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조사 성별 기입란에 내 성(性)이 없다면?'
국가승인통계조사 및 실태조사에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반영해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적이 나왔다.
26일 인권위는 통계청 등 통계·실태조사 기관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존재를 파악하고 관련 조사항목을 신설할 것'을 지난해 3월 권고했다고 밝혔다. 성소수자 인구규모와 인권실태 등을 파악해 "성소수자가 정부의 정책 대상으로 가시화 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다만 보건복지부·행정안전부·여성가족부·통계청 등 관련 기관들은 인권위 권고에 사실상 불수용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인권위는 "깊은 유감"을 표했다.
인권위의 이번 권고엔 "트랜스젠더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에도 각 중앙행정기관과 통계작성지정기관에서 실시하는 국가승인통계조사 및 실태조사에서는 트랜스젠더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정부 내 기관들은 통계청이 5년마다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를 각종 조사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해당 조사의 성별 항목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존재한다. 생물학적 성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 이외의 성별 정체성을 별도로 조사하지 않기 때문에,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들은 통계상에서 확인되지 못한다.
인권위는 "이로 인해 트랜스젠더는 정부의 정책대상으로 고려되지 않거나 사실상 배제되는 결과"가 만들어졌다며 "트랜스젠더를 정책대상으로 가시화하기 위하여 '성별 정체성' 조사항목을 신설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인권위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여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의 정보를 어떻게 질문하고 수집할지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봤다.
실제로 통계청은 인권위 권고에 대해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는 조사항목에 대한 응답 거부가 증가하고 있어, 사회적 합의·현장조사 가능성·조사 불응 등을 고려하여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회신했다.
이에 인권위는 캐나다 등 해외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인권침해 소지가 없는 방식으로 조사문항이나 질문내용을 구성하는 등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캐나다, 아르헨티나, 영국 등 해외국가들은 국가승인 조사 항목에 지정성별, 젠더 항목, 성별 정체성 등을 포함해 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캐나다 연방통계청은 지난 2021년부터 인구총조사에 출생 시의 생물학적 성별인 '지정 성별'과 그와 무관한 '성별 정체성'을 포괄하고 있다. 같은 해부터 영국의 인구총조사에도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묻는 문항이 포함됐다.
반면 한국의 경우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를 비롯해 보건복지부 국민보건의료실태조사, 여성가족부 가족실태조사 등에서도 트랜스젠더 관련 항목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인권단체들은 이러한 '조사에서의 배제'가 군대, 의료, 주거, 문화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성소수자 차별로 이어진다고 지적해왔다.
이에 더해 인권위는 "통계청이 관리하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를 조속히 개정하여 성전환증을 정신장애 분류에서 삭제할 것"을 통계청장에게 권고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019년부터 국제질병분류(ICD) 제11판 상의 '정신 및 행동 장애' 범주에서 성전환증, 성주체성 장애 등을 삭제한 바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현행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에서 성전환증을 '정신 및 행동 장애' 범주의 하나인 '성인 인격 및 행동의 장애(중분류)' 하위의 '성주체성 장애'로 분류하고 있다.
권고를 받은 통계청장은 "국제질병분류(ICD) 제11판의 (국내) 반영 시 검토하겠다"라면서도 2026년부터 적용되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제9차 개정의 고시에는 (권고) 반영이 어렵다"고 회신했다.
이날 인권위는 "(통계청장 등이) 인권위 권고를 불수용한 데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한다"라며 "국가의 각종 정책에서 사회적 소수 집단이 배제되는 등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해당 집단의 규모와 요구를 파악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다시 강조한다"라고 밝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