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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속 에노덴 노선 건널목, 우린 이런 풍경을 가질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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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슬램덩크 속 에노덴 노선 건널목, 우린 이런 풍경을 가질 수 없을까?

[철도는 혐오시설이 아니다 ②] 철도는 문화다

철도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일본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행운이다. 일본은 철도 왕국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일본에서 철도가 갖고 있는 특성을 분석해 보면 교훈이나 반면교사로 삼을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근대를 관통하며 전 지구적으로 압도적인 수송분담률을 자랑했던 철도는 자동차에 밀려 주력 교통수단의 지위를 내려놓았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철도 수송분담률을 갖고 있다. 놀라운 점은 도쿄도의 경우 철도가 33%로 27%를 기록한 도로를 넘어섰다. 도쿄를 비롯한 일본의 거대 도시에서 철도가 갖는 위상은 세계 어느 도시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국의 2020년 기준 수송분담률은 도로가 84.5%이고 철도는 12.8%로 도로가 압도적이다. 도로만 보면 버스가 15%, 승용차는 69.5%를 기록해 한국은 승용차가 지배하는 사회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수치들은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저출생 등 심각한 여러 문제들 중에 교통 문제도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교통수단별 수송분담률의 추세가 이대로 이어진다면 한국의 미래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한국에서 교통 분야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철도 수송분담률을 높여야 함은 물론 1%대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자전거의 분담률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자전거 수송분담률 27%를 보여주고 있는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와 비교한다면 한국은 교통정책이란게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진보나 보수를 자처하는 양대 정당은 개혁, 성장, 정의, 공정이라는 거대 담론을 내 세우지만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자신들만의 기득권 유지이다. 전 지구적 위기로 불리는 기후변화나 서민들의 삶의 개선이란 문제에는 무지와 무책임만 보일 뿐이다.

정치인들과 정부는 늘 국민편의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제 편리함을 어느 정도로 누려야 하는지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한다. 때로는 적절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정당이나 정부는 먼저 나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국민불편 항목을 제시하고 불편과 공존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접근성을 높여주는 대형 주차장, 삶의 편리함을 보장하는 수많은 1회 용품들, 저녁에 주문하면 새벽녘에 도착하는 초고속 배송 제도의 이면에는 환경파괴와 살인적 노동을 용인하는 암묵적 동의가 존재한다.

2018년 기준 OECD 37개국 중 31개국이 도시부 제한속도를 시속 50킬로미터(km)로 설정하고 있으며, WHO또한 도심 제한속도를 시속 50킬로미터 이하로 권고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도 2021년 4월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으나 자동차 이용자들의 불만이 커지자 제한속도를 완화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유럽의 주요 도시들이 자동차의 주행속도를 시속 30킬로미 이하로 정하고 도심 주행을 제한하는 제도를 속속 도입하는 것과는 다른 길로 가는 한국이다.

말로는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실제 행동은 현재 행동 양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더 나아가 기후위기를 조장하기까지 하는 한국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45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토목 공사를 벌여 지상 철도를 지하화하겠다고 한다. 무지개 빛 개발 청사진이 지상 철도가 사라진 땅 위에 휘날린다. 더 많은 건물과 자동차와 사람이 서울과 수도권을 번영시킨다. 이 번영을 지구는 기꺼이 환영할까?

한국은 교통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한국의 교통정책과 도시 개발 정책은 "지속가능한 삶과 기후위기 대응에 조응하는가"라는 기준에 철저히 종속되어야 한다. 자동차 지배체제에 균열을 내지 못한다면, 도로 교통 숭상 문화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지속가능 사회는 허구에 불과하다. 자전거가 강변이 아니라 도심 곳곳에서 당당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돼야 하고 이를 위한 인프라를 구성해야 한다. 수송효율성이 높은 철도를 확충하고 자전거와 연계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자전거는 레저나 스포츠 영역에서 생활의 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이미 선진국들이 추진하는 교통정책 방향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의 대규모 자전거 주차장 ⓒ박흥수
▲오미야역 신간센 고가철도 아래 위치한 대형 자전거 주차장 ⓒ박흥수
▲도쿄 노면 전차 ⓒ박흥수

네덜란드, 스웨덴, 독일, 일본의 주요 도시 아침 출근 거리를 보면 자전거 대회가 열리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자전거 행렬이 이어진다. 그만큼 자동차 이용을 대체하게 되고 연료로 배기가스 배출도 교통혼잡도 줄어들게 된다. 자전거를 끌고 도로에 나가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다.

친환경 교통 시스템이 정착된 나라에서 집을 나선 자전거들이 도착하는 곳은 주로 철도역이다. 시민들은 역에 대규모로 조성된 자전거 주차장에서 나와 열차로 갈아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베를린 도심을 관통하는 고가 철도 아래로 시내의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손을 뻗으면 선로 변 건물에 닿을 듯 달리는 도쿄의 전철은 도쿄 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추 교통수단이다. 도심을 관통하는 철도를 흉물 취급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세계의 여러 도시들은 그 도시들이 지나 온 시간 속에 건축물과 길, 문화와 역사를 담아왔다. 동력의 힘은 근대를 열었고 철도는 그 상징이었다. 이 근대의 아이콘은 오랜 시간을 거쳐 도시를 구성하는 문화가 되고 철학과 예술까지 담아내는 배경이 되었다. 서울에는 아직도 철도 건널목이 몇 군데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널목은 용산구에 있는 백빈 건널목이다. 식민지 시절 용산에서 출발해 원산까지 달리던 경원선 철길이었고 지금은 경의중앙선과 경춘선을 달리는 열차가 달린다.

▲용산 백빈 건널목 ⓒ박흥수

이 건널목은 여러 드라마의 촬영장소가 되기도 했고 다녀간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이들이 찾아오거나 도시 여행자들의 순례코스가 되고 있다. 이 건널목 차단기 앞에 서서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단순한 건널목 하나가 아니라 한 세기가 넘는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는 장소이다. 이 건널목도 철도 지하화 흐름 속에 얼마나 그 자리에 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건널목으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일본 에노시마 전철이 운영하는 에노덴이다. 도쿄에서 전철을 타고 1시간 조금 넘게 달리면 닿게 되는 가마쿠라와 후지사와를 잇는 노선이다. 에노덴 열차가 가마쿠라에서 출발하게 되면 가정집 담장에 닿을 듯 마을 한복판을 달리다 해안선을 만나 바다를 보는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이 노선이 관광객들로 가득 찬 이유는 가마쿠라가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세계적 선풍을 일으켰던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 마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철도 건널목인 에노덴 라인 가마쿠라 고교 앞 건널목 ⓒ박흥수

가마쿠라 고등학교 앞 역에는 애니메이션 오프닝 장면에 등장하는 철도 건널목을 직접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2026년이면 100주년이 되는 이 노선 주변의 주민들은 소음, 분진, 지역개발 방해를 이유로 이 철도 노선에 손을 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용산 백빈 건널목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가 세계적 흥행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가마쿠라 고등학교 앞 건널목에 이어 세계인들이 찾는 명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가마쿠라에 본사를 둔 특이한 철도도 있다. 바로 쇼난 모노레일이다. 에노덴 열차의 중간 정차역이 있는 에노시마와 일본 철도 핵심 노선인 도카이도 선 JR동일본 오후나 역을 잇는 노선인 쇼난 모노레일은 공중에 매달려 달리는 현수식 열차이다. 쇼난 모노레일이 오후나 역을 출발해 속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면 미래 도시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모노레일에 올라타면 제법 많은 승객들이 공중을 가르는 여행을 즐긴다. 이 모노레일도 마을을 나누는 고가 철도이지만 지역 주민들은 마을 발전을 막는 흉물이 아니라 지역을 이어주는 소중한 교통수단으로 여긴다.

▲오후나 에노시마 지역의 명물 현수식 열차 쇼난 모노레일 ⓒ박흥수
▲건물 앞마당으로 나온 주민들과 기관사가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주택과 붙어있는 에노덴 노선 ⓒ박흥수
▲철도고가 아래 늘어선 우에노 시장 식당들은 퇴근길 시민들이 지친 하루를 쉬는 휴식공간이다. ⓒ박흥수

집 앞 마당에서 양치질을 하다가 열차 기관사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에노덴, 공중에 매달려 발아래 마을을 굽어보는 경험을 선사하는 쇼난 모노레일, 4복선 8개의 선로로 이루어진 고가철도 아래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에노 시장 사람들, 도쿄 도심의 역사적 명물 도쿄 사쿠라 트램은 거대 도시 도쿄와 그 주변 도시들이 철도와 함께 공존하는 여러 풍경 중의 하나이다. 세계 최고의 철도수송분담률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철도시설 지하화 및 상부개발 등에 관한 특별법'(가칭) 제정을 신념으로 삼는 정치인들과 이를 구현할 행동대 국토부의 돌진을 그저 바라봐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45조 원으로 예측된 토건 사업은 얼마나 많은 탄소를 배출할 것이며 또 어떤 우여곡절을 거치며 한국 사회를 흔들 것인지 상상이 안 된다.

해질녘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을 지나 뚝섬과 성수역을 향해 달리는 열차에서 봤던 붉은 노을은 이제는 볼 수 없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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