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아제르바이잔이 군사 작전을 개시한 지 하루 만에 30년 간 자치를 유지하던 아르메니아계 분리주의 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한 뒤 인종청소를 우려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이 시작됐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25일(현지시각) 오전 6시 기준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된 2906명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민이 자국으로 입국했다고 밝혔다. 전날 밤 10시 기준 1050명에서 밤새 2000명 가까이 불어나며 본격적인 집단 이주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 통신은 이 지역에서 아르메니아로 통하는 유일한 도로인 라친 회랑을 따라 24일 밤 긴 탈출 차량 행렬이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전날 나고르노카라바흐 분리주의 정부 지도자 삼벨 샤흐라마니안 쪽 다비드 바바얀 고문은 통신에 "우리 주민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99.9%는 떠나는 것을 선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아르메니아계로 그 수는 12만 명에 이른다.
지난 19일 이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을 계기로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군 항복 및 분리주의 정부 해체를 요구하는 "대테러" 작전을 펼치며 군을 투입했고 20일 무장 해제 등을 조건으로 한 휴전이 이뤄지며 아제르바이잔은 이 지역 통제권 회복을 선언했다. 24일 아제르바이잔 국방부는 이 지역에서 추가로 로켓, 탄약, 지뢰, 포탄 등을 압수했다고 밝혔다.
아제르바이잔과는 종교도 민족도 다른 아르메니아계가 대부분인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국제적으로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인정되지만 1988년 소련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독립 및 아르메니아로의 편입을 요구한 뒤 두 차례(1988~1994, 2020년)의 전쟁을 거치며 사실상 자치를 행사해 왔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교 신자가 대부분이고 아르메니아는 정교회 신자가 많다.
아제르바이잔 쪽은 이 지역 인구의 이주를 허용했고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22일 적어도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파시냔 총리는 24일 "고향에서 살 수 있는 적절한 여건 및 인종청소에 대한 효과적 보호책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 탈출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로이터>는 다만 인구 280만 명에 불과한 아르메니아에 나고르노카라바흐 인구 12만 명을 수용할 여력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아제르바이잔 쪽은 이 지역을 통합하고 주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밝혔지만 주민들은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아제르바이잔은 지난해 12월부터 아르메니아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로 통하는 유일한 도로인 라친 회랑을 봉쇄해 이 지역을 인도주의적 위기로 몰아 넣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제르바이잔이 지난주 이 지역에서 전격 군사 작전을 펼친 것은 주민들의 공포와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 아르메니아에 따르면 하루 만에 이 지역에서 200명이 죽고 400명이 다친 작전에서 아제르바이잔 쪽은 군사 목표물만 고정밀 타격했다고 주장했지만 주민들은 민간인 피해를 증언했다. <로이터>는 24일 아르메니아로 탈출한 운전사 그리고르얀이 그가 살던 나고르노카라바흐 코초그호트에서 아제르바이잔의 공격으로 민간인이 사망해 트럭 두 대가 주검으로 꽉 찼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리고르얀을 포함해 마을이 공격 당한 수천 명의 주민들은 며칠 간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주둔하는 이 지역 수도 격인 스테파나케르트 공항 인근에서 사흘 간 물도 음식도 없이 노숙했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아르메니아에서 온 건축업자로 지난 겨울 라친 회랑 봉쇄 뒤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나가지 못했던 나이리는 통신에 그가 머물던 쇼시 마을이 폭격 당해 공항으로 향했으며 공격으로 아이들 또한 다쳤다고 증언했다.
프랑스 파리에 기반을 둔 국제인권연맹(FIDH)은 휴전 하루 뒤인 21일 성명을 내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대구경포, 무인기(드론), 박격포를 동원해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어린이를 포함한 수십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수천 명의 지역 주민이 대피했다고 밝혔다. 연맹은 "아르메니아계 주민에 대한 집단 학살의 실제적 위험"이 우려된다면서 국제사회의 개입을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분쟁으로 인한 증오가 곧바로 해소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1988년 독립 선언 뒤 시작돼 1994년 끝난 1차 카라바흐 전쟁에서 약 3만 명이 사망하고 1백 만 명이 피난민이 됐다. 2020년엔 이 지역에서 재차 전쟁이 터져 44일 간 지속됐다.
인권변호사이자 이 지역 전문가인 셰일라 페일란은 카탈르 알자리라 방송에 "아르메니아계에 대한 혐오 정책은 수십 년간 지속됐다. 이는 하루 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의 권리와 안전히 보장될 것이라는 어떤 합리적 근거도 없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며 인권 감시를 위해 유엔(UN)이 즉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중재로 2020년 전쟁에서 휴전이 성립한 뒤 2천 명 가량의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주둔하던 상황에서 벌어진 아제르바이잔의 군사 작전은 러시아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페일란은 <뉴욕타임스>(NYT)에 아제르바이잔이 "러시아의 승인 없이 그런 일을 벌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뒤 서방과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러시아에 더욱 중요한 국가가 된 튀르키예(터키)도 카라바흐 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다. <로이터>를 보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25일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해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나고르노카라바흐 관련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러시아 주도 군사 동맹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일원이지만 올해 CSTO 연례 훈련을 자국 영토에서 개최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달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을 벌인 데다 우크라이나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보내며 러시아 눈 밖에 난 상황이다.
독일 도이체벨레(DW) 방송과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을 보면 따르면 파시냔 총리는 24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최근 몇 년 간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에 자행한 공격을 보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외부 안보 기구는 아르메니아의 국익과 안보 관점에서 비효율적"이라며 "CSTO 및 아르메니아와 러시아 간 군사·정치 협력이 아르메니아의 안보 보호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말했다.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을 중단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파시냔 총리는 이번 사태 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항의 시위를 포함해 국내 비난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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