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가 성별정정을 신청했을 때, 그 허가 요건으로 성기 제거 등 외과적 수술을 요구하는 것은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이 나왔다.
인권위는 일부 재판부가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에서 신청자의 외과적 성전환수술 여부를 판단기준으로 삼는 관행이 "자기 운명 결정권 및 성적 자기결정권 등에 중대한 침해를 초래하는 행위"라고 25일 밝혔다.
법원 성별정정사무처리지침 제6조는 법원이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을 다룰 때 신청자가 "성전환수술을 받아 외부성기를 포함한 신체외관이 반대의 성으로 바뀌었는지 여부"를 조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 2020년 대법원은 해당 조항을 '조사사항'이 아닌 '참고사항'으로만 적용하도록 개정했는데, 일부 재판부는 여전히 성전환 수술 여부를 성별정정 허가 판단의 주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어 인권침해 논란을 불러왔다. (관련기사 ☞ 법원, 성전환수술 없이도 '성별정정' 가능 판결)
이에 인권단체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소속 진정인 A 씨와 트랜스젠더 피해당사자 B 씨는 지난해 "성별정정사무처리지침 제6조가 참고사항임에도 일부 재판부는 이를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에서 허가 여부의 판단기준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 때문에 성별정정을 원하는 당사자들이 "원치 않은 성전환수술이나 생식능력 제거 수술 등 비가역적인 수술을 받게"된다며 이는 "신체 온전성의 자유,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 등을 침해한다"고 인권위 측에 주장했다.
이날 인권위는 이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지침 제6조를 성별정정 허가 여부의 판단기준으로 적용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신체의 온전성에 대한 권리, 자기 운명 결정권 및 성적 자기결정권 등에 중대한 침해를 초래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또한 인권위는 "성별정정을 위한 수술은 트랜스젠더의 권리와 신체에 부과되는 위험이나 피해 정도에 비해, 그로부터 얻는 신분제도의 안정이라는 사회적 이익이나 공익 실현이 크지 않아 비례성 원칙에도 반한다"고 봤다.
인권위는 "이미 호르몬요법 같은 의료적 차선 수단이 있음"을 지적하며 "개별 상황을 평가하지 않고 외과적 처치를 정정요건으로 삼는 것"은 "침해 최소의 원칙에도 반하는 조치"라고도 했다.
실제로 유엔(UN) 세계인권선언 등 국제인권규범에선 지난 2010년을 전후로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위해 성전환수술을 포함한 외과적 수술을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조치"라며 관련 지침 등의 삭제를 각국에 권고해왔다.
국내에선 대법원이 2022년 11월 전원합의체 결정을 통해 "성전환자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른 성을 진정한 성으로 법적 확인을 받을 권리를 가지며, 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에서 유래하는 근본적인 권리로서 행복추구권의 본질을 이루므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에 이날 인권위는 대법원장과 국회의장에게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재판에서 신청인에 대한 인격권 침해 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 지침을 제정할 것 △성전환자의 성별정정과 관련한 요건, 절차, 방법 등을 규정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각각 권고했다.
한편 유럽 등 해외에선 성별정정의 조건으로 성기 제거 및 부착 수술 등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추세로 자리 잡고 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지난 2017년 "본인이 원치 않는 불임수술(생식능력제거수술)을 성별 변경의 조건으로 명시하는 건 유럽인권협약을 위반하는 것"이라 판시한 바 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그에 앞선 2011년 생식능력 제거 등의 성전환수술을 성별정정의 요건으로 하는 법을 위헌이라 판단했고, 지난해와 올해엔 스페인과 핀란드에서 각각 비슷한 취지의 법안이 통과됐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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