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허영만의 '각시탈'은 1985년 반공장편만화영화로 재탄생했다. 각시탈은 원래 주인공이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각시탈을 쓰고 복수하는 내용이다. 일종의 독립투사인 셈인데, 전두환 정권 시절 만화영화로 재탄생한 각시탈은 배경이 북한으로 바뀌고 각시탈은 공산당을 물리친다.
유명한 반공 만화영화 중엔 '똘이장군'도 있다. 이 애니메이션의 모티브는 해외에서 인기 있던 외화 시리즈 '타잔'이다.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던 타잔의 이미지를 입은 똘이장군이 공산당과 김일성을 부수는 이야기다. 이 만화영화는 어린이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서 봤다기보다 학교와 당국에서 반공 캠페인을 위해 어린이 단체관람을 장려했기 때문에 수익성이 좋았다고 보는 게 맞다. '해돌이의 대모험'도 있었다. 외화 시리즈 헐크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인데 해돌이가 북한 공산당을 보고 분노해 녹색 장사로 변신하고 공산당을 무찌른다는 서사다.
일제시대에 활동한 각시탈이 갑자기 북한에서 공산당을 무찌르거나, 미국 작가가 쓴 정글의 타잔 캐릭터가 북한의 숲속에서 소년 장군이 되어 공산당을 무찌르거나, 마블 히어로 헐크가 갑자기 북한에서 공산당을 무찌르는 것은 일종의 조악한 '반공 번안물'인 셈이다. 인기 캐릭터를 저작권 무시하고 가져다가 '공산당을 무찌르는' 캐릭터로 변모시키는 것은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에나 있던 일이다.
뜬금없이 반공 애니메이션 얘기를 꺼낸 것은, 지금 한국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묘하게 많아서다. 21세기 하고도 23년이 지난 요즈음에도 이런 번안물이 판을 친다. 주인공은 국방부다. 국방부에 홍범도 장군은 한때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무시무시한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변모해 있다. 일제 독립군에서 군의 뿌리를 찾던 국방부는 갑자기 '반공 영웅 서사물'로 방향을 틀고 홍범도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부 청사에서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 홍범도를 때려잡고 있다. 최근 '이념 전쟁'을 선포한 군통수권자는 국군의 서사를 독립운동에서 반공영웅으로 급변침한다.
요즘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건국'을 위한 운동이라고 한다. 대통령의 창조적인 식견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과정인 독립운동에 감히 '소련 공산당'을 끌어들인 셈이다. 이 새로운 역사적 해석에서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선사(先史)가 독립운동에 투영돼 완성되기 위해선 '공산당'과 같은 불순한 사상은 제거돼야 한다.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완벽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윤석열 대통령)" 대한민국을 세탁하기 위해선 낙오된 공산주의자를 육사 교정에서 삭제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 교과서도 많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번안물은 또 있다. 갑자기 윤석열 대통령은 구국의 지도자이자 빛나는 태양으로 변모한다. "시커먼 먹구름 위에는 언제나 빛나는 태양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먹구름을 걷어내고 혼란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구국의 지도자, 우리 민주평통 의장이신 바로 윤석열 대통령(김관용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29일 발언)"이라는 찬사가 대낮에 읊어진다. '민족의 태양'을 우린 알고 있다. 그건 한반도 이남엔 없고 이북에만 유일신으로 존재했었다. 빛나는 태양, 구국 지도자의 뜨거운 찬양은, 이를테면 북한의 서사를 남한 식으로 각색한 번안물이다.
홍범도 장군과 우크라이나의 공통점이 있다. 소련 공산당에 소속된 적이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지난 7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방문해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70년 전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소련 소속으로 6.25 전쟁 때 북한을 도운 이력이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갑자기 폐허가 된 한국을 상상하더니, 급기야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 정신을 강조한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 출신이라 안되고, 우크라이나는 소련 공산당 출신이라도 괜찮다. 윤석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방문해 올해에만 1900억 원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육사 교정과 국방부 청사에서 제거되고,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은 개명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우린 어디까지 소련 공산당을 용서해 줘야 하는가?
80년대 반공물은 아무데나 '반공 서사'를 갖다 붙여 새로운 콘텐츠로 재탄생시킨 것들이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딱 그렇다. 봉오동 전투가 있던 1920년은 김일성 8살 때 벌어졌다. 그런데 이 전투는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빨치산 활동'이 되고, 1948년에 창군했다는 대한민국 국군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20년대 '공산당원'까지 색출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이순신 장군의 항일 투쟁이 자유민주주의 건설과 공산당 토벌 정신이라는 번안물이 나올 수도 있겠다.
1980년대 반공 판타지라면 황당함이 허용될 수 있겠지만, 2023년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웃고 넘길 일이 아니게 된다.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육사 교정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다. 1차대전 승전국이었던 일본은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했을 때 미국 등 서구 모든 나라들로부터 '식민지배'를 인정받고 있었다. 독립군 홍범도가 누구와 손을 잡고 싸워야할지 명백한 상황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일한 잘못은 돌아가신 2년 후에 북한 정권이 수립될 것을 미리 예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겠다고 하기보단, 간도특설대 같은 곳을 알아봤어야 맞았을 거다. 그랬으면 돌아가신지 80년 후에 이런 푸대접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우린 지금 반공과 독립운동의 조악한 크로스오버물을 강제시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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