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준칙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유럽연합 소속 국가들을 중심으로 1990년대 들어 신자유주의의 영향 하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 지향이 정당화될 수 없는 시대, 어느 때보다도 국가의 역할이 중요해진 대전환의 시대이다. 그런데 기획재정부와 보수여당은 세계 각국에서 부작용 때문에 중단되었던 재정준칙을 기어코 법제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혹세무민이다. 고정된 수치의 재정준칙은 불확실성이 큰 현실에서 더는 온전히 작동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이미 판명되지 않았는가. 왜 진실을 외면하는가. 기재부는 어떻게 재정준칙을 도입하면 국제신용평가사가 정하는 국가신용등급이 올라갈 것처럼 선전할 수 있는가. 국제신용평가사들한테서 그런 약속을 받기라도 했단 말인가. 재정준칙을 도입하면 국고채도 세계국채지수에 편입될 것이라고 또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금융자산가 아니면 반길 일도 별로 없을 그런 막연한 기대 효과를 앞세우면서 정작 눈앞에서 서민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를 도외시해서야 되겠는가. 혹시 재정준칙을 만들어야 기재부가 예산에 대한 관료적 통제권을 더 강하게 틀어쥘 수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닌가.
기재부는 14일 설명 자료를 통해 준칙 도입 국가 대부분이 실제로는 준칙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사실이 아니며 독일은 2011년 준칙 강화 이후 매년 준칙을 준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각국의 국내법 외에 '유럽연합운영조약(TFEU)'과 '재정협약'에 따라 국가채무비율 상한 60%와 재정적자비율 상한 3%를 내용으로 하는 유럽연합 국가들에 공통된 재정준칙은 어떤가. 그 기준이 그동안 독일에서 정말로 지켜졌는가?
유럽연합 재정준칙은 2011년이 아니라 1993년에 발효되었다. 그런데 독일의 재정수지를 몇 해만 찾아보면 1995년 적자 9.4%, 1996년 적자 3.6%, 2002년 적자 3.9%, 2003년 적자 3.7%, 2004년과 2005년 적자 3.3%였다. 2003년과 그 이후 독일의 국가채무비율은 순서대로 이렇다. 63.5%, 65.2%, 67.5%, 66.9%, 64.2%, 65.7%, 73.2%, 82.0%, 79.4%, 80.7%. 그 이후 값들도 더 열거해야 할까? 이 숫자들을 보더라도 유럽연합 60%, 3% 준칙이 정말 매년 준수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독일이 국내법상 준칙을 준수하고 있다면서 기재부가 제시한 그림은 구조적 재정수지를 반영하고 있다. 구조적 재정수지는 본래 재정수지 실적치 자체는 아니며 경기변동의 영향을 제거하는 가공의 과정을 거쳐 재정정책의 기조(스탠스)를 살펴보는 데 활용되는 개념이다. 그림만 보면 독일의 2010년대 재정은 건전하게 운영되었다. 그런데 만약 재정준칙이 어떤 나라에나 도움이 된다면, 같은 시기 남유럽 국가들도 독일처럼 재정상황이 나아졌을까? 물론 아니다. 왜 똑같은 유럽연합 재정준칙이 도입되었는데도 남유럽 국가들에서는 그런 좋은 일이 안 일어났을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기실 독일에서도 재정준칙 덕에 재정상황이 나아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2010년대가 독일경제의 호황기였다. 경제여건이 개선된 덕에 재정상황도 호전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기재부는 유럽 내 경제여건이 유독 좋았던 일부 수출국만 골라서 예로 제시한다. 다른 나라들도 다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기재부가 자신들 유리한 것만 선택적으로 보여주면 국민들은 그냥 믿어야 하는가?
기재부는 또 재정준칙을 도입하더라도 취약계층 지원 등 복지지출이 제약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다시 유럽의 복지 선진국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한국과 조세부담률 차이가 너무나 크지 않은가? 세금을 많이 걷으니 재정준칙을 도입하더라도 복지지출을 많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나라들이 우리보다 복지지출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원인이 우리는 재정준칙이 없고 그 나라들은 재정준칙이 있어서인가? 아니지 않은가. 기재부가 이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억지 주장을 해도 국민들은 그냥 믿어야 하는가?
올해 1분기 국세 수입이 작년보다 24조 원 줄어 관리재정수지가 54조 원 적자라고 한다. 작년에 117조 원으로 연간 최대 재정적자를 봤는데, 하필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건전재정을 중시한다는 이 정부 들어 신기록이 연거푸 경신될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보도에 따르면 출범 1년 만에 미국 무기만 18조7000억 원 넘게 구매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쓴 2조5000억 원의 7배가 넘는 돈을 1년 만에 썼다고 한다. 이제 그런 상황에서 재정준칙까지 도입하겠다면, 그래서 꼭 관리재정수지 적자 3% 상한을 지켜야 하겠다면, 그것은 다른 지출은 앞으로는 더 줄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서민 복지나 민생 예산부터 더 줄이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에 세수 결손이 이리도 크게 나타난 마당에 재정준칙이라니, 도대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최근 나라살림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기재부와 보수여당이 법제화하려는 재정준칙은 당장 올해부터도 지키기 어렵다고 한다. 한마디로 현실 감각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딴 목적이 있으니 밀어붙이는 것이다.
재정을 더 건전하게 만들고 그러면서 복지도 더 확대할 수 있는 길이 우리한테도 없지 않다. 우리도 유럽의 복지 선진국들처럼 제대로 부자 증세하고 보편적 누진 증세하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그러니 말씀드린다. 이 정부가 진심으로 국가 재정을 걱정한다면 기왕의 부자 감세부터, 재벌 감세부터 철회해야 순리에 맞다. 미국 무기 도입부터 줄여야 옳다. 재벌들에게 흘러가는 눈먼 예산부터 줄여야 한다. 보유세 등 자산 과세 정상화부터 서두르자. 부자 증세부터 시작해 충분히 증세하고 복지지출도 늘리자. 제대로 증세하자. 증세를 못 하겠다면 재정준칙, 절대로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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