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에 대한 물음이 쏟아지는 나날이다. 인권보장을 외치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사이, 한편에선 그 목소리의 정당성을 두고 격론이 펼쳐진다. 갖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프레시안>과 한국인권학회가 만났다. 인권은 사회적 화두인 동시에 연구와 학문의 대상이다. 학계가 쌓아온 '인권학' 연구를 사회적 화두로 다시 던진다. 평화-인권-환경 연구자인 황준서 박사가 글을 쓴다. 편집자
한국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2006년부터다. 이후 16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금수강산이 달라진다고 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은 여전히 요원하다.
그동안 국회에선 여러 차례 차별금지법이 제출되었고, 대통령 선거 때마다 후보들의 주요 공약으로도 차별금지법이 언급되어 왔다. 하지 차별금지법은 번번이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도 거치지 못하고 폐기되어 왔다. "사회적 합의"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더울 땐 덥고 추울 땐 추운 거리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가? 왜 그러한 변화가 필요할까? 이번 글에서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왜 포괄적 차별금지법인가?
우리나라에서 특정한 소수자나 정체성을 가진 집단에 대한 차별대우를 금지하고, 이들을 보호하는 법률로는 장애인차별금지법, 남녀고용평등법, 양성평등기본법, 기간제 및 단기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비정규직보호법이 있다. 김종우·서현수(2022)의 연구에 따르면 개별 사례에 대한 차별금지 외에 포괄적으로 차별금지를 명시한 법률은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있는데, 이 법은 국가인권위원회 조직 구성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인 만큼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가족 사이에서도 외모, 성격, 취향, 가치관이 달라 가끔 갈등이 생기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 다양한 차이를 마주한다. 문제는 사회에서 특정한 차이가 수용되거나 존중되지 않고 오히려 차별의 원인이 되는 상황이다.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성적지향,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차이 등을 이유로 발생하는 차별행위를 규율하고자 한다.
이러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사회적 차별행위란 여러 요인들이 '교차'하여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짚고 있다는 점에서 개별적 차별금지법과 다른 의의가 있다. 예를 들어 여성 난민의 경우 난민이면서 여성이기에 복합적인 차별을 겪을 수 있는데, 개별 차별금지법상으로는 이러한 복합차별을 금지하거나 이에 대한 피해를 구제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해외 국가들 중에는 일찍이 포괄적 차별금지를 명시한 법률들을 제정한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민권운동의 성과로 미국에서는 1964년에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되었다(1875년 처음 제정되었으나 1883년 폐지된 후 1964년에 다시 제정). 독일에서는 2006년에 일반적 평등대우법(General Equal Treatment Act)이, 영국에서는 2010년에 평등법(Equality Act 2010)이 제정되었다.
각국 정부가 인권 증진 및 보호를 위해 노력하도록 감시하고 촉구하는 역할을 하는 유엔인권이사회는 오래 전부터 각국 정부가 민족, 종교, 언어, 성 정체성, 질병 등으로 인한 차별로 시민들의 기본권이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해왔다. 유엔사회권위원회(UNCESCR)는 2017년 10월 한국 정부에게 차별금지법 제정을 직접 권고한 바 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
그동안 여러 연구와 토론, 미디어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의 당위성과 내용, 관련 해외사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차별금지법 자체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인식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0년에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에 응답자 88.5%가 찬성했다는 '혐오차별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은 '사회적 합의 부족'을 이유로 교착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도대체 차별금지법의 어떤 측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며, 이 사회적 합의의 실체는 무엇일까? 과연 누가 어떤 절차에 따라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입증할 수 있는 걸까? 애초에 법률 제정과정에서 만장일치 같은 완전한 '합의'란 가능할까?
차별금지법 논의가 본격화된 제17대 국회 회기부터 현재 시점까지 언론사 기사와 사설, 국회 회의 속기록 등을 분석한 김종우·서현수의 연구에 따르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토대는 한국 개신교 우파의 성소수자 혐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뿌리 깊은 남성중심적 질서들과 정치적 보수주의를 통하여 형성되어 있다.
이들은 "개신교 우파의 동성애 담론은 무슬림 등 타 종교에 대한 거부, 양성애 규범(이성애중심주의.필자 주.) 전통적 가족주의, 가부장적 성역할 규범, 정치 및 문화적 권위주의, 사회주의 계열의 이념에 대한 부정적 인식,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과 관련된 담론"을 차별금지법 반대 진영의 이념적 특성으로 지적한다.
이러한 반대는 오늘날까지 꾸준히 지속되어 왔으며, 반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혐오표현까지 동원되어 왔다. 김종우·서현수는 '근거에 기반하지 않고 토론과 숙의의 가능성을 차단한 채 반대에만 몰두하는' 이러한 모습을 "반지성주의"라고 지적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교착상태에 이르게 한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이러한 반대 흐름 속에서 '차별금지'라는 명칭이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할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나 더불어민주당은 차별금지법의 다른 명칭인 '평등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름이 달라졌어도 반대진영은 여전히 폐쇄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길?
김종우·서현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새로운 숙의의 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무작위 추첨을 통한 숙의시민포럼(미니 퍼블릭)의 적용가능성을 고려한다. 이들은 이러한 접근이 "단순히 포괄적인 차별금지에 대한 입법을 추진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인권에 관한 논의를 공론화하고, 인권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합리적 소통 절차를 통해 숙의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한다는 의미"도 가진다고 설명한다. 다만 차별금지법에 대한 찬성과 반대 입장이 신념에 기반하여 고정되어 있어 타협의 가능성이 협소하다는 점과 차별금지법의 광범위한 내용을 고려한 숙의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부연한다.
복합적 차별이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권문화를 조성하고, 차별의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 법의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면 정부는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여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평등의 원칙에 따라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반대자들도 숙의절차에 참여할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다만, 오늘날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공론의 장은 반대자들에게 상당히 많이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특히 "보수의 가치"에 호소하는 특정 정당은 차별금지법 제정절차에 불참하는 등 오히려 사회적 합의 형성 과정을 방해하고 있다. 이들을 제재할 수 있는 방안은 마땅치 않다.
차별금지법 반대자들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염원하는 소수자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 반대를 이유로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퍼지고 있는 각종 혐오표현에 대한 무관용과 피해자에 대한 구제 조치 노력 등 적극적인 차별철폐정책이 필요하다. 무분별한 입법 방해에 맞서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차별금지 기준 설정을 통한 평등의 제도화라는 의의에 더하여 인권 증진 및 보호를 위한 사회적 환경의 형성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널리 스며있는 타자에 대한 혐오와 합리성, 가치, 공공성 등에 대한 냉소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차별을 견디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소수자들의 존엄함을 지키는 길이다.
※ <소개논문> 김종우·서현수. 2022. "차별금지/평등법 제정의 정치과정: 제도, 행위자, 담론을 중심으로". 『인권연구』 5(1): 8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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