 시골에서 시작한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그러나 초인적인 정도로 부지런한 아저씨 두 명이 의기 투합해서 상품을 하나 만들어 가게를 열었는데 장사가 잘되자 하나 더 내고 옆동네에도 낸다. 그러면서 미국적인 토종 기업으로, 미국식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그런 체인점에는 창업점·창업주들의 흑백 사진이 걸려있는데 바라보고 있으면 노스텔지어를 불러 일으킨다.
체인점의 시작과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낭만적이다. 그곳에서 낮은 시급으로 일하고 있는 청년들은 '비록 돈도 없고 교육도 못받았지만 이런 큰 기업을 언젠가 만들 수 있다'라는 야망에 불탄다. 그 청년들 중 몇몇은 성공하기도 한다. 그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다.
필자는 회사를 운영하던 시절 체인점의 대표격인 캔터키프라이치킨(KFC), 웬디(Wendy) 등의 기업성장사를 자세히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오너가 직접 광고에 나서고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눈여겨봤다.
그 중 토이저러스(Toys"R"Us)라는 체인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글자 배우는 아이들이 R자를 좌우 거꾸로 많이 쓰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아에 회사 이름을 그렇게 했다.)
가난한 유학생은 이 가게를 조심해야 했다. 혹시 어린 딸이 차에 타고 있는데 길을 잘못 들어 이 체인점을 만나면 가난한 아빠는 큰 곤욕을 치러야했다. 토이저러스의 창업자는 아버지가 하던 자전거 가게에서 알바를 하던 라자러스(Lazarus, 성경의 '나사로'의 영어식 이름)다. 아버지 자전거 가게에서 아기용 침대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침대를 산 부모들이 계속해서 장남감을 산다는 것에 착안하여 1957년에 장난감 슈퍼마켓을 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양과 종류의 장난감을 큰 공간에 한 곳에 몰아넣어 놓으니 아이들은 좋아할 수 밖에 없다. 체육관 정도의 큰 공간을 작은 디즈니랜드처럼 꾸며놓고 장난감과 놀이기구로 꽉 찬 공간을 상상해보면 된다.
베이비붐 시대에 대히트를 쳤다. 장난감 수요는 폭발했고 토이저러스는 전미국에 깔렸다. 캐나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비인형 등 메가히트 상품들이 많이 나왔다. 미국에서는 당시 이혼도 급증했는데 이혼·별거하는 부모들이 자식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토이저러스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당시 토이저러스는 미국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온라인 회계시스템도 도입하면서 토이저러스는 계속해서 성장했다. '난 어른이 안될거야. 토이저러스에 가야하니'라는 광고송은 모든 어린이들이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토이저러스는 경영상의 전략적 실수를 했다. 상당히 치명적인 실수였다. 바로 아마존에서 장난감을 파는 시도였다. 아마존이 토이저러스의 장난감 파는 노하우(그리고 어디서 장난감을 싸게 만들어오나에 관한 정보)를 흡수하여 자기들이 팔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토이저러스는 2005년 연매출이 11조 원에 육박했다. 그런데 같은 해 6조 원에 사모펀드 연합에 팔렸다. 베인(Bain)·KKR·보르나도(Vornado)가 그 연합의 구성원이었다.
이 사모펀드 연합은 토이저러스를 인수할 때 자기자본은 거의 투입하지 않았고 토이저러스의 자산을 담보로 차입매수(Leverage Buy-Out)를 했다. 매년 이자 비용만 5000억 원이었다. 전액 토이저러스를 쥐어짜내서 냈다. 그리고 경쟁 관계의 장난감 판매회사들도 인수하기 시작했다. 장난감 시장을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장악하겠다는 야무진 꿈이었다.
토이저러스는 자기들의 소유주인 사모펀드들에게 큰 거래가 있을 때마다 1000억 원씩 자문료를 지급하고 그 외에도 엄청난 경영 자문료를 지급했다. 13년에 걸쳐서 토이저러스가 소유주들에게 지급한 자문료만 약 5000억 원이었다. 어느 특정 개인이 소유주로 있었으면 이렇게 많은 급료를 빼가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사모펀드가 소유주가 되면 자문료·고문료 명목의 비용이 무섭게 나간다.
여기에 사모펀드에서 파견된 경영진은 경영진대로 고액의 급료를 빼간다.(그럼 경영 자문료는 뭔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사람들은 잘 하지 않는다.)
인수 당시 토이저러스에 약 2조 원의 현금·현금성 자산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빼가니 금방 고갈됐다. 직원들의 복지·급여 수준은 형편없이 저하되었고 큰 규모의 감원이 계속됐다. 시설은 노후화됐고 지저분해졌다.(토이저러스에 갈 수록 분위기 자체가 어두컴컴해졌던 것을 기억한다. 조명에 드는 전기를 절약하는 조치였던 듯 하다. 장난감의 종류와 숫자도 줄어들고 빈 공간도 많아졌다. 상품도 싸구려 장난감 위주로 바뀌었다. 딸이 토이저러스에 가자고 투정부리는 일도 사라졌다.)
회사는 큰 빚을 갚아야했고 사모펀드가 그렇게 피를 뽑아가니 시설 유지보수조차 어려워졌고 새 투자는 생각도 못할 지경이었다. 물론 일단 이렇게 뽑아가다가 필요하면 재투자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장난감 생산업체에 계속해서 무리한 원가 절감을 요구한다. 그러면 납품을 중단하거나 품질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호텔이 이런 식으로 피를 계속 빨아먹히면 금방 허름해져서 수리·개보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호텔은 고급고객들이 오지 않게 되고 성매매·마약거래 등이 벌어지는 우범지대가 되고 그렇게 되면 죽은 호텔이다. 사모펀드가 인수한 기업체에는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진다.)
그렇게 13년 정도를 피를 빨다가 2017년에 법정관리를 신청해버렸다. 전체 매출은 여전히 연 11조를 유지하는, 언뜻 보기에 아직도 견실한 기업이었고 미국 전체 장난감 매출 5분의 1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모펀드가 파견한 사장은 매년 거의 40억 원,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급여를 챙겨갔고 뉴욕 여러 곳에 초호화 사옥을 두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그리고 법정관리 신청 직전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30억 원 정도의 보너스를 비밀리에 챙기기도 했다.
물론 모든 직원들에게는 연금에 더해 상여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지만, 파산 절차가 시작되자 변호사들이 우선 600억 원을 챙겼다. 변호사 한 명당 한 시간 수입료가 100만 원이었는데 당시 토이스아어스 직원들의 평균급여는 시급 1만2000원이었다.
직원의 연금과 상여금은 후순위 채권이 되어버렸다(한국과는 다르다). 그 결과 직원 1명당 지급된 돈은 6만 원이었다. 6만 달러가 아닌 6만 원이다.
영업이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소유 건물을 매각하는 게 더 이익이라고 판단한 사모펀드 연합은 토이저러스를 청산했다. 사모펀드는 자신들도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지만 지속으로 뽑아낸 돈은 계산하지 않는 채 손해를 봤다고 우기는 것에 가깝다. 당시 사모펀드들이 낸 이익은 약 2조 원으로 추산된다.
오랫동안 일하던 직원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가정이 파탄났고 많은 비극이 발생했다. 회사로부터 받은 6만 원은 변호사와의 통화료보다 적었다는 자조와 한탄이 흘러나왔다.
토이저러스에서 벌어졌던 일은 미국 소매업계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메가 태풍의 시작이었는다. 미국 소매체인의 약 70%가 비슷한 일을 당했다. 약 200만 명의 노동자가 직장을 잃었다.
아마존의 급성장으로 소매업은 궁극적으로 몰락할 수 밖에 없었고, 사모펀드는 그 과정을 단축한 것 뿐이다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사모펀드가 소매업을 몰락시킨 게 아마존 급성장의 거름이 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없어져 간 체인들 가운데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많다.
에어로포스탈(Aeropostale), 아메리칸 어패럴(American Apparel), 샬롯 루스(Charlotte Russe), 페어웨이(Fairway), 짐보리(Gymboree), 핫 토픽(Hot Topic), 제이크루(J.Crew), 머빈스(Mervyn’s),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 나인 웨스트(Nine West), 페이리스 쇼소스(Payless ShoeSource), 펫코(PetCo), 펫스마트(PetSmart), 라디오쉑(RadioShack), 스포츠 오소리티(Sports Authority), 시어스(Sears), 스테이플스(Staples), 탈보트(Talbots)
미국에 살아보거나 여행을 해봤던 사람들은 간판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위 기업들은 사모펀드에 인수되어 토이저러스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사라졌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에서는 직원의 퇴직금·연금 등이 파산 과정에서 지급받지 못하면 정부가 상당부분을 책임진다. 사모펀드에 인수당하는 기업들이 궁극적으로 파산하는 숨은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계속 경영을 이어가면 퇴직금 및 연금 부담이 불어나고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오너는 일단 사모펀드에 기업을 팔아넘기고 사모펀드는 파산시키면서 퇴직금과 연금 부담을 정부에 넘기는 책략이라는 것이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해는 공유한다.
파산 뒤 오랫동안 일한 직원들의 퇴직금과 연금을 모두 정부가 책임지고 난 후, 같은 사모펀드가 다시 회사를 염가에 재구입하여 부담이 사라진 상태로 새출발을 하는 경우도 많다. 직원들도 다시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새출발을 하고 말이다. 이런 모든 과정을 잘 인도하는 전문 법률회사도 많다. 예를 들어 이 분야를 만들다시피 한 커크랜드 앤 앨리스가 있는데, 아마 한국에도 이런 법률회사가 곧 출현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슬픈 현실이지만, 오너 입장에서는 기업을 창업해 잘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당할 때 잘 파산 시키'는 게 중요할 수 있다. 도적덕 평가와 별개로 '기업은 망했지만 오너는 잘 사는' 게 오너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모펀드가 개입된 딜들의 특징을 보면 회사 위에 회사가 있고, 그 회사는 다른 회사의 자회사며, 그 자회사는 또 다른 회사의 자회사로 이어져 싱가포르와 케미언군도의 페이퍼컴퍼니가 소유하고 그 페이퍼컴퍼니를 다른 페이퍼컴퍼니가 소유하는 식이다. 그래서 사업장에서 실제로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그 책임이 사모펀드의 금고까지는 절대로 도달하지 않는다. 오너들이 사모펀드에 회사를 넘기는 주요 이유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꼬리 자르기다.
사모펀드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열심히 경영하고 또 투자도 계속하여 회사를 키워서 더 크게 벌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렇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회사들도 많다. 토이저러스는 극단적인 예일 것이다. 그래서 악덕 사모펀드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제일 먼저 등장하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오너가 계속 경영하였더라면 하지 못할 매정한 일들을 사모펀드는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모펀드는 돈을 벌 수 있었다.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장기적인 목표를 세웠더라면 더 크게 벌수도 있었겠지만 단기간에 승부를 내야하는 사모펀드의 입장에서는 매정한 조치를 취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단기이익을 일단 챙기는 선택이 합리적일 수 있다. 비슷한 상황의 기업을 찾아 동일한 작업을 하면서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원을 만들고 그것을 계속 경영해왔던 사람들, 동물들과 그 새끼들의 이름까지 아는 오너는 동물들을 죽여서 고기로 판매하고 땅은 택지로 개발하는 일을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모펀드는 할수있다. 그래서 이 사례의 이름을 '동물원을 정육점으로 전환하기'라 붙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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