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신작 <경성크리처>의 여주인공 한소희는 12월 24일 자신의 SNS에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올리면서 이 드라마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일본 731부대의 조선인 생체실험 만행을 상기시켰다. "경성의 낭만이 아닌, 일제강점기 크리처가 아닌, 인간을 수단화한 실험 속에 태어난 괴물과 맞서는 찬란하고도 어두웠던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의미심장한 멘트는 곧바로 일본 누리꾼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일본 누리꾼은 "다시는 일본 오지마" "혐일 조장하는 게 잘 하는 일인가" "한국인들은 정말 이기적"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야" 등의 댓글로 한소희를 공격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는 늘 일본 누리꾼들에게 공격을 받아왔다. 일본의 군국주의 만행을 상기시키는 한국 배우들의 멘트는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 배우는 일본 극우로부터 신변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면서 극도의 적개심과 분노를 노출하는 행위는 가해자의 자기방어 논리이다. 정치와 외교의 영역이 아닌 대중문화에서 반일, 반한 감정의 매트릭스는 관계의 역전, 즉 자신의 역사적 과오와 치부를 콘텐츠로 소비해야 하는 불편한 관계로 이행한다. 즉 "제국주의-식민주의"의 지배 관계에서 콘텐츠 생산자-소비자의 수용 관계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의 심리구조 안에는 보고는 싶지만, 보기 불편한 양가적 감정이 경합한다. 한류를 소비하는 일본인은 자기부정과 자기방어의 이중 심리 안에서 동요한다.
케이팝과 제이팝이 동고동락, 호형호제하는 지금에도, 한일 간 심리적 긴장 관계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2017년, BTS 멤버 지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지민은 2017년에 제작한 유튜브 다큐멘터리 <번 더 스테이지> 촬영에 문제의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티셔츠 뒷면에는 광복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과 원자폭탄 투하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고, 애국심, 우리 역사, 해방, 한국이라는 영문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영상에 노출된 티셔츠는 출시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연말 일본 활동이 한창일 때쯤 일본 미디어의 보도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더불어 2013년 리더 RM이 광복절에 올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쉬는 것도 좋지만 순국하신 독립투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대한독립만세"라는 멘트도 일본 언론에 의해 다시 소환되었다. 일본 상업 매체 및 극우 단체들은 BTS의 행동을 "자국 역사에 대한 뿌리 깊은 콤플렉스"로 비난했다. 이들은 아울러 도쿄돔 시위 협박에 이어 급기야는 방송 출연 저지 행동에 나섰다. 이 때문에 BTS의 TV아사히 <뮤직스테이션> 출연이 취소되었다.
케이팝과 제이팝의 양가적 관계
케이팝과 제이팝의 관계는 양가적이고 가역적이다. 사실 케이팝의 원시적 축적은 제이팝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아이돌 그룹 제작사였던 에이벡스(AVEX)와 자니스 사무소는 SM와 JYP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2000년에 데뷔한 SM의 보아는 에이벡스 레이블 소속으로 일본에서 성공신화를 달렸다. 이후 SM과 JYP 소속 뮤지션을 포함, 많은 케이팝 가수들이 에이벡스 레이블과 일본 활동 계약을 맺었다. 1975년에 설립해 아라시(Arashi), 긴키키즈(KinKi Kids), 캇툰(KAT-TUN) 등 남성 아이돌을 전문적으로 키운 제작사 자니스 사무소 역시 초기 케이팝의 남성 아이돌 그룹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 케이팝은 제이팝을 미미크리(mimicry)했다. 이를 "케이팝의 일본화"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말 이후 케이팝의 일본화는 일본 노래를 무단으로 베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음악적인 표절이나 레퍼런스의 영향보다는 아이돌 그룹을 제작하는 방식이나 일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유통 배급 제휴 성격이 강했다. 케이팝의 일본화는 케이팝 글로벌화의 초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023년 현재 그것은 제작의 유사성과 모방의 수준을 넘어서 "케이팝의 현지화"로 이행하고 있다.
케이팝의 현지화, 제이팝의 한국화
사실 아이돌 중심이라는 점은 같지만, 케이팝과 제이팝의 음악 스타일은 판이하게 다르다. 케이팝의 음악스타일은 주로 미국 팝음악에 영향을 받아 힙합, 알앤비, 일렉트로닉팝이라는 세 가지 요소들의 합으로 구성된다. 반면, 제이팝의 음악스타일은 자국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얻었던 디스코, 펑키, 엔까의 합성체이다. 제이팝이 케이팝에 비해 올드하게 느껴지는 것은 음악을 만드는 레퍼런스가 매우 복고적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음악 시장을 보유하고 있어, 애초부터 해외시장을 염두에 두고 탈일본화하는 글로벌 사운드를 만들 필요가 없다. 음악적인 스킬, 가창, 안무, 언어, 퍼포먼스에 있어 완전한 체제를 구축하는 한국의 아이돌 시스템과 달리, 제이팝은 내수 시장를 위한 진화형, 육성형 아이돌 시스템을 원한다.
그러던 제이팝이 2010년대 후반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BTS, 블랙핑크의 글로벌 열풍이 일본의 음악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자니스 사무소 1인 체제에 기초한 일본의 아이돌 레이블은 경쟁력을 잃었다. 일본의 젊은 음악팬들은 식상하고 복고적이고 다이내믹하지 않은 제이팝 그룹보다는 역동적이고 완성도 높은 케이팝을 선호한다. 급기야는 케이팝의 글로벌 경쟁력이 실력 있는 일본의 아이돌 지망생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JYP, YG 등 케이팝 메이저 레이블은 아예 일본 현지에서 "케이팝스러운" 제이팝 그룹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그룹이 니쥬(NiziU)와 JO1(ジェイオーワン, 제이오원)이다. 이른바 "제이팝의 한국화"가 본격적으로 가시화한 것이다. 제이팝의 한국화는 기존 일본 아이돌 멤버나 아이돌 지망생의 케이팝 러시를 야기했다. 특히 최근에 데뷔하는 대부분의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는 일본 멤버가 한 명쯤은 들어가 있다. 동시대 케이팝의 현지화는 제이팝의 한국화로 번역할 수 있다.
'다이너마이트', '버터'로 BTS의 일본 활동이 전성기였던 시절 자니스 사무소의 한 그룹 멤버가 "케이팝은 제이팝의 아류"라고 애써 평가절하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예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일본 아이돌은 모두 한국행"이라는 자조감도 공존했다. 올해 NHK에서 주최하는 제74회 홍백가합전에는 케이팝 가수들이 대거 출연한다. 여자 가수들이 참여하는 홍팀에는 르세라핌, 미사모(트와이스 유닛), 남자 가수들이 참여하는 백팀에는 세븐틴과 스트레이키즈가 출현한다. 여기에 JYP 소속으로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걸그룹 니쥬와 일본판 프로듀스 101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 현지에서 데뷔한 JO1까지 합하면 총 6팀이나 된다. 비틀스, 롤링스톤스 등 과거 브릿팝 밴드의 미국 팝시장 점령을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으로 표현했듯이 케이팝 가수들의 홍백가합전 대거 출연은 "케이팝 인베이전"으로 부를 법하다.
케이팝의 현지화의 심리구조
제이팝의 한국화 현상 와중에도 일본의 혐한 정서는 무의식 안에 숨어 있다 특정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폭발한다. 제이팝의 한국화 현상은 식민지 근대시절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설파했던 일본 군국주의 정치 슬로건의 완벽한 "문화적 내파"(cultural implosion)이다. 혐한정서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케이팝의 현지화, 즉 제이팝의 한국화에 대한 심리적 반작용도 강해진다. 케이팝의 현지화는 차이의 욕망이며, 제이팝의 한국화는 동일화의 욕망이다. "보고 싶지만 완전히 보고 싶은 건 아니고, 거부하고 싶지만 완전히 거부하고 싶지도 않은" 케이팝의 현지화가 생산하는 일본 대중의 심리적 양가성은 지민과 RM, 그리고 한소희의 메시지를 불편하게 받아들인다. 케이팝의 현지화, 혹은 제이팝의 한국화는 문화 자본의 논리이면서 동시에 일본의 동시대 문화적 콤플렉스의 역린을 건드린다. 그러나 그 역린이 폭발하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케이팝의 현지화는 최종심급에서는 정치적 군국주의의 텅빈 이데올로기, 헛된 망상이 아닌 개인의 욕망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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