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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윤 방송'으로 가는 수신료 분리 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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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윤 방송'으로 가는 수신료 분리 징수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영화 <노팅힐>로 유명한 로저 미첼 감독의 유작으로 2022년 개봉된 <웰링턴 공작의 초상>은 1961년 영국에서 일어난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60세의 전직(해직) 택시 기사 캠턴 버튼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된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를 훔친다. 버튼은 자전거 사고로 숨진 딸을 그리워하는 희곡을 끊임없이 쓰고, 저소득층 노인들에 대한 텔레비전 시청료 징수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캠페인에 힘을 쏟으며 산다. 당시 영국 정부는 워털루 전투의 영웅인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가 미국인 수집가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14만 파운드에 그림을 사들여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했다. 정부가 예술품에는 큰돈을 쓰면서 노인과 저소득층 복지에는 무관심한 데 화가 난 버튼은 1961년 3월21일 새벽 내셔널 갤러리 뒷담을 사다리를 타고 넘어 들어가 초상화를 훔쳐낸다. (진범에 대한 반전이 있긴 하다.) 그리고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정부가 자선 사업에 쓸 14만 파운드의 '몸값'을 지불하면 그림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무위로 끝나고 결국 자수해 재판에 넘겨진다. 그런데 버튼의 모습에 매혹된 배심원단은 예상 밖으로 무죄 평결을 내리고, 그는 도난 과정에서 분실된 초상화 액자(80파운드 짜리)를 훔친 죄만 유죄로 인정돼 3개월의 가벼운 징역형을 받는다.

"No BBC, no license." (BBC를 시청하지 않으니 시청료를 낼 의무가 없다.) 텔레비전 시청료 납부를 독촉하기 위해 집을 급습한 단속반원들을 향해 버튼은 이렇게 항변한다. 집 텔레비전 수상기에서 BBC 방송 채널의 전파 수신 회로를 제거했으니 BBC 시청료 부과는 부당하다는 이야기다. 전두환 정권 시절 대한민국 땅에도 똑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KBS를 보지 않기 때문에 시청료도 내지 않겠다." 1984년 전북 가톨릭농민회가 처음으로 이 선언을 한 뒤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은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한국의 시청자들은 버튼처럼 텔레비전 수상기의 기계 회로를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 찬양과 왜곡·편파 보도를 일삼는 KBS에 '마음의 회로'를 닫아버린 것이다.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 정치에 대한 전면적 항거임과 동시에 언론학적 측면에서는 '시청자 주권 운동'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이 국민인 것처럼 방송의 주권은 시청자에게 있다는 것이 시청자 주권 개념이다. 전파는 공공자산이다. 방송사는 전파 소유권을 갖는 게 아니라 이용할 권리를 위임받아 활용할 뿐이며 방송의 주권은 시청자에게 있다.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은 방송의 주인들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낸 사건이다. 시청자 주권 운동은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방송의 지나친 상업화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텔레비전 끄기 운동'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1994년 정부는 한국전력이 수신료를 전기요금에 합산해 통합 징수하도록 법을 바꾸었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수신료 징수 방식은 여야가 공수를 바꿔가며 논란을 이어왔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군사작전 펼치듯이 통합징수를 전격적으로 폐지해버렸다.

언뜻 보면 텔레비전 수신료 통합징수 중단은 '1994년 체제'의 잘못을 바로잡는 정당한 '원상복구' 조처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 눈속임일 뿐이다. '시청자 주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행태부터 이를 입증한다. 수신료 징수 방식을 변경하려면 우선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들의 의견부터 묻는 게 순서다. 그런데 정부는 흔한 공청회 한번 열지 않고 사회적 논의 과정을 깡그리 생략했다. 통상 40일 이상인 입법예고 기간도 10일로 단축했다, 입법예고 기간에 접수된 의견 4746건 가운데 '분리 징수 반대' 의견이 89.2%에 이른다는 것이 방송통신위원회 자체 분석 결과인데도 방통위는 이런 시청자 목소리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명령과 지시뿐이다. 대통령실이 수신료 분리 징수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지 한 달 만에 방통위는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방송의 주권자는 시청자가 아니라 권력자'라는 사고방식은 30년 전이나 똑같다.

방송사를 호주머니 안 공깃돌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검사 출신 대통령이 군인 출신 대통령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 보인다. '날리면' 소동을 비롯해 이 정권이 그동안 보여온 숱한 행태가 이를 웅변한다. 게다가 윤석열 대통령의 극진한 '극우 유튜버 사랑'을 감안하면, 대통령이 원하는 공정 보도 수준이 어떤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땡전 뉴스'에 버금가는 '땡윤 뉴스' 정도가 돼야 비로소 공정 보도로 인정할 태세다. 만약에 이 정권이 KBS의 경영진을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들로 꾸려 '땡윤 방송 체제'를 마련한 상태라면 과연 수신료 분리 징수 환원의 칼을 빼들었을까.

이 정권은 방송 장악을 향한 시동을 본격적으로 걸었다. 공영방송 수신료 분리 징수는 진군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같다. 아들 학폭 논란 등 숱한 결격사유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 시절 언론통제의 주역인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을 방통위 수장에 앉히려는 것도 노련한 방송 장악 '기술자'가 필요해서일 것이다. 수신료 분리 징수는 KBS의 항복을 받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고문 기술'이다. 극우 단체들은 대대적 수신료 납부 거부 운동을 벌여 KBS 경영진을 압박할 것이다. KBS 내부 일부 세력은 안에서 성문을 열어주며 백기항복을 재촉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권이 방송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면 그 뒤에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KBS의 편파·왜곡 방송에 항의하는 또다른 수신료 납부 거부 운동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그때는 이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까. 버튼은 시청료 납부를 거부한 죄로 13일간 구류 처분을 받는다. 이런 광경이 이땅에서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과도한 법 해석으로 인신구속을 남발하는 게 지금 검찰공화국의 실상 아닌가. "시청료 거부 운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라는 전두환 정권 시절의 레퍼토리가 다시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수신료 거부 운동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내적남불'(내가 하면 적법, 남이 하면 불법)의 원칙도 등장할 것이다.

캠턴 버튼은 재판 과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I am you, and you are me!" '내가 당신, 당신이 나'라는 이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빈부 격차, 인종적 편견, 사회적 불평등, 복지의 사각지대 등 영화에 등장하는 주제들도 궁극적으로는 이 말 하나에 수렴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수신료 납부 거부나, 텔레비전 수신료 징수 문제도 이 명제를 화두의 중심에 놓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너와 내가 하나'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공영방송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 수신료가 그런 방송, 나아가 그런 온기 흐르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성찰할 과제다. 그런데 현실의 모습은 정반대다. '너와 나는 별개' 사회를 만들려는 윤석열 정권의 전반적 정책 기조는 공영방송의 미래에도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나는 네 위에 군림할 거야'라는 권력의 오만함만이 무한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서울 서초구 플로팅아일랜드 컨벤션홀에서 열린 청년정책 점검회의에서 발언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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