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기가 한양도성까지 뻗치게 하라
백두대간이 그 산줄기를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분수령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한북정맥으로 이어집니다. 삼각산 영봉에 이르러 정맥의 본줄기는 서쪽으로 향하여 노고산 지나 장명산에서 서해로 숨어들고, 다른 한줄기는 남쪽으로 그 방향을 돌려 삼각산 즉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을 일구고 보현봉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형제봉과 구준봉을 지나 마침내 한양의 주산인 백악에 이릅니다.
이러한 산줄기의 흐름을 풍수지리적으로는 내룡(來龍)이라고 하는데, 자연이 어우러져 형성된 기운이 산줄기의 뻗침을 따라 전해져 온다고 생각하였던 우리 선조들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헌걸찬 정기가 산줄기의 뻗음을 타고 한양의 주산인 백악으로 이어져 그 기운을 한양 도읍에 불어넣어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제봉에서 백악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양도성으로 들어오는 들머리(入首)인 보토현에서 크게 내려앉아 병목현상을 일으키니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이에 세검정에 있었던 총융청에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특별한 날을 잡아 백성들을 동원하여 내려앉은 안부에 흙을 퍼다 날라 돋워줌으로써 산의 기운이 원활하게 이어져 전해지도록 하였는데 ‘흙을 보충한 고개’라는 뜻으로 이곳을 보토현(補土峴)이라고 불렀습니다.
8월의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94강(제6기 제4강)은 보토현에서 시작합니다. 보토현을 지나 성북동천, 북정마을, 심우장, 간송미술관, 길상사, 흥천사를 거쳐 정릉, 아리랑고개까지 가는 길입니다.
서울학교 제94강은 2023년 8월 13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학교 정문 좌측에 모입니다(찾아오시는 길은 국민대 홈피에서 대학소개→찾아오는 길을 참고하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민대학교앞-보토현-하늘마루-전망대-호경암-성북동천발원지-성북동천-삼청각-도성밖성곽길-북정마을-심우장-간송미술관-이태준가-선잠단지-점심식사 겸 뒤풀이-길상사-북악스카이웨이-흥천사-정릉-아리랑고개-성신여대역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8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한양 구경의 으뜸 ‘성북동천 복숭아꽃’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인왕산의 살구꽃, 서대문 밖 서지의 연꽃, 동대문 밖 동지의 수양버들, 세검정 근처 탕춘대의 수석(水石), 그리고 성북동천의 복숭아꽃[北屯桃花] 구경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아쉽게도 서지의 연꽃과 동지의 버드나무 그리고 탕춘대의 수석은 그 자취를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연못은 평지가 되고 계류는 복개되어 원형 복원이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인왕산과 북둔 일대는 지금도 찾는 이들이 있으니 이곳에다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심어 옛 정취를 복원하였으면 합니다.
도성 안의 수비는 삼군문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도성 밖의 수비는 북쪽은 세검정에 있는 총융청이, 남쪽은 남한산성에 있는 수어청이 맡았는데 총융청의 한 주둔지가 성북동천 상류에 있어 이곳을 북둔이라 하였습니다. 북둔 일대는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홍도동, 도화동, 복사동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복숭아나무는 보이지 않고 그 명칭이나마 동명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북동천 상류에 자리 잡은 삼청각과 대원각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권력자와 기업 총수들이 서로 만나 정경유착의 야합을 하던 요정이었으나 삼청각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음식점과 예식장으로 변했고 대원각은 주인이 법정 스님에게 기부하여 지금은 길상사(吉祥寺)라는 멋진 도심 속의 사찰로 바뀌었습니다.
대원각의 소유주였던 김영한은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고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알거지가 되자 16살 때, 조선 권번에서 궁중 아악과 춤과 노래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깨끗하고 청정한 물은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다”라는 ‘진수무향(眞水無香)’에서 따온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습니다.
백석과 김영한의 운명
백석은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일본 청산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의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조선일보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 신경에 잠시 머물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 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백석이 자야(子夜)라 불렀던 김영한은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도 가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함흥감옥에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때마침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켰으나 백석은 자야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나 계속되자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후 법정 스님이 어느 해 겨울 미국에 있는 사찰에 머물 때, 김영한 보살과 만나게 되었는데 김영한은 그 자리에서 대원각을 사찰로 만들고 싶다며 그 당시 시가 1000억 정도의 대원각을 법정 스님께 조건 없이 시주하였으며, 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1000억은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거야”라고 대답했답니다.
말년에 김영한은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창작과 비평),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대원각을 기증하고 법정 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이런 연유로 김영한의 법명을 따서 절 이름을 길상사라고 하게 되었으며 기생 진향이로, 백석의 연인 자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가진 것을 모두 보시하고 육신은 화장하여 길상사 뒤편 언덕에 산골하였으니 그야말로 정신적인 스승, 법정 스님의 가르침인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하였습니다.
길상사는 본래 요정이었기에 가람 배치가 전통 사찰과는 사뭇 다릅니다. 기존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입구에 식당을 겸한 편의시설만 새롭게 지었는데 대원각의 본채는 지금 길상사의 금당에 해당하는 극락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사찰 마당 한 모퉁이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 닮은 보살상도 눈여겨 볼만한 조각품입니다.
심우장의 조촐하나마 의기 서린 모습
그리고 도성의 좌청룡 산줄기인 맞은편 언덕에는 승려 시인이면서 독립지사인 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이 조촐하나마 의기가 서린 아담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만해는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창덕궁 옆에 있는 작은 한옥에서 기거하면서 <유심(惟心)>이라는 잡지를 간행하며 3.1만세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으나 노년에는 1933년 금어 김벽산 스님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지어진 성북동천에 있는 심우장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을 일년 여 앞둔 1944년 5월 9일, 마당에 내린 눈을 빗자루로 쓸다가 쓰러져 입적하였는데 동지들이 미아리에서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고 이후 부인 유숙원도 그 옆에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를 말하는데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라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며 심우장 현판은 만해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쓴 것입니다.
심우장에 걸려 있는 만해의 <오도송(悟道頌)>은 그 내용이 거침없는 그의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장부는 가는 곳마다 고향이거늘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사람들은 시름 속의 나그네로 오래도록 보내네.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소리 큰 할로 삼천 대천세계를 깨뜨리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 복사 꽃잎이 펄펄 날리네.
선잠단은 누에치기를 처음 했다는 중국 고대 황제의 황비 서릉씨를 잠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왕비가 친히 행차하여 양잠의 시범을 보여주던 곳입니다. 983년(고려 성종 2)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누에를 키우게 하였습니다.
조선 세종 때는 누에를 키우는 일을 크게 장려했는데, 각 도에서 좋은 장소를 골라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으며, 한 곳 이상의 잠실을 지어 누에를 키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506년(중종 원년)에는 여러 도에 있는 잠실을 서울 근처로 모이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강남 잠실이 바로 옛 잠실이 모여 있던 곳입니다.
선잠단의 설치 이후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내다가 1908년 잠신이 의지할 자리인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그 터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풍요로운 먹을거리[食]와 입을거리[衣]를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는 행사에 왕과 왕비가 직접 나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왕은 전농동에 있는 선농단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행사(親耕行事)를, 왕비는 성북동천 아래에 있는 선잠단에서 누에치는 시범을 보이는 친잠행사(親蠶行事)를 주관하였습니다. 그리 함으로서 백성들의 노동력이 늘어날 것이고 늘어난 노동력만큼 생산도 많아져 백성들의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풍요롭게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선잠단 사이로 난 골목 안쪽에 있는 성락원(城樂園)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며 의친왕 이강이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성락원은 자연적 지형을 잘 이용한 별장으로 생활, 수학, 수양의 기능을 하는 앞뜰과 후원의 역할을 하는 뒤뜰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한 행서체의 좋은 글씨가 바위에 많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사유지로서 일반인의 관람이 불가능하여 전해지고 있는 낡은 사진으로만 그 일면을 엿볼 수밖에 없습니다만 최근 성락원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도록 성북구청과 소유주간에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5천여 점의 문화재 보고
지금은 복개되어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성북동천에 놓여 있었던 쌍다리를 지나서 만나게 되는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이 전 재산을 투척하여 건립한 사설 미술관으로서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한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그리고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의 작품 등 5천여 점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전형필은 종로에서 아흔아홉 칸의 대부호의 집에서 태어나 휘문고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청소년 시절부터 도서 수집에 열정적이었는데 독립투사이자 서예가였던 오세창을 만나면서 당시 <근역서화징>이라는, 역대 서화가들의 총서를 집필하고 있던 스승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온 재산을 털어서라도 일제가 빼앗으려는 문화유산을 조선 땅에서 지켜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1932년 27세의 전형필은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동국정운>(국보),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국보) 등 소중한 고서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였는데 1943년 6월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당시 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1만 원을 지불하고 입수했습니다.
당시 한글 탄압을 일삼던 일제가 알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하여 비밀리에 보관하다가 1945년 광복 후에 이를 공개했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자 그 창제 동기가 분명히 밝혀진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본 것에는 전형필의 숨은 노력이 있어서 가능하였습니다.
전형필은 일본에까지 가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오기도 하였는데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신윤복의 그림이 담겨 있는 <혜원전신첩>(국보)은 전형필이 일본에서 찾아온 작품이며 이외에도 고려청자, 조선백자, 김홍도와 정선의 그림, 김정희의 서화 등 최고의 문화재들이 전형필의 손을 거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 석불, 탱화 등의 문화재를 수집 보존에 힘썼으며, 1966년에 보화각을 그의 호를 따서 간송미술관으로 개명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문화재의 보호를 위해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만 특별전시를 하고 있습니다만 전시를 하는 공간인 보화각이 너무 비좁아서 한정된 작품만 볼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최근 개관한 동대문에 있는 디자인프라자에서 많은 문화재를 번갈아 가며 전시하고 있습니다.
수연산방(壽硯山房)은 1933년에 지어진 상허 이태준의 고택입니다. 대지 약 120평, 건평 약 23.2평 규모로 좌향은 서남향이고 별채 없이 사랑채와 안채를 결합한 본채로만 이루어져 있는 개량한옥으로 그가 ‘수연산방’이라 당호(堂號)를 짓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하면서 단편 <달밤> <돌다리>,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 <황진이> <왕자 호동> 등의 창작에 전념한 곳입니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1921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 상지대학을 중퇴한 후 귀국하여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1933년 박태윤·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여 동인활동을 통해 계속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처럼 이태준은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선구자로서 소설가였지만 <문장강화(文章講話)>라는 문학 개론서를 내놓기도 하였으며 1946년 6월경 월북하여, 1953년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정마을의 유래
북정마을은 원래 성저십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요즘 표현으로 하면 그린벨트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집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영조 때 당시 성북동 일대에 포백(베와 무명을 희게 탈색하는 일), 훈조(메주 쑤는 일)를 하는 계가 생기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쑨 메주는 궁궐에 납품했는데 이 때문에 늘 많은 사람이 ‘북적북적’ 붐벼서 이곳을 ‘북적동’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편하게 발음할 수 있는 ‘북정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복개되어 자동차 도로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던 성북동천에 기대고 있는 마을들은 물줄기를 경계로 남쪽과 북쪽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양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대고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은 북 마을과 같이 서민들의 삶이 물씬 풍기는 60, 7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반면에 구준봉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둥지를 틀고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은 재벌 회장들의 저택이 들어섰었는데, 그 재벌들이 목멱산 남쪽 기슭인 보광동으로 옮겨감에 따라 지금은 외국 대사들의 저택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가까운 곳에 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한 외교 타운도 세워져 있습니다.
70년대 당시 소위 ‘도둑촌’이라 불렸던 이곳에 재벌 회장 집들이 들어설 때 현지 주민들의 내몰리는 모습을 비둘기에 빗대어 노래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는 그때의 광경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중략-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최근에는 뉴타운 개발로 쫓겨나는 서민들의 신산스런 삶으로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 다행히도 심우장 위에 있는 북정마을은 개발에 내몰리지 않고 예스러움을 간직한 채 지자체의 지원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성북동천은 백악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줄기의 북쪽 사면과 구준봉에서 동쪽으로 미아리고개 지나 고려대 뒷산인 개운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북쪽 사면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이므로 성북동천을 지나 북쪽인 정릉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북악스카이웨이’라 부르는, 구준봉에서 개운산에 이르는 산줄기를 넘어야만 합니다.
정릉 가는 길
지금은 외교관 거리로 변한 성북동 골목을 지나 북악스카이웨이에 올라서 배나무 과수원이 늘어서 있었던 국민대학 건너편 배밭골을 왼쪽에 두고 산줄기를 타고 조금 걸어가면 아리랑고개 가기 전 산기슭에 정릉(貞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이자 조선왕조의 최초의 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으로 본래 경운궁 서쪽 지금의 주한 미국대사관저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그때의 석물(石物) 일부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태조의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지, 그의 묘를 사대문 안에 두고 그 동쪽에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인 흥천사(興天寺)를 지금의 영국대사관 근처에 170여 칸 규모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소생들과 삼봉 정도전 등 개국 공신들을 참살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분묘(墳墓)는 지금의 이곳 정릉으로 이장시키고 정자각은 헐어버려 그 목재와 석재로 가까이에 있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북평관의 북루를 지었고 신장상이 새겨진 병풍석은 홍수로 떠내려간 광통교의 개축에 사용하였습니다.
그 병풍석은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지하에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훤히 그 모습을 드러내 지금은 청계천 광통교 밑에 가면 언제라도 볼 수가 있습니다. 병풍석 조각들을 보면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 등이 보이는데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이어서 아직 유교 문화가 강고히 정착하기 이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금강저에는 중앙에 조선왕조의 어기에도 그려져 있는 태극 문양이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능을 이장하면서 능을 묘로 격하하고 사실상 주인 없는 가묘(假墓)로 전락시켰으며 세종 때는 영정마저 불살랐습니다. 그러다가 1669년 우암 송시열이 현종에게 제창하면서 종묘에 모셔지고 이때 정릉으로 봉안되었습니다.
큰 규모로 지어진 흥천사도 정릉의 이전에 따라 1794년(정조 18)에 성민 스님과 경신 스님 등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고쳤습니다. 1846년(헌종 12) 구봉 스님이 칠성각을 지었고, 1849년(철종 1)에 성혜 스님이 적조암을 새로 건립했으며, 1853년(철종 4)에는 대웅전(지금의 극락전)을, 1855년(철종 6) 명부전을 세웠습니다. 고종 즉위 직후인 1865년(고종 2)에는 신도들이 숙식하며 수행하는 공간인 대방과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채를 건립하면서 이름을 창건 당시의 이름인 흥천사로 되돌렸습니다.
현재까지 존재하는 전각으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용화전, 칠성각, 독성각, 만세루, 승방, 대방, 일주문, 종각 등이 있습니다. 세조가 봉안했던 범종은 흥천사명 동종이라는 이름으로 1938년에 일제가 덕수궁 광명문으로 옮겨 전시하다가, 2019년에 광명문이 원위치로 이전함에 따라 현재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6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옛날에는 정릉으로 가는 고개라 하여 정릉고개라 하였으나 1926년 나운규가 이 고개에서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뒤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 1935년경에는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고급요정 청수관이 들어서면서 ‘아리랑고개’라는 푯말을 이 고개 마루턱에 세우고 고객을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8월)를 확인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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