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블랙리스트 이후(준)' 디렉터로 일하는 정윤희 동지가 "선배 저 6월 9일 건으로 소환장 받았어요"해서 "축하해. 드디어 윤희도 열심히 사니 국가의 부름을 받는군" 어쩌고 했는데, 새벽녘 일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낯익은 봉투의 우편물이 와 있더군요. 발신이 '서울서초경찰서장'이니 보나마나 6월 9일 대법원 앞 비정규노동자 연대문화제 건. 문화제를 집회라고 우겨 방송차를 강제 탈취하고 문화기획자 이사라 동지 등 사람들 연행하고 이격조치하였다 해서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일명)사라의 문화제' 하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해서 2차 대법원 앞 비정규직 문화제 열었던 날이었습니다.
이날도 어김없이 문화제 마무리 시점에 난데없는 해산명령 3회 발하고는 모든 참가자들을 끌어내 강제 해산 시킨 날입니다. 워낙 문화제에 함께 하겠다는 문화예술인들이 많아 나는 자리 비켜주자 해서 흔한 시 낭송 하나도 안하고 문화제 참석만 했었는데도 범법자네요. 물론 한 소리 하긴 했습니다. 인도를 경찰들이 모두 막아 오갈 길이 불편한 시민 한 사람이 차도 쪽으로 해서 지나가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몰려들어 연행하려고 해서 시민정신을 발휘해 항의를 쫌 해주었죠. 오늘 확인해 보니 당일 변호사 분들과 함께 현장에서 '인권침해감시단' 조끼를 입고 위법이 없도록 조치하던 고태은 님 등 인권단체 활동가들께도 소환장이 왔다니 할 말이 없습니다.
뭐, 이런 지경이니 열은 좀 받지만 소환장 한 장 쯤 괜찮습니다. 최소 민주주의가 다시 깨져나가고 짓밟히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낭자한 세상이 다시 도래했으니 무슨 또 통과의례려니 해야겠죠. 오늘 새벽에도 참 착잡했습니다. 새벽 2시경 밀린 일 좀 하다가 함께 공간 쓰는 민변 사무실을 막 나서려는데 정문을 열고 사내 둘이 쑥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헉, 놀라다 보니 아는 이들, 거리의 변호사로 알려진 권영국 변호사와 김유정 전국금속노조 법률원장이었습니다. 오늘도 대법원 앞에서 문화제가 있었는데 모두 끌려나오는 과정에서 대우조선 사내하청지회장 김형수 동지가 연행되어 현장에 함께 있다 한 숨 자고 나가 아침 규탄 기자회견까지 함께 하려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무실에 마침 라꾸라꾸가 2개 있어 자리를 펴주었습니다. 끌려나와 서초역 앞에서 밤샘 노숙하는 이들도 혹 몸 불편하거나 편히 쉬어야 하는 분들 있으면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 밤도 이렇게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 생각하면 소환장 한 장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물론 그간 벌이도 한 푼 없으면서 늘 이 무도한 국가에게 시간 뺏기고 돈 뺏기며 끌려다니고 때 되면 벌금이라는 명목으로 특별세 내 온 게 지난 20여년 동안 한두 푼이 아닌지라(흑흑 저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아니어서 신분보장도 못 받아 그간 늘 개인적으로 내거나 주변 동료들이 조금씩 모아주어서 납부해 왔더랍니다.) 착잡하고 화가 나기는 합니다. 십수 년 쉬지않고 재판장 가는 게 일상이기도 했는데 이제 마지막 남은 한 건 정리되고 나면 비로소 검찰과 재판장에 끌려 다니는 건 당분간 졸업이겠거니 했는데, 요상한 정권이 요상한 정권에게 촛불항쟁 다 거덜내고 정권이양해 준 다음부터 다시 대통령 경호실 놈들에게 사지가 붙들려 끌려나오지를 않나.... 옛 생활로 자동 전환되어가는 느낌이라 기분이 안 좋기도 합니다. 윤 정부야 다시 응징하고 끌어내려야겠지만 더불어이상한 민주당도 미안한 마음이라도 있으면 이제라도 민주주의 운운 그만하고 진짜 검찰공화국과 싸우고 싶으면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보검처럼 휘두르는 악법들 바꾸는 일에 진심으로 나서길 바랍니다. 노조법 2,3조 개정 약속과 차별금지법 제정과 민주화유공자법 제정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약속 등 뒤늦은 입법 약속에라도 좀 나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좀 낫다고 해야 할까요. 박근혜 때 어느 날은 집에 갔더니 나보다 더 대책없이 세상만사 태평스럽기도 한 아내가 그날만큼은 어두운 표정으로 저거 보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작정하고 기획해서 보냈는지 중앙지법과 서울 시내 여러 경찰서 등 모두 다른 곳에서 보낸 소환장 여섯 통이 한날 한시에 도착해 있더군요. 세월호, 유성 투쟁 등등.... 기록적이군. 인생에 큰 복 짓는 날이거나 그래도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았다는 확실한 인증 받는 날이라 여기고 사진 찍어두고, 3만원도 받고 5만원도 받는 시 한 편도 적어두긴 했었지요. 그렇게 조금은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던 날들도 있었던가 봅니다. 그렇게 다시 몸과 정신을 데워보라는 불쏘시개로 이 소환장을 보내준 것은 아닌지. 썩을 정부가 한판 제대로 떠보자고 보내는 도전장은 아닌지. 그런 거라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참, 일전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 때 김건희 씨 축사를 위해 끌려나온 이후, 대한출협과 서울국제도서전 조직위원회, 문체부에서는 단 한 번의 사과의 말도, 과정에 어떤 반성과 성찰이 있었는지, 그래서 이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내부에서 최소한의 양심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번뇌하고, 양심 선언했던 정원옥 대한출협 사무국장과 홍태림 정책팀장의 사표만 수리되었다고 하더군요. 오정희 씨는 여전히 문체부의 비호 아래 ‘대한민국예술원’의 종신회원으로 매달 200여만 원씩을 국가 세금에서 꼬박꼬박 수령하고 있다고 하고요. 이명박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의 몸통이었던 유인촌(당시 청와대 문화수석에 이어 최장기 문체부장관으로 일함) 씨가 다시 컴백해 청 문화특보에 임명되더군요.
정말 코미디 같은 세상입니다. 동료 문학예술인들을 블랙리스트로 사찰·검열·탄압했던 이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그들의 이상한 지위와 명예를 위해 끌려나온 나는 다시 소환장이나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런 세상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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