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 같은 신문과 방송을 보는 것은 고문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나온 지 올해로 50년이 흘렀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편집국에 힘찬 붓글씨로 새긴 걸개를 내걸고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 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라고 외쳤다.
언론사에 길이 남을 10·24 동아 자유언론실천선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잠깐의 성취감을 맛보았을 뿐, <동아일보> 기자들의 강제 해직과 투옥이라는 비극으로 일단락됐다. 그리고 끝내 <동아일보>로 돌아가지 못한 안종필, 김종철, 박종만, 정연주 기자 등 10여 명의 젊은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를 구성해 자유언론실천운동에 투신했다. 평범했던 기자의 삶은 그 후 자의 반 타의 반 언론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사의 삶으로 변모해갔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한 뒤 옥고를 치르던 기자 김종철은 1979년 7월 25일, 법정에서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남겼다. "한국 언론이 권력의 앞에 서서 권력자가 좋아하는 기사만을 조작까지 하는 그런 비참한 현실을 볼 때 저희로서는 도저히 이것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매일매일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그런 걸레 같은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서 지내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 박종만도 같은 날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때 과연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언론인으로서 무엇을 했던가 반성을 해 봅니다. (중략) 이제 이 땅에는 언론이 없습니다. 소극적으로 그저 진실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의 죄악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그러한 적극적인 죄악까지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땅의 언론의 현실입니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한 뒤 신문을 만들지 못해 우리 사회 저항의 움직임을 유인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결국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을 맞아 죽은 뒤에야 수의를 벗고 구치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소년의 용기
동아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나온 1974년은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나온 해이기도 하다. 1974년 박정희 유신정권 3년 차를 맞은 그해 언론의 현실이 그만큼 엄혹해서였을까. 선생은 책에서 당대 언론 현실을 이렇게 꼬집었다. "옷을 걸치지 않고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 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인가.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모두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했을까."
리영희 선생은 당시 지적 암흑의 상태와 인간적 타락을 개탄하며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또 '펜타곤 문서'를 전 세계에 폭로한 대니얼 엘즈버그의 용기를 지식인의 이성으로 보았고, 엘즈버그의 용기 있는 행동이 광기의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당대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광기의 사회를 바로잡기는커녕 임금님이 알몸이라고 외친 소년에게 엄청난 임무를 떠맡긴 채 비굴과 자기 모독의 단계를 자처하고 말았다. 소년 뒤에 숨은 비겁한 어른들로 인해 군부독재의 칼날은 그 후로도 10년 넘게 춤을 추었고, 또 다른 소년들의 희생을 겪고 나서야 어른들은 광기의 칼날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용기를 내 외치는 것은 그만큼 비현실적인 일이다.
나는 지난해 말 <기자유감>이라는 졸고(拙稿)를 한 권 냈다. 면구스럽지만 <기자유감>에 "나의 사표(師表) 리영희"라는 짧은 글도 실었다. 며칠 전 사인해 달라고 책을 들고 찾아온 후배에게 어떤 글귀를 적어줄까 고민하다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외친 소년의 용기”라고 적어주었다. 힘없는 소년의 용기만큼이라도 진실을 향해 발현해달라는 당부였다. 나는 소년의 용기에 비견할 만큼은 안 되지만 어느 날 작은 목소리를 낸 것을 계기로 시청자와 독자들로부터 엄청난 응원을 받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한 몸에 쏟아지는 응원이 날카로운 칼날로 변하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쭐함에 취해 있다 눈 깜짝할 사이 나락으로 가는 선배 기자들을 여럿 보았다. 나의 용기는 그들의 우쭐함과 달리 순수(純粹)를 유지하고 있는가. 매일 자문하고 다짐한다. "나는 그들과 달라야 한다."
'바이든'이 지워졌고, '날리면'도 사라졌다
하지만 리영희 선생의 바람과 달리, 기자의 용기가 광기의 사회를 바로잡지 못하고 광기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2024년 1월 12일, 서울서부지법 제12민사부 성지호, 박준범, 김병일 판사는 역사에 길이 남을 판결을 내놨다. 외교부가 MBC를 상대로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사태의 정정보도를 청구한 사건에 대해 "사실 확인 결과,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없고, '바이든은'이라고 발언한 사실도 없음이 밝혀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라며 외교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판결문을 읽어보면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판결문에는 판사의 예단이 가득하다. 판사는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은'과 '날리면' 중 어떤 발언을 한 것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봄이 타당하다"라고 하더니 그 뒤에는 "'바이든은'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없음이 밝혀졌다"라고 판시했다. 밝혀졌다는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결론은 바이든이라는 것인지, 날리면이라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판결문에서 모순되는 대목은 이뿐만 아니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발언의 취지, 전후 맥락, 목격자의 진술, 발언자의 해명 등은 개인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위 판단 기준만으로는 진위 여부를 밝히기에 한계가 있다"라고 해놓고, 다음 페이지에서는 "발언의 시각과 장소, 배경, 전후 맥락, 당시 위 발언을 직접 들은 박진 장관의 진술 등을 종합해 볼 때,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의회와 바이든을 향하여 욕설과 비속어를 사용했다고 볼 수 없다"라고 단정했다. 앞서는 전후 맥락과 목격자 진술은 개인의 주관이 개입돼 진위를 밝히는 데 한계가 있다더니, 뒤에서는 전후 맥락과 목격자 진술을 판결의 논리로 제시한 것이다.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판사의 오지랖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판결문에는 "대한민국이 글로벌펀드에 1억 달러를 기여하기 위해서는 국회 동의가 필수적이다", "만약 야당이 1억 달러 기여에 동의해 주지 않을 경우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신뢰가 하락할 수 있다"라는 판사의 걱정도 담겨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승인 안 해주면 쪽팔려서 어떡하나"를 발언할 2022년 9월 당시에는 이미 다음 해 정부 예산안에 관련 글로벌 보건 기여 사업 예산이 편성돼 있었다. 그것만을 따로 떼서 국회 동의나 승인을 받는 절차가 필요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판사는 이를 국가 신뢰도까지 연결해 걱정해 준 것이다. 판사는 여야가 연말에 줄다리기할 전체 연간 예산안 심사에서 혹여 해외 원조 예산이 누락될까 봐 오지랖을 편 것인가. 그러나 여야가 해외 원조 예산을 놓고 줄다리기를 한 적은 없다. 전체 국가 예산에서 해외 원조 예산의 비중은 약 0.1%로 아주 미미하기 때문이다.
판사는 또 당시 뉴욕에서 기자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의견을 나눈 것을 두고 "이 사건 발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견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런데 당시 기자들의 의견 교환 중 바이든이냐 아니냐는 이견이 없었다. 판사는 왜 자의적으로 "기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라고 예단을 한 것일까. 굳이 당시 제기된 이견을 꼽자면 국회니까 한국 국회를 말한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낸 기자가 소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판결문에는 MBC의 음성인식 서비스가 "바이든은"이라는 음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도 판결 논리로 적시돼 있다. 그러나 MBC의 음성 인식 서비스는 편리를 위한 장치일 뿐, 음성분석 기능은 없다. 그저 유튜브 동영상의 자동 자막 생성기(CC)와 같은 것이다. 유튜브가 제공하는 자동 자막에 얼마나 엉터리가 많은지는 써 본 이들은 알 것이다. 네이버 클로바노트도 마찬가지다. 두 서비스 모두 사람의 귀보다 더 잘 들을 수는 없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개그 프로그램에서 '바보 왕자' 역할을 맡은 개그맨이 "스즈측뽕"이라는 유행어를 반복해 시청자들의 배꼽을 빠지게 한 적 있었다. 자신을 세자로 책봉해달라는 희망을 맥락 없이 내뱉어 웃음을 자아낸 것인데 캐릭터에 맞게 발음을 "세자책봉"이라고 하지 않고 "스즈측뽕"이라고 뭉개서 한 것이다. 인간은 알아듣는 "스즈측뽕"을 기계는 알아들을 수 있을까? "스즈측뽕"을 알아듣고 박장대소하는 관객과 시청자들은 가짜뉴스에 현혹돼 웃은 것인가. 황당할 따름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자주 쓰는 용어 중에 "흐즈므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말라"는 말을 이를 악물고 화를 억누른 채 옆 사람에게 할 때 쓰는 우스개 표현이다. 인간들은 알아듣는 "흐즈므르"를 과연 기계는 알아먹을 수 있을까? "스즈측뽕"과 "흐즈므르"를 음성분석의 영역에 집어넣은들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을까. 인간의 우월성을 애써 외면하고 어째서 기계에 의존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판결문에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정확히 무엇인지, 바이든 인지 날리면 인지가 담기지 않았다. 듣기 평가 후 2년 동안 결과를 기다려 온 국민은 허탈하기만 하다. 대통령실은 기자들의 거듭된 질문에도 "그 모든 걸 포함해서 법원에서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동문서답을 내놨다. 그 모든 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인데 그 모든 것이 포함됐다니. 대통령도, 대통령 참모들도, 재판을 걸어온 외교부도, 판사도, 본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판사는 문제의 발언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윤 대통령의 입장을 이렇게까지 옹호해 주었다. "사람의 음성은 (중략) '휘발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중략)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 일반 국민에게는 좀처럼 발생하기 어려운 '휘발'이 왜 특정 집단에는 이렇게 자주 발생하는가. 또 왜 이리도 너그러운가.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론인(言論人)과 언롱인(言弄人)
다시 리영희를 떠올린다.
지난해 12월 19일, 국회를 찾은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기자들이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을 질문했다. 그러자 한 장관은 기자들의 면전에서 "민주당이 저한테 꼭 그거 물어보라고 시키고 다닌다고 그러던데요. 여러 군데에다가 공개적으로.."라고 면박을 줬다. 질문한 기자가 "그래서 질문 한 거 아닌데요"라고 짧게 항변했지만 한 장관은 개의치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질문 사주'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들은 기자들은 끝내 한 장관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기자를 우습게 아는 권력자들의 언행은 최근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해법을 논의하겠다면서 도쿄를 찾아 이른바 '오므라이스 환대'를 받았던 2023년 3월 16일, 정상회담 후 일본 공영방송인 NHK는 "기시다 총리가 회담에서 위안부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한국 측에게 요구했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입장을 전달했다"라고 보도했다. "위안부 문제나 독도 문제,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라던 윤석열 정부에는 폭탄 같은 보도였다. 그것도 다른 언론사도 아닌, 윤석열 정부가 그렇게 칭송했던 NHK가 쓴 기사이니 말이다.
NHK의 이 보도를 근거로 국내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굴욕외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나는 당시 도쿄에 있었는데, 이날 대통령실 관계자들은 NHK의 보도를 수습하느라 몹시 분주했다. 굴욕외교 논란이 확산하자 대통령실 관계자들의 반응은 짜증으로 변해갔다. 한국 기자들에게 "일본의 언론플레이에 넘어가지 말라"는 말을 여러 차례 하는가 하면 "일본 언론이 매번 저런 식인 것 모르느냐", "외교 채널로 항의하겠다" 등의 말을 하기도 했다. 급기야 며칠 뒤에는 한국 기자들에게 일본 언론에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취지의 발언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기자들은 부화뇌동이라는 모욕적 표현에 항의하거나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권력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기자들이 어째서 가만히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통령에게 1호기 안에서 따로 부름 받기를 기다리는 기자, 영부인과 셀카 찍기에 바쁜 기자, 모욕을 모욕으로 느끼지 못하는 기자가 허다하다. 이 땅에는 언론인(言論人) 대신 언롱인(言弄人)만 남은 것인가.
1971년 10월 <창조>라는 잡지에 실린 리영희 선생의 '기자풍토종횡기'는 나의 기자 지침서다. 권력에 기생하고 약자에 군림하며, 촌지를 뜯어내고 지성은 퇴보하고, 권력의 발표를 조건반사적으로 받아쓰는, 지금으로부터 53년 전 기레기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한 글이다. 지금 읽어도 50년 넘도록 어쩌면 그리 변한 것이 없는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우리는 언론인(言論人)과 언롱인(言弄人) 어디쯤 서 있는가.
권력이 되려는 기자들
출입처에 매몰된 기자들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눈앞의 권력에 취약하다. 선거의 해만 되면 엉덩이가 들썩이는 기자들이 줄을 선다. 자신이 출입했던 정치 집단에 들어가 권력이 되려는 기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 출마를 위해 정치판으로 직행한 폴리널리스트들의 실명이 이미 기사에 오르내릴 정도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는 불편부당하게 기자 직분을 수행했으니 정치를 해도 떳떳하다"라고 말한다.
지난 2019년 5월, 문재인 전 대통령과 대담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말을 여러 차례 끊으며 "독재자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냐"는 질문을 했던 KBS 기자, 그리고 같은 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 전 대통령에게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느냐"라고 공격적인 질문을 던진 경기방송 기자가 당시 문 전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다. 참고로 그 경기방송 기자는 그 후 국민의힘에 입당해 정치를 하고 있다. 그리고 2019년 문 전 대통령과 KBS 기자의 대담 직후 중앙일보에는 이런 사설이 실렸다.
- "(중략)...대통령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무차별로 공격하는 비이성적 태도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폭력이다. 다수의 힘으로 겁박해 입을 틀어 막겠다는 발상이고, 결국 여론은 왜곡된다. 악플과 문자 폭탄, 항의 전화 앞에 시달리면 누구든 위축되기 십상이다. 이런 식의 배타성과 패권주의엔 청와대가 분명한 자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사설] '독재자' 질문 향한 융단 폭격 옳지 못하다 中 (중앙일보, 2019년 5월 11일)
<조선일보>도 당시 칼럼을 통해 문 대통령의 언론관을 이렇게 비판했었다.
- "(중략)...진행을 맡았던 기자는 '태도가 불량했다', '독재자 표현을 썼다'는 등의 이유로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고 있다. (중략)...지금 언론 상당수가 자발적이든 어쩔 수 없어서든 친(親)정권 성향이란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언론을 만나는 걸 극력 피한다. 그는 야당 때 "정치는 소통인데 박근혜 정부는 정치가 없다. 통하지 않고 꽉 막혀서 숨 막히는 불통 정권"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에게 그 말이 되돌아오고 있다. 이럴 거면 '직접 언론에 브리핑', '24시간 공개' 등의 약속들은 대체 왜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만물상] 또 기자회견 없는 취임 2주년 中 (조선일보, 2019년 5월 11일)
이토록 문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을 비난했던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2022년 11월 도어스테핑 충돌 후 나에게 가해진 각종 위협과 폭력에는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그 신문사 출신의 정치인들이 기자 선배랍시고 나에 대한 비난에 앞장서는 웃기고도 슬픈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나에게 예의가 없다고 비난하다가 돌연 배지를 달겠다며 총선 출마를 선언했고, 장관이 되겠다며 나섰다가 줄행랑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기자를 하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출입처였던 권력으로 이동한 기자들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적이 그동안 있었던가.
참고로 2019년 5월 11일자 <조선일보> [만물상] 칼럼을 쓴 기자는 이동훈 당시 논설위원이다. 이동훈 논설위원은 이 칼럼 작성 2년 후인 2021년 6월, 윤석열 캠프의 대변인으로 합류했다. 두 칼럼 모두 5년이 흐른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
다시 1979년 7월 25일.
법정에 선 30대 초반의 <동아일보> 기자 정연주는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남겼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 게 죄라는 겁니다. 나무를 나무라고 이야기한 사실 (중략) 우리들 10명의 동지들, 선배들이 지금 당해야 하는 고통의 원인입니다. 이런 정말 말할 수 없는 처절한 코미디, 이것이 이 땅에 지금 서슴없이 함부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다시 1978년 11월 26일.
당시 반공법으로 기소돼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리영희 선생은 200자 원고지 222매 분량의 긴 상고이유서를 제출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하려는 권력의 광기에 대해 중세 시대 갈릴레오 재판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다소라도 정치적 성격이거나 정부의 이해관계 또는 체면에 관련된 사건의 재판에서 법원과 법관이 얼마나 독립적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만하다."
반백 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언론 자유는 여전히 사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기자들이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출국금지를 당하는가 하면, 기자와 언론사 압수수색은 일상이 되고 말았다. 리영희를 필두로 김종철과 박종만, 안종필, 정연주에 이어 2024년에는 어떤 기자가 또 최후진술을 남기고 사라질 것인가. 권력은 또 어떤 언론을 법정에 세울 것인가. 대통령의 발언 하나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참담한 권력과, 부끄러운 사법의 장막을 걷어치울 용기가 지금의 기자들에게 있기는 한 것인가. "걸레 같은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서 지내는 것이 고문"이라던 김종철의 최후진술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진실을 추구하라"던 리영희 선생의 말도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1974년은 어느덧 2024년이 됐다. 50년 전 그들이 저항하던 자리에 우리가 서 있다. 우리는 지금 떳떳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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