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밤길을) 걷기 싫어하는 이유가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보행 환경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는데 이는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보행환경'은, 그러나 밤도 아닌 대낮에 다시 드러났다. 일면식 없는 여성을 범죄대상으로 삼은 '신림 둘레길 강간살인 사건'으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등이 주축이 됐던 여당 발 반(反) 페미니즘 정치가 다시금 논란에 휩싸였다. 이 대표 재임시절 정치권에 진입한 국민의힘 최인호 관악구의원이 사건 발생 지역인 관악구에서 '여성안심귀갓길 폐지'를 홍보해왔다는 사실이 조명되면서 혐오정치 논란이 급물살을 탔다.
"여성의 안전 앗아버린 너, 가해자랑 다를 게 뭐야?"
22일 서울 관악구의회 홈페이지 '의회에 바란다' 페이지에서 한 구민은 최 구의원의 사퇴를 촉구하며 이 같이 말했다. 해당 페이지에는 둘레길 강간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끝내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난 19일 오후부터 최 구의원 사퇴 촉구 게시물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성혐오 구의원 최인호는 물러가라', '여성시민 죽음으로 몰고 간 구의원은 사퇴하라' 등 최 구의원을 비판하는 게시물들은 22일 오전을 기준으로 1800건이 넘게 쌓였다.
최 구의원은 지난해 자신의 유튜브 계정에서 의정활동을 소개하며 "한국 최초 여성안심귀갓길 전면 폐지"를 이뤄냈다고 주장했다. 당시 최 구의원은 "여성안심귀갓길 사업으로 남성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있다"고 주장하며 "여성안심귀갓길 (예산) 7400만 원을 전액 삭감해 (이 예산으로) 안심골목길 사업을 증액했다"고 말했다. 관악구의 '여성친화도시' 사업 등에 대해서도 "페미니즘 사업"이라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최 구의원이 홍보한 '여성안심귀갓길 전면 폐지'는 결과적으로 허위사실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1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관악구는 최 구의원이 여성안심귀갓길 예산 7400만 원이 당초 계획대로 "여성안심귀갓길 신규 3개소에 솔라표지병을 설치하는 데 사용"됐다고 밝혔다. 최 구의원이 지난해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당시 해당 사업을 공격하면서 예산이 도시계획과 안심골목길 사업으로 재배정됐지만, 사용처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다만 보행 중인 여성의 안전이 심각하게 훼손된 신림 둘레길 강간살인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 , 지자체 여성안전 사업과 관련해 해당 정책들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 '일부의 피해망상' 등이라 주장해온 최 구의원의 지난 행적이 알려지며 분노한 여론은 쉽게 잦아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구의원' 성토 이어져…"'안티페미' 활용한 청년정치 결과물"
실제로 최 구의원은 직접 올린 유튜브 자유발언 영상에서 "페미니즘은 성파시즘", "성인지예산, 여성가족과 폐지"와 같은 발언을 남기는 등 '여성정책이 남성을 차별하고 있다'는 식의 반(反) 페미니즘 정치성향을 노골적으로 보여 왔다. 이날 최 구의원 사퇴 촉구가 이어지고 있는 관악구의회 홈페이지에서는 '어떻게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서나 볼 법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 구의원이 됐는가'라는 등의 성토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최 구의원 개인을 넘어 정치권의 책임을 지적한다. 황연주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사무국장은 21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최 구의원의 경우 당선 전부터 이미 '성파시즘'설 등 극단적인 안티 페미니즘 성향을 정체성으로 삼아왔지 않나" 되물으며 "그런 이력을 가진 분이 지방선거 공천을 따낸 것 자체가, 극단적인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대상으로 정치세력을 결집시켜온 정치권의 선거 전략이 누적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 국민의힘과 윤석열 당시 대선 후보 캠프는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등을 중심으로 한 반(反) 여성주의 전략을 적극 활용한 바 있다.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는 20대 남성 유권자층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자는 취지의 '세대포위론'을 주장했고, 윤 대통령은 '여성가족부 폐지', '성범죄 무고죄 강화' 등 온라인 커뮤니티 내 쟁점 사항을 공약화했다.
최 구의원의 정치권 진입도 당시 분위기 아래에서 이뤄졌다. 그는 2021년 이준석 전 대표가 이끈 국민의힘 '나는 국대다' 토론대회에 참여, 여성폭력범죄와 관련해 "여성의 공포감은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어디까지 실재하고 어디까지가 피해망상인지 확실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발언을 남기며 대회 16강에 진출했다. 이후 그는 윤석열 대선 후보 캠프에서 청년본부 양성평등특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직을 수행, 이어지는 지방선거 국면에선 '불법촬영 점검 예산 전액 삭감' 등의 공약을 내걸며 관악구의원직에 출마했다.
황 사무국장은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이 "안티 페미니즘에 기초한, 소위 인셀 남성의 정서를 자극하는 방식의 정치 전략"이었다고 평하며 "결국 최인호 개인의 문제를 넘어 정치권이 그간 이 '혐오정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왔는지 그런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정부가 활용한 (여성)혐오정치의 영향은 단순히 여성안심귀갓길이라는 정책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윤 대통령이 여성가족부 폐지를 선언하고 각 기초의회 구성이 재편된 지방선거 이후 각 지자체에선 실제로 '여성'이나 '성평등'과 같은 단어가 사라지고 있다"며 "(이번 논란은) 여성의 불안을 ‘예민한 것’으로, 여성폭력범죄를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별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분위기에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지난해 6월 지방선거 이후 각 지자체에선 여성정책 담당 부서의 명칭이 바뀌거나 관련 연구기관이 통폐합되는 사례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여성가족정책실 산하 여성정책담당관과 여성권익담당관을 양성평등담당관으로 통폐합해 명칭을 변경했고, 같은 해 대전시는 성평등 정책의 총괄조정 기능을 맡고 있던 성인지정책담당관 제도를 폐지했다. 대구시에서도 대구여성가족재단이 대구행복진흥원으로 통합됐다.
정책에서 '여성' 지우기는 "구조적 차별 없다"는 정치권의 메시지
여성계는 이 같은 '여성 지우기' 현상이 "성별화된 문제, 구조적인 문제를 부정하는 메시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당시 '혐오범죄'의 인정 여부를 두고 큰 논란이 일었던 것처럼, 이번 사안 또한 결국 여성폭력 범죄에 대한 구조적 원인의 인정 여부가 핵심 쟁점이라는 것이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21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여성안심귀갓길에서 '여성'을 뺀 행위 자체가 하나의 여성 살인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는 없다"면서도 "하지만 성별화된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을 두고 '역차별'을 주장하며 성별을 빼버리는 일은 범죄의 구조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다. 메시지 측면에선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최 구의원의 경우 21일 본인을 향한 여성혐오 논란에 대해 "여성안심귀갓길 대신 CCTV, 비상벨, 가로등을 설치하는 안심골목길 사업이 치안에 효과적"이라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이때다 싶어 광인처럼 날뛰는 성특권파시즘 세력과 타협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주장했다. 최 구의원의 지난 주장과 종합하면 범죄예방에서 '여성'을 강조하는 것은 남성 등에 대한 역차별인 동시에 별다른 실효성도 지니지 못한다는 말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송 대표는 "(여성폭력범죄라는) 여성문제에서 여성을 삭제해 버리면, 결국 '그건 괜찮다', '그건 문제가 아니다'라는 직간접적인 메시지를 사회에 뿌리는 것과 같다"라며 "여성, 남성으로 가를 문제가 아니라 다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주장하는 건 사실 성별 권력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운신할 공간을 하나도 만들어주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슷한 논란은 지난해 7월 인하대 성폭력·사망 사건에서도, 같은 해 9월 신당역 스토킹 살해사건에서도 일어난 바 있다. 당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해당 사건들을 '남녀로 갈라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을 남기며 사건의 구조적 성격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 장관은 현재 신림 둘레길 강간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사표현을 내지 않고 있다.
송 대표는 "특히 '여가부 폐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온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는 명백한 여성문제에 있어서도 '여성'에 방점을 찍는 것에 (각 기관 등이) 노골적인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라며 "안심귀갓길 정책 같은 물리적인 예방책을 확대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를 넘어 정부가 여성폭력범죄를 인식하고 있고, 또 강력히 대처하겠다는 메시지를 강화하는 일도 분명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 사무국장 또한 "내가 일상에서, 일터에서 살해와 강간의 위협을 받고 목숨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 이걸 정치가 해결해야 하는데 오히려 개별사건으로 축소하며 접근하기 때문에 계속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며 "범죄가 왜 계속 일어나는지, 여성들이 왜 불안감을 느끼는지, 또 왜 분노하는지 정치권이 이제라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들은 22일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을 구성하고 오는 24일 추모행진에 나설 것을 예고했다.
이날 이들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정부의 기조 하에 최소한에 불과했던 성평등 정책은 지속적으로 축소되어왔으며, 국민을 지켜야 했을 국가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묵살하고, 관련 정책을 축소‧폐지하거나 엉뚱한 대책을 내놓는 행태 끝에 결국 또 다른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이라며 "'각자 조심해서', '운이 좋아서' 살아남는 사회가 아닌, 누구나 평등해서 신뢰하고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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