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여름, 남반구가 이미 한겨울로 접어든 8월 초쯤 호주로 여행을 갔다. 낯선 곳을 기웃거리며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엿보는 재미가 여행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즐거움 중 하나다. 그러나 당시 여행에선 호주의 젊은 교민으로부터 듣게 된 호주 사회의 두 가지 이야기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같은 인간들의 삶이 이렇게 낯선 인식과 제도로 흘러갈 수도 있구나 하는 점에서 그랬다.
아이들은 세심한 돌봄으로, 어른들은 국가 운영의 감시자로
일찌감치 시작된 인구절벽 위험신호에도 꿈쩍 않던 사회에 살고 있는 내게 호주 정부가 어린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낯선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느 가정에서든 아이가 출생하면 우선 정부에서 간호사를 파견한다. 해당 가정이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인지부터 세심히 살피기 위해서란다. 환경이 미흡할 때 어떻게 지원하는지는 듣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었다. 유아기의 각종 예방접종도 무료로 지원되지만 중요한 접종의 경우 부모들에게 위로금까지 주는 세심함도 정부의 몫이라고 했다. 접종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세심한 배려일 것이다.
두 번째 낯선 충격은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방문했던 그 2주 동안, 호주 사회는 총리가 지출한 판공비 문제로 시끄러웠다. 판공비 내역 중 200만 원 정도가 공적 지출이 맞는지를 두고 국회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던 것이다. '아, 그 정도로 나라 운영이 깨끗하게 돌아가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다음이 문제였다. '할일이 굉장히 많을 텐데 그 정도 가지고?'라는 타협의지가 내 안에서 발동한 것이다. 늘 민생을 떠들어대면서 산더미처럼 쌓인 '정쟁현안'들로 서로에게 시위만 하는 듯한 우리나라 국회 풍경을 떠올리는 순간, 200만 원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내 자신이 국가 운영의 문제를 얼마나 안이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그들을 통해 곧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국가운영이 우리사회, 우리나라 국회처럼 복잡하고도 경쟁적인 대결구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깊고 본질적인 고민의 시간이었다. 가령 호주처럼 대통령 판공비가 엄격한 기준으로 완전히 양성화되고, 근무 외의 시간엔 관용차나 수행비서조차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무난히 지켜지는 사회라면? 그렇다면 국회 활동이 그렇게 복잡해질 이유도 없다. 불필요한 논쟁은 국민들 삶에 집중하는 충분한 시간, 꼼꼼한 업무 수행으로 대체될 것이다.
소모적인 정치로 방치되는 민생
호주사회가 그렇듯이 우리 국회가 내놓고 있는 주요 법안들과 활동들도 우리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국회는 행정의 허점을 보완하거나 국민 삶을 위한 본연의 활동에 매진하는 대신 주로 상대의 부정과 탈선을 부각시키는데 시간을 소진하고 있다. 국정감사, 예산감사 역시 상대를 부정하고 제압하려는 권력 싸움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소모적인 구조에서 행정은 구멍이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곧 사회의 불행한 사고들로 이어진다. 청년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부동산 전세 사기는 정말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었을까. 한 사람이 천 채의 빌라를 소유했고 그 정보들이 차근차근 등기소와 국세청으로 들어갔지만 이를 이상히 여긴 공무원이 없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이를 감지할 시스템조차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치솟는 대출 금리에 깡통전세를 우려했던 경고들은 많았다. 특히 불안정한 ‘영끌족’에 대한 우려가 잇따랐지만 정부는 언제 어떻게 사고가 터질지 예상도 준비도 없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조차 정부는 '개인 간 거래를 정부가 어쩌겠냐'는 발뺌과 이전 정부 성토로 시간을 보내다 거센 비판을 받았다.
간호법, 양곡관리법, 노란봉투법은 어떤가. 국민을 억압해 온 관행과 잘못된 법체계를 개선하는 일을 정부는 제대로 된 논의나 설명도 없이 번번이 거세시키고 있다. 무차별적 손배·가압류로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는 사고가 발생해도 그저 남의 일로 인식한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숫자가 OECD 최하위권인데다, 소아청소년과 지원자는 점점 줄어 소아청소년 의료체계가 무너질 위기인데도 손 놓고 있는 나라. 이처럼 인명경시 풍조가 만연한 나라에서 인구절벽을 한탄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난센스인가.
노동착취, 인명경시 풍조에서 돌봄 노동의 위치는?
인간에게 게으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설파했던 프랑스의 사회주의운동가 '폴 라파르그'와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일찌감치 4시간 노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각각 140년과 90년 전의 일이지만, 이들은 그 시대의 기술로도 임금저하나 실업의 동반 없이 하루 4시간 노동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라파르그는 저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새물결, 조현준 역)에서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들은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라는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탄했다.
140년 전 라파르그가 지금의 한국 상황을 어찌 이렇게 정확히 예견한 것일까? 공포로 인식할 정도의 급격한 인구감소 현상이 우리의 경제활동 구조는 물론이고, 교육, 행정, 노동, 국방 등 나라의 모든 구조를 흔들고 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서울시장이 내놓은 출산·육아정책이란 무엇인가. 라파르그가 우려했던 '다음세대 생명력까지 소진시키고 있는 노동'을 어떻게 재배치해 육아의 질을 개선해갈 것인지 고민해야할 이 시기에, 이주노동이라는 '새로운 열정의 값싼 노동'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니 말문이 막힌다. 인간에 대한 존중, 출생에 대한 세심한 배려로도 어찌 해볼 수 없는 심각한 이 상황이 오 시장에게는 그리도 쉬워 보였을까.
값싼 이주노동에 대한 우려도 우려지만, 세심하고도 민감한 유아기 돌봄의 문제를 그렇게 아무런 토론도, 준비도 없이 한방에 해결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리둥절할 뿐이다. 사육 동물들의 생존율을 개선한답시고 사육환경 개선 대신 항생제 투여량을 늘려온 무자비한 방식과 뭐가 다른가. 무감각한 인권의식은 굳이 말할 것도 없겠다. 결국 그 값싼 노동조차 고갈되는 날이 오면, 그 다음엔 무엇으로 육아문제를 해결할 생각인지 묻고 싶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돌봄 노동이란 쉽게 대체할 성질의 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정서적 안정감과 여유가 무엇보다 필요한 노동이거니와 유아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학습하게 될 가치들도 그 돌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아이 한 명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겠는가. 그 정도로 다양한 조건과 역할들이 육아에 필요하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의 책임만으로 마을 전체의 역할을 감당케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어떤가. 부모가 아이를 전담하다시피 키운다. 그렇다.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키워야 할 아이를 부모가 독박육아로 감당하고 있다. 그 부담감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심리적 압박과 불안감이 쌓여 종종 사회문제로 드러나곤 한다.
이런 '고립 육아'의 이면에는 우리사회가 만능으로 여기는,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노동착취가 있다. 경쟁만능의 가치는 노동과 긴밀히 연결된 육아시간조차 착취의 대상으로 만든다. 자본주의는 본래 육아와 노동을 분리하며 성장한 제도이다. 따라서 국가가 육아의 일정부분을 감당해내지 못하면 육아는 그대로 자본의 논리에 내맡겨진다. 육아 정책을 제대로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한 초기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제 소위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을 단 우리정부의 노동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노동을 적대시하고, 배려와 대화 대신 무시와 고립으로 약자들의 노동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약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69시간 노동이라는 진부한 정책도 다시 꺼내들었다. 노동을 갈아 넣어 성장했던 60~70년대 산업화 초기의 인식을 다시 소환해 자유라는 수사로 포장하고는, '노동자를 맘껏 부리고 싶다'는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장하준 교수도 말했듯이 그 '자유'란 인간이 만든 사회구조 내에서 이뤄진다. 인간은 공동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사회기반에 의존해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크게는 국가라는 테두리가, 그리고 그 국가를 지켜낼 국방, 행정, 치안. 교육. 복지 등 각종 제도들이 그래서 존재한다. 스스로 만든 기반이지만 목적에 부합하지 않게 되면 끊임없이 수정하고 고쳐서 써야한다. 하물며 장시간 노동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갖지 못한 그들의 자유는 누가 지켜줄 수 있는가.
장하준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제수준, 기술수준에서 필요한 것은 '노동량'의 유연화가 아니라 '노동의 질'의 유연화라며 정부가 시도하는 장시간 노동정책을 비판한다. 이제 세계는 노동의 양에 승부를 걸었던 과거로 퇴보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에 와 있다. 기술 우위의 나라들처럼 복잡해지는 새로운 기술을 익혀 재고용되도록 지원할 수 있는 '노동의 질'의 유연화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산업구조라는 것이다.
고립 육아로 발생하는 갖가지 사회문제, 사회적 공동 육아로 풀어야
채널A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다. 아마도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그램을 보면 마을로부터 국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 얼마나 다양한 문제들로 고통 받고 있는지 생생한 사례들을 만나게 된다. 그 부모들이 의지할 곳이 국가가 아닌 TV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긴 하지만 그래도 도움을 청할 곳, 들을 곳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이들을 위해 비록 마을 전체가 나서진 못하더라도, 안전한 육아환경이 되도록 사회적 노력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마을 공동체를 핵가족으로 대체해온 자본주의는 육아의 공백을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춘 기관에 맡기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그런 육아방식의 부작용을 경험해왔던 많은 국가들은 이제 부모들이 평등하고 안정된 노동환경 속에서 아이들과 충분한 정서적 교감을 가질 수 있도록 육아방식을 개선해가고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3세 미만의 자녀를 둔 부모에게 재택근무를 실시하는 등 안정된 육아정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 육아휴직 장려, 보다 유연한 육아기 단시간 근로의 운영, 퇴근시간 준수 운동 등이 있다. 우선적으로 손보아야 할 정책들은 놔둔 채 돌봄 노동의 단가나 낮추려는 손쉬운 카드를 꺼내들고 있어 안타깝다. 개인들 행복이 곧 인구 문제와 연결된다고 인식하는 나라들과 달리, 인구문제를 아직도 경제적 문제, 나라의 존속 문제로만 이해하는 우리정부다운 해법이다. 이처럼 육아문제를 거칠고 단순한 방식으로 접근하고도 출생률 향상을 기대한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낳아서 버려지고, 멀리 타국으로 보내지는 어린 아이들, 종종 드러나는 보육원의 폭력적 실태. 미혼모에 대한 멸시와 차별. 버려지고 방치된 어린 목숨들이 하루가 멀다고 뉴스로 등장해도 근본적 해결보다 그 부모들에 대한 비난과 원망, 분노감 표출로 끝나는 사회. 정부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평가하지 않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문하지 않는 사회. 그래서 결국 이 모든 현상들이 그저 가난한 개인의 책임일 뿐이라는 사회. 아이도 부모들도 지금의 현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 것을 강요하는 한국사회.
우리 앞의 인구문제는 이처럼 존중받지 못하는 부모와 아이들을 공동의 책임으로 인식하고 그 숫자를 줄여가겠다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자 러셀은 "사람은 게으를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지고, 장난도 치고 싶어지고, 스스로 선택한 건설적이고 만족스런 활동들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놀 수 있는 기회들이 아동교육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는 불쾌하고 파괴적인 아이로 성장하며 자기 인생에서 보다 깊고 폭넓은 목적들을 이해하는 능력까지 빼앗기게 된다고 말한다(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송은경 역). 이제 우리도 노동에 대한 절대적 믿음 대신 여가, 게으름, 그리고 그런 여유 속에서 자랄 아이들을 그려볼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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