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이제껏 본격적으로 담론과 운동의 장(場)에 진입하지 못했던 참전군인들의 가해경험이 말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참전군인 인터뷰 작업을 중심으로 가해자성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여, 베트남전쟁이 지금–여기의 '우리' 에게 무엇인지를 묻는, 동시대적이고 새로운 문제지형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피해의 자리와 가해의 자리를 왕복했던 '분열증적 듣기'
2018년 4월 20~21일에 열린 베트남전쟁시기한국군에의한민간인학살진상규명을위한시민평화법정(이하 시민평화법정)의 조사팀으로 활동하면서, 법률팀 변호사들과 함께 베트남 현지의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을 만나 법정 증언을 청취하기 위해 육하원칙에 따라 묻고 듣는 과정에서 재판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말들 사이로 미끄러지는 말들을 마주한 적이 있다. 들은 말을 전달하기 어려워하며 통역자가 울어버리거나 화자의 눈에 눈물이 고이며 말이 중단되는 통역 불가능한 순간,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2018년의 현지조사 이후로 이러한 순간을 말로 확보한다는 것, 화자의 말하기만큼이나 청자의 듣기라는 행위가 능동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의 중요함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시민평화법정은 이후에 실제 소송으로도 이어져, 지난 2023년 2월 9일에는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이 원고가 되고 대한민국을 피고로 하여 제기했던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 판결에서 원고가 승소하는 쾌거를 이뤄냈다(서울지방법원 재판부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아홉 번에 걸친 변론과정을 목도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청룡부대 출신 참전군인 R이 학살과 관련된 가해 목격담을 법정에서 증언하던 순간이었다. 폭력은 당하는 존재뿐 아니라 폭력을 수행하는 존재에게도 경험된다. 시민평화법정을 계기로 R을 만나 들어왔던 수많은 말들 중에서 법정이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고 확고한 말들뿐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법정의 언어 즉 증언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던,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이 앙금이 되어 마음 한켠에 가라앉게 되었다.
학살지 마을 곳곳에서 혹은 사실관계를 따져 묻는 법정에서, 피해와 가해의 자리에 놓였던 이들의 전쟁경험을 왕복하는 '분열증적 듣기'의 과정을 통해 베트남전쟁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이에 대한 '사죄'와 '배상', 그리고 '화해'와 '평화'라는 도식으로 말해지고 인식되는 것에 커다란 위화감을 갖게 되었다. 피해생존자의 증언을 듣다가 아파온 마음이나 느닷없이 터지는 눈물은 청자였던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전쟁이 아니면 만날 리 없는 이들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어 죽고 죽이는 관계로 만나고, 그렇게 던져진 위치에서 폭력을 수행한 병사들의 이야기나 그 폭력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해생존자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국민화'를 거절한다는 것의 중요함을 절감했다. 오히려 '국민'이라는 정체성으로 '미안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이상의 사유를 멈추게 하고 전쟁에 대한 다른 상상력의 힘을 박탈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피해와 가해의 자리를 왕복하는 '분열증적 듣기'의 과정은 전쟁에서 경험한 폭력을 해석할 권리를 국가로부터 탈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리영희 다시-읽기, 당대의 실천적 담론지형과의 만남과 어긋남
1997년 10월 20일, '베트남을 생각하는 젊은 문인들의 모임'이 주최한 '제2회 베트남 연대의 밤' 행사의 강연에서 리영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베트남에 먼저 사죄를 하자>, 1999년)
"나는 대한민국이 통일 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한 그해에 <한겨레신문> 논단에 이런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과거를 들추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서 그 원한을 잊지 못한다면, 우리가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이 단계에서 베트남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국가적으로 속죄와 반성과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중략)
특히 그 중에서도, 국가적이고 국민적으로 할 일은 베트남전쟁의 피해자들, 즉 불구자들과 고엽제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길가에 버려진 그 사람들을 치료하는 큰 병원을 대한민국 정부 또는 국민의 이름으로 건설하고, 거기에 의사들이 지원해서 가고, 그렇게 해서 부정적인 베트남전쟁 파병의 역사를 씻는 관계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역이나 경제, 합작회사나 노동력 원조라는 경제적인 돈벌이에 힘을 쏟기보다도, 나는 그런 것을 더 생각합니다."
1990년대 말 베트남전쟁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폭로기사들이 등장하면서, 당시의 초점은 '피해국'의 '피해자들'에 맞춰져 있었다. 리영희 또한 한-베간 국교가 수립된 1992년에 경제적 신식민주의를 방불케 했던 한국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을 비판하거나 미국의 전쟁책임을 추궁하기는 했지만, 병사들의 가해경험에 관련한 구체적인 제안보다는 베트남 현지의 피해생존자들에 대한 의료적 지원 등을 "국가적이고 국민적으로 할 일"로서 적시하였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비평의 지대가 온통 '피해' 언급으로 넘쳐난 것은 폭로 직후의 반응으로서 당연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피해자들을 '국가'라는 집단으로 묶어버릴 때, 가해자들 또한 구체성을 잃고 집단으로 환원되어버린다. 후지이 다케시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국가폭력의 외교 문제화'라고 부른다. 이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일 간의 외교현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일본 정부의 사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논의할 수는 있어도, 거기서 일어난 폭력 자체는 고민하지 않게 된다. 국가폭력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국가 간의 문제로, 외교 문제로 생각해버리는 사고가 팽배해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또한 한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 사이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로 생각해버리면, 국가가 강요한 폭력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자들이, 그 관계를 바꾸는 일조차도 다시 국가에 귀속시키고 마는 상황이 벌어진다. '청룡부대'나 '한국군'이라는 단위로 폭력을 이야기하면, 그 속에는 고유성을 가진 군인들 개개인이 수행한 폭력이 보이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폭력의 주체를 다시금 국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바로 폭력의 효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폭력을 구조화하면서 권력으로 만드는 기제가 있다. 그 기제들 중 하나는 '폭력을 해석할 권리'다". (2018년 3월 3일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열린 후지이 다케시(藤井たけし)의 강연,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 베트남전쟁, 국가 그리고 나>)
전쟁이 끝나고 5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여기에서도 피해국의 피해자들에 대한 고민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참전국으로서의 자각과 베트남전쟁이 지금-여기를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국민' 정체성 너머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요청된다. 지금의 세대가 베트남전쟁에 대한 리영희의 글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지난 시대의 반성과 성찰이 놓친 사유의 지평들, 특히 참전과 가해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당사자성을 확장하여 '국민화'의 폭력을 거절하는 마음으로 베트남전쟁을 새롭고 입체적으로 다시 만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또한 지금의 세대가 베트남전쟁에 대한 당대의 비판의식을 통과하며, 리영희 세대가 살아낸 시공간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이번 승소 판결 자체는 너무나 소중한 결실이지만, 전쟁에서 휘둘러진 여러 층위의 폭력을 분석하려면 '참전'의 주체들을 전방과 후방의 군대뿐 아니라 전쟁을 지탱하여 고통과 이윤을 동시에 양산했던 병참 기능을 한 기업과 파월노동자에게도 확장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더욱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참전'이라는 가해의 자리와 가해자성
"인간은 항상 가해자 속에서 생겨난다. 인간이 스스로를 최종적으로 가해자로 승인하는 장소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기로서 인식하기 시작하는 장소다." - 이시하라 요시로(石原吉郎) –
해(害)를 가했던 것이 반드시 자신이어야만 '가해자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가해자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면, 이 논리부터 뒤집어야 한다. 오히려, 가해자성이 문제되는 것은 자신의 의도나 선택 바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다. 자기도 모르게 했던 혹은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행해진 잘못들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인정하려 드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자기가 발 딛고 서 있는 토대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가해자성을 인식하는 것의 핵심이다.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복잡다단한 관계망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채 가해의 구조에 놓일 수 있다. 때문에 가해자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일은 부단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자기가 놓인 구조를 의심하고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게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행위의 가해성이 인정될 때 가해자는 처음으로 존재하게 된다. 가해자는 애초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가해자성의 인식을 통해 가까스로 부각되는 것이다. 가해자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주체로 서는 일이며, 그래서 존엄의 선언이기도 하다. 누군가 가해자성을 인정하는 순간, 거기에는 이제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물음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물음엔 이제껏 당연시되어온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이 내재되어 있다.
참전군인 인터뷰를 하다 보면 종종 등장하는 말들이 있다. "그때는 다 그랬어", "전쟁은 다 그런 거지",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일견 성찰적이며 역지사지의 공감을 통해 나온 말로 들리기도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라면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폭력을 수행했을 것'이라는 식의 확고한 전제야말로 더 이상의 사유를 멈추게 만든다. '저질러진 폭력'과 '저질러질지도 모르는 폭력' 사이의 협곡은 많은 참전군인들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그 '협곡'에는 무수한 다른 말들과 가능성이 웅성거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피해서사 속에서도 가해자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한 예로 19세기에 창설되어 흑인병사들로만 구성되었던 미국의 기병대 버팔로 솔저(Buffalo Soldiers)는 당시에 인종차별을 당하는 위치에서 시민권 확보를 위해 전략적으로 병역을 이용했는데, 이들은 특히 아메리칸 선주민 학살에 대대적으로 동원되었다. 그렇다면 국립 아프리칸 아메리칸 역사문화박물관에서는 버팔로 솔저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을까? 관련 웹사이트에는 시민권 획득이라는 당대 흑인의 한계적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버팔로 솔저의 전쟁수행이 어떠한 폭력의 구조에 가담하는지 뒤늦게나마 질문을 던지고, 전쟁에 대한 흑인병사의 기여가 동시에 어떻게 미국의 선주민에 대한 억압으로 작동했는지 자각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증언이 되지 못한 말 "무서웠다"
시민평화법정과 실제의 소송에서 가해 목격담을 증언해주었던 R은 베트남전쟁 참전 당시 22세였다. 1967년 10월에 청룡부대로 파병되어 1969년까지 15개월간 참전했고, 1969년 1월에 수류탄으로 부상당한 다리의 치료를 위해 다낭의 미 해군병원에 이송되어 수술을 받은 후, 꾸이년의 미 육군병원을 거쳐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기지 병원으로 이어지는 이송의 과정을 거쳤다. 한국으로 후송되어 진해 해군 의무단에서 마지막 치료를 받고 상이급수를 받아 명예제대를 했다. R은 그렇게 상이군인이 되었다.
1968년 2월 12일, 청룡부대로 불리는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원들은 디엔반현 퐁니·퐁넛 마을에 진입하여 '작전을 수행'했다. 5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마을 주민 74명이 사망했고, 이튿날 유족들은 1번 국도에 주검들을 늘어놓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 다음 날에 내가 첨병을 하러 가잖아. 다음 날, 아침에 동네 하나가 새까매. 이야… 가마니가 양쪽 길옆으로. 가마니에다가 시체들을 양쪽으로 늘어놓은 거여. 사람들이 우리 가는 데로 눈에서 막 섬광이 나와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때같이… 그때같이 무서웠던 적이… 내가 그걸 헤치면서 앞서가야 하니까. 뒤에서 누가 막 칼로 찌르는 것 같아. 누가 어떤 놈이. 그 얼굴들이 막 험악하고 살기가 졌을 거 아냐. 웬수놈들이니까 우리가. 그런데 그때 나도 막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되잖아. 해병대 첨병이. 나도 막 눈에서 불을 뿜으면서, 총으로 막 그러니까… 우리가 10미터 간격으로 한 명씩 걸어간단 말이야. 내가 맨 앞에서 갈 때 얼마나 소름이 끼쳤겠어.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R은 살아남은 자들의 시선 속에서, 즐비한 시신들 사이에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섬뜩한 베트남어 속에서, 한국군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에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유족들의 눈빛은 어떤 치열한 전투보다도 무섭게 자신에게 밀려드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처럼 R은 자기가 혹은 동료들이 수행했던 폭력의 결과로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사람들을 대면하면서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폭력은 당하는 사람뿐 아니라 가하는 사람도 경험하는 것이다.
R의 인터뷰 과정에서 그가 군인으로서의 혹은 남성으로서의 강함을 강조할 때마다, 그 강함을 말할 수밖에 없는 그의 약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약함'이야말로 용감무쌍한 군인상(像)의 주술과 속박에서 그를 벗어나게 할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성의 약함은 지금도 이 사회에서 여전히 부정당하는 하나의 성향이다. 두려움에 맞서는 것을 커다란 명예로 여기는 해병대 첨병 출신 R의 입에서도 "겁이 났다"는 말이 새어나왔다. 55년 전 즐비한 주검들 앞에서 겁이 났던 그 순간, 그의 약함은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의 가해자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껏 이 사회는 가해의 자리에 던져진 자들이 겪었던 폭력 수행의 경험들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귀 기울여 왔을까? 피해의 경험만이 강조되는 역사, 피해사실의 결정적인 증거를 위한 구술 채록의 한계 너머에 청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 피해와 가해 어느 한 쪽으로 점철될 수 없는 삶을 말할 수 있는 발화의 장(場)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사회가 묵인하는 폭력이나 착취에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러한 가정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하고, 폭력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공모(共謀)를 알아차리는 계기들은 어쩌면 이러한 약함을 긍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해(害)를 당하는 존재의 두려움과 해를 가하는 존재의 두려움은 다른 층위에서 그러나 동시에 말해져야 한다. 해를 가하고 말았다는 결과만이 아니라 폭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두려움이 말해질 때, 그 두려움으로부터 수행한 폭력을 의심하고 문제 삼을 수 있게 되고, 어떤 구조에서 어떤 좌표에 놓인 채 그러한 폭력에 가담했는지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이다. 참전군인의 전쟁경험과 이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재발견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지금껏 강요되어온 남성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병역과 군대에 대한 현재적인 문제들과 함께 논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남성들의 히스테리, 전쟁신경증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전쟁이 끝나고 병사들이 마주해야 했던 또 하나의 전장(戰場)으로 불린다. PTSD는 충격적 경험을 한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심리적/신체적 증상의 총체를 말한다.
일본에서도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전면화되면서, 1938년 1월부터 내지(內池) 일본의 육군병원으로 중국에서 발병한 신경증환자들이 이송되어 왔는데, 정신장애로 수용되는 병사의 수는 전선의 확대와 함께 증가하여, 1939년부터는 1000명 가까이 이르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 전쟁신경증은 공무(公務)에서 기인하는 일등증(一等症)과는 구분되어 이등증(二等症)으로 취급되었다. 오늘날처럼 심적 외상의 체험 후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 또한 자신의 내적 갈등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갖지 못했다. 자신이 정신병자로 취급당하는 것을 꺼렸던 병사들도 많았다. 스스로를 낙인찍는 병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일본 군대에서 병사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상처'가 전쟁피해로서 정당한 위치를 점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압도적인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이 보이는 심신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날 트라우마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매우 정세적인 개념으로서의 위상 또한 갖는다. 베트남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귀국 후 겪게 되는 PTSD의 정치사회적 분석은 국내에서는 아직 미흡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참전군인의 전쟁경험을 트라우마 개념에 가두는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 트라우마는 과거와 현재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명확하게 단절될 수 있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건 이전과 이후라는 편리한 시기 구분은 오히려 인간의 내면이 지닌 복합성을 추방하고, 마치 사건 이전에는 손상되지 않은 자아가 있는 것처럼 가정함으로써 전쟁경험을 개인적인 것으로 병리화할 우려가 있다. 트라우마는 사회적인 층위에서, 개별성과 집단성을 가진 이들의 경험으로 말해질 필요가 있다.
[{IMG04}]
참전군인들은 귀신들이 가득한 방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2011년, 전국 5개 보훈병원에서 PTSD 클리닉센터가 개설되어 초기 평가를 통해 환자 적용 여부를 판단하고 약물치료 등을 시행하게 되었다. 중앙보훈병원은 2018년 8월에 보훈의학연구소를 개소하여 고엽제질병, PTSD, 노인성 질환 등에 특화된 연구기반 시설이 마련되었다. 베트남전 참전 이후 PTSD를 겪어온 병사들의 문진과 치료기록은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정부 차원에서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의 PTSD를 집대성한 기초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쟁에서 복귀한 일상 속에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이름을 갖지 못한 채, 긴 시간 동안 '귀신들이 가득한' 방에서 지내야 했던 참전군인들이 있다.
의료적 치료와는 별도로 사회 구성원들이 참전군인과 관계를 맺거나 그들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PTSD의 사회적 치유과정에 대한 통찰은 역설적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외상 생존자들 중에서 정식 치료를 받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의 지혜에서 나온다. 그들은 '정식으로' 치료를 받지 않고도 회복을 위하여 개인의 역량과 공동체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던 지지(支持)관계에 기대어 자기만의 방법을 발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병원을 거치지 않고도 생존한 이들이 어떻게 회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약물과 상담이라는 정신의학적인 치료의 틀을 넘어서는 사회적 치유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의 전쟁신경증에 대한 연구와 활동은 억압하는 쪽에 속하면서도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다룬다는 점에서 항상 정치적이며, 회복은 고립 속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항상 관계적이다. 남성들의 히스테리, 전쟁신경증을 은폐했던 과거의 권력은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말할 수 없었던 경험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병사들의 고통 또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는 참전군인들 자신에게도 잘려나갔던 존엄을 되찾아오는 명예로운 장소가 된다. 가해의 자리에 놓였던 이들의 말하기는 전우회도, 보훈병원의 진료실도, 심리상담 분석실도 아닌 곳에서 지금-여기의 사회 구성원들과의 관계 속에서 말할 수 있는 조건, 들을 준비가 된 청자들과 함께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아정의 관련 글>
1) '페미니즘과 생태적 관점으로 다시-쓰는 '민(民)들의 법정'의 계보-확장된 민(民)들의 목소리와 그 연쇄적 사례를 중심으로' <사이 間SA>(2021, 통권 31호)
2) '가해국 여성들의 피해,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문제화'할 것인가' <문학들>(2021년 통권64호)
3)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 가해자들의 말하기-김효순,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서평' <창작과비평>(2020년 봄 통권87호)
4) '민간인학살 수행 병사들의 PTSD와 가해자들의 말하기-중일전쟁시기 일본군의 병상일지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증언을 중심으로' <문화와 정치>(2020년 제7권 제2호)
5) '피해/가해의 틀을 흔들며 출몰하는 오키나와의 조선인-가해자들의 '말하기', 그 기점으로서의 오키나와' <동아시아 혁명의 밤에 한국학의 현재를 묻다>(2020년, 논형)
6) ''국민화'의 폭력을 거절하는 마음- '난민화'의 메커니즘을 비추는 병역거부와 이행을 다시 생각하며' <난민, 난민화되는 삶>(2020년, 갈무리)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