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생. 서울여자의과대학 졸업. 산부인과 개업의. 남편은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학술원 회원. 이 이력의 주인공은 편안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을 것 같다. 그 시기 대다수의 여성과 비교하면. 그러나 이력만으로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이 이력의 소유자 류춘도 선생 또한 그러했다.
류춘도 선생은 전쟁 시기 의용군 군의관이었다. 선생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같은 기숙사에 살던 친구 중에, 하필이면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친구 중에 사회주의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선생은 공부가 최우선이었다. 자식들 공부시키기 위해 몸을 혹사한 아버지가 일본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누구보다 총명했던 큰오빠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 채 아버지 노릇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돌아가는 일도 뒷전이요, 공부에만 몰두하던 선생은 5학년, 그러니까 의대 본과 3학년 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우리가 승리하고 있다던 뉴스는 알고 보니 녹음된 것이었고, 피란 간다고 짐을 쌌던 후배는 만신창이가 되어 기숙사로 다시 돌아왔다. 수많은 피란민이 건너던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을 목격한 후배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다리가 끊겨 피란을 포기한 채로 선생을 비롯한 의사와 간호사, 의대 학생들은 밀려드는 국군 부상병을 치료했다. 며칠 뒤 국군이 사라진 자리에 인민군이 들어찼다. 의료진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않았다. 의사로서 눈앞의 환자를 최선을 다해 치료했을 뿐이다.
선생은 당시의 많은 의료진이 그랬듯 몸을 사리지 않고 의용군 군의관으로 자원해 전선을 따라 남하했다. 거기에 이데올로기 같은 건 크게 상관이 없었다. 선생의 저서 <벙어리새>에는 선생의 사상을 의심할 만한 어떤 언급도 나오지 않는다. 레드 콤플렉스에 짓눌린 누군가 굳이 혐의를 찾자면 인민군의 휴머니즘을 언급한 정도? 똥물에 빠진 환자가 병원에 실려 왔을 때 선생을 비롯한 의료진 모두 코를 감싸쥐며 뒤로 물러섰다. 유일하게 달려 나간 것은 자신도 상처를 입은 인민군 군관이었다. 냄새는 아랑곳하지 않고 군관을 흔들어 깨운 군관은 병사의 몸을 닦으며 의료진에 굶주린 것이 더 큰 문제니 제발 먹을 것을 달라고 외쳤다. 자신보다 병사를 먼저 살펴달라던 인민군 군관의 태도가 강압적인 국방군의 태도보다 선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실이다. 이를 두고 선생을 빨갱이라 매도할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런 시절을 살았다. 교수와 학생이 똑같이 줄을 서서 배식받고 식사하는 사회주의 시스템에 불편함을 느끼던 선생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하필이면 의용군 군의관이 되었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어떤 일을 겪었던 것인지 넋이 나간 채 찾아온 친구를 하룻밤 재워주었다. 친구 하룻밤 재워준 일로 선생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경찰을 움직일 수 있는 뒷배를 둔 덕에 선생은 더 이상의 고문을 면했지만,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건의 다른 연루자들이 사람으로 겪을 수 없는 고문은 물론 성폭행까지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물론 다른 연루자들 또한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했다. 뒷배 덕에 겨우 풀려난 선생은 긴 세월, 의사로 살았다. 의사로만 살았다. 차마 입을 열 수 없는 세상이었다. 선생의 과거 경력 때문에 잘 나가던 남편의 날개가 몇 번 꺾이기도 했다.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선생은 자식들에게도 자신의 아픈 과거를 숨긴 채 숨죽여 살았다. 벙어리처럼.
2005년, 선생은 전쟁 시기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서전 <벙어리새>를 출판했다. 그리고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리영희 선생이 보낸 감상문이었다. 평생 말하지 못했던 말을 겨우 세상에 토해낸 선생이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던 리영희 선생의 편지를 받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조금은 짐작할 것 같다.
젊은 날, 나는 류춘도 선생은 알지 못했지만(선생만 한 사연을 가진 무수한 사람이 선생처럼 평생 벙어리로 살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게 우리네 역사였다) 리영희 선생은 알았다. 알았다뿐인가. 선생의 책이 나의 젊은 날을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며 빨치산이었던 내 부모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80년대, 선생의 책은 군사독재에 치어 방황하는 청춘들의 등대와도 같았다.
낯선 이가 쓴 책을 읽고 리영희 선생이 감상문을 보냈다는 것을 어느 기사를 읽고 알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한가한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 바쁜 일상을 사는 선생이 어찌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편지 쓸 생각을 했을까? 우리 세대에는 흔치 않은 일이라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리영희 선생의 삶을 찾아보았다. 선생이 이북 출신이라는 것도, 공부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장학금 때문에 흥미도 없는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했다는 것도, 전쟁 기간 국군 장교로 7년이나 복무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선생을 진보의 길로 이끈 것은,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성의 길로 이끈 것은 물론 타고난 성정 덕일 테지만 항해 실습을 하다 목격한 여순항쟁, 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목격한 민간인 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부패상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은, 군 장교를 거쳐 박정희 수행 기자이기도 하는 등 대한민국에서 승승장구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진실을 밝히는 가시밭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진실을 덮는 것과 밝히는 것, 무엇이 더 어려운 길인지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진실을 덮으면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길을 선택하는 것이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밤낮없이 양심이란 것이, 이성이란 것이 들쑤셔 일상의 평온을 잠식했을지도... 세상이 달라져 돈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 요즘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리영희 선생은 참으로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 류춘도 선생의 삶 또한 그러했다.
리영희 선생도 류춘도 선생도 내 부모와 달리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의 참상 속에서 불의를 목도했을 뿐이고, 그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을 뿐이다. 불의를 목도했다는 것은 그러니까, 빨갱이로 몰리면 법적 절차 없이도 단박에 목이 베이거나 총살당할 수 있고,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집단매장을 당할 수 있고, 빨갱이 친구에게 밥 한 끼나 하룻밤 잠자리 같은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무시무시한 고문과 성폭행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불굴의 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휴머니즘이라고밖에 나는 다른 대답을 구하지 못했다.
리영희 선생을 만난 류춘도 선생은 '친구' 하자고 했단다. 리영희 선생의 답은 "친구 말고 동무하자"였다. 왜 친구 말고 동무였을까? 동무라는 말을 써본 적 없는 우리 세대는 영원히 그 의미를 알지 못할 게다. 동무는 옛말이고 더 친근하다. 과거에 목도한 불의를 외면하지 못해 삶이 일그러진 두 사람에게는 어쩐지 친구보다 동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도 같다.
2005년부터 류춘도 선생이 세상을 떠난 2008년까지 두 선생은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류춘도 선생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하여 글씨를 점점 알아보기 어렵다. 무슨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검열의 시대를 살아온 탓일 테지.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동무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제 것인 듯 느낄 수 있는. 선생 같은 분들이 있어 비록 반쪽짜리나마 이 땅에 민주주의가 가능했다. 영원히 묻힐 뻔한 서글픈 삶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도 했다. 류춘도 선생이 이제는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 선후배나 친구들의 실명을 굳이 밝힌 것도 어떻게든 그들의 삶을 양지로 끌어내고 싶어서였으리라. 류춘도 선생은 말했다. 먼저 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자신은 덤의 인생을 살고 있노라고. 내 부모도 노상 말했다. 좋은 사람은 다 가고 자신들 같은 찌꺼기들만 남아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고. 감히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들이 있어 우리가 사라진 역사를, 그 속의 위대하고 가여운 사람들을 알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오늘은 아직도 어둡다. 그러나 류춘도 선생 같은, 리영희 선생 같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누군가 또 어디서 벙어리 가슴 앓듯 이 시대를 앓으며 말문을 터뜨리기 위해 애쓰고 있지 않을까.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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