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인사 파동은 권력 누수의 불길한 징후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지 이제 1년 1개월, 정권 임기가 4년 남았는데 인사 문제가 통제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사실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원 1급 포함 부서장 급 인사 10명을 재가해 놓고, 5일 만에 7명을 스스로 뒤집었다. 그 배경에는 국정원 정치파트를 담당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좌천됐다는 국정원 공채 출신 A씨가 있다. 그는 김규현 국정원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졌다. 즉 김현 국정원장의 측근이 '인사 전횡'을 했고, 이걸 뒤늦게 안 윤 대통령이 재가한 걸 다시 뒤집었다. "이건 국정원장에 대한 불신임을 넘어 대놓고 '너 나가라'는 것"(정보 관계자)이다. 그러나 국정원장은 조용하다. 왜일까?
국정원은 내밀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인사 파동'이 유력 일간지를 장식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심지어 대통령이 직접 인사 번복에 연루돼 있다는 게 버젓이 보도된다. 정권 말이라면 '기강 해이'로 해석하는 게 편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시퍼렇게 날이 살아 있는 정권 초반기다.
몇 가지 해석들이 나오지만 모두 논리적으로 부족하다. A씨는 문재인 정부 때 '적폐청산' 여파로 한직을 돌다 원장의 최측근으로 승진했다. 그가 '문재인 적폐'를 청산하다 '전 정부 충성파'에 의해 고발당했다? 대통령이 직접 A씨의 인사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결이 안 맞는다. 그렇다면 '문재인 척폐 청산'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대통령 측근 기획조정실장 사퇴 당시 대통령이 김규현 원장과 A씨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에 비춰보면 그는 한번 대통령의 재신임을 얻은 것으로 돼 있다. 역시 아귀가 맞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1급 포함 국정원 주요 부서장급 인사를 하는데 대통령실이나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사전 의견 조율 과정이 없었을 리 없다. 없다면 직무 유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재가가 끝난 사안이 다시 뒤집힌 초유의 사태가 난 것은, 중간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비교적 합리적이다. 그 '무엇'은 누구인가, 혹은 어떤 세력인가?
윤석열 정부는 '검찰 정부'다. 이 정부 들어 가장 먼저 이뤄진 일이 인사 시스템을 '검찰 세력'이 통째로 장악한 것이었다. 우선 인사검증 기능을 해 온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없앴다. 민정수석실은 권력기관을 담당하며 국정원 등 권력기관의 인사 등을 조율해 왔다. 대신 윤석열 정부는 법무부 산하에 공직자 인사검증 조직인 인사정보관리단을 신설하고 권한을 집중시켰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인사가 잘못됐을 때) 제가 그냥 오롯이 욕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 말은 법무부의 '인사 시스템 독점 기능'을 보여준 상징적 언사다. 인사 시스템의 핵심은 '인사 검증'이다. '능력' 보다 '흠결'이 인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그 '흠결' 검증을 장악하는 세력이 전체 인사를 장악한다. 권력의 작동 원리다.
인사 시스템을 장악한 검찰 세력은 주요 부처에 그야말로 실핏줄처럼 뻗어 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마치 검찰 세력과 비검찰 세력의 충돌 징후들이 삐져나온 것처럼 보인다.
국정원, 경찰청, 감사원 등은 배타적인 고유의 직분을 수행하는 폐쇄적인 조직이다. 주로 대통령 공약과 같은 정책을 수행하는 부처들이 인사에 있어 비교적 열려 있는 것과 달리, '네거티브'한 일을 주로 담당하는 이런 기관들은 특별한 '인사룰' 같은 견고한 내부 논리가 존재한다. 보통 정권이 바뀔 때, 특히 인사 문제에 있어서 내부적으로 부침을 겪지만, 외부의 입김은 철저히 차단한다. 그래서 이런 권력기관들의 개혁이 어렵다.
이를테면 '특정 성향'의 설왕설래를 걷어내고 나면, A씨는 국정원의 내부 논리를 상징하는 인사다. '터줏대감'이고 '풀뿌리 조직원'이다. 지난해 10월 특수부 검사 출신 '윤석열 사단'으로 분류됐던 조상준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이 임명 4개월만에 사퇴한 일이 있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인 영부인 김건희 전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주가조작 의혹 사건 변호를 맡기도 한 '측근'이었다. 국정원 내부의 첫 인사 파동이었다. 그는 "건강 및 개인적이 사유"라고 밝혔지만, 배경에는 이번 인사 파동 핵심 인물인 A씨가 있었다. 인사 갈등이 '외부인사' 조 전 실장의 사퇴 이유라는 말들이 나왔다. 쉽게 말해 '전 정권 인사'와 '현 정권 인사'가 빚은 갈등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임명한 인사들끼리 충돌이었다. 이번 인사파동도 '국정원 내부 갈등'이라고 보기 어렵다. 국정원 내부 인사를 대통령이 직접 번복했기 때문이다.
경찰청 인사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걸 기억한다. 지난해 6월 경찰청이 치안감 보직 인사안을 공지하고 언론에 배포한 뒤 1시간 20분만에 번복된 초유의 일이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국기 문란"이라고 호통을 쳤다. 경찰은 '사전에 조율을 마쳤다'고 했지만, 내부에선 이미 난리가 났다. 태산명동서일필. 이 '국기 문란' 사건의 책임은 행정안전부 치안정책관(경무관)이 졌다. 잔뜩 위축된 경찰에 윤석열 정부는 검사 출신 정순신 변호사를 국가수사본부장에 내려보내려 했다. 그 뒤는 의도한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감사원 사정도 그렇다. 최근 유병호 감사원 사무처장과 갈등을 빚은 건 검찰 출신 조은석 감사위원이다. 그는 전현희 권익위원장에 대한 감사원 감사보고서가 주심 감사위원인 자신의 결재도 거치지 않고 발표됐다고 폭로하며 유병호 사무총장을 공개비판했다. 이런 조 감사위원을 '문재인 정부 쪽 인사'로 분류한 <조선일보>에 대해서도 그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조 감사위원은 서울고검장 출신으로 안희정, 이광재를 구속했던 사람이다. 감사원 조직의 '잔뼈 굵은 베테랑' 사무처장과 검사 출신 감사위원의 구도가 선명해 보인다.
대체 이 정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툭하면 인사 파동이 불거지고, 곳곳에서 검찰 출신들과 비검찰 '내부자'들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등의 곳곳에 인사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검찰 세력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고 그에 대한 저항의 모습들이 읽힌다. 검찰세력은 그러나 멈추지 않고 있다. 공직자에 대한 강력한 조사 권한을 가진 국민권익위원장 후임에도 윤석열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 BBK 수사 검사 김홍일 전 부산고검장이 거론된다는 보도가 나온다.
대통령의 영이 안 선다.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정부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인사 시스템 권한을 법무부에, 검찰세력에 '몰빵'하며 이미 예견된 일이다. 검찰 세력의 인사 장악, 그리고 비검찰 세력의 저항. 문제는 이게 통제가 전혀 안되면서 시민들에게 생중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컨트롤타워의 부재다. 정부 인시스템을 장악한 '한동훈 법무부 체제'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아마추어다. 검찰 세력이 정치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틈바구니에서 중재도, 통제도 못하고 오락가락한다. 불길한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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