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97강은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숭상하고 학문이 왕성한 곳)의 <안동고을>로 갑니다.
경북 안동의 문화유적은 유교문화권과 불교문화권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유적이 무척 많아서 한 번에 다 돌아보기는 어려워 두 번에 걸쳐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번 제97강은 안동의 유교문화권을 둘러보려고 합니다. 안동의 유교문화 유적도 무척 많은데 이번 답사에서는 퇴계 이황과 그의 출중한 두 제자인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유적을 중심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97강은 2023년 5월 21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부처님오신날 주말을 피해 셋째 일요일 진행하니 양지바랍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97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부용대(화천서원/옥연정사/부용대정상)-하회마을(북촌댁/원지정사/삼신당신목/양진당/충효당/영모각/만송정숲)-병산서원-학봉종택-임천서원-의성김씨종택-호계서원-도산서원-퇴계종택-퇴계태실-온계종택(삼백당)-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에 점심식사 겸 뒤풀이가 있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7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안동은 행주형 형국으로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합니다.
안동(安東)의 지형은 인물을 가득 싣고 막 출발하려는 행주형(行舟形) 형국으로, 이런 땅에는 인물과 재화가 풍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형 지세가 키, 돛대, 배말뚝, 뱃사공, 뱃머리 등 배의 순항에 필요한 여러 시설을 갖추어야 합니다. 만약 이들 시설들을 갖추지 못하면 이 배는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뒤집히거나 떠내려갈 우려가 있습니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은 안동에 이르러 동에서 서로 방향을 바꾸며 흘러가기에 안동의 동, 남, 서쪽을 감싸 안으며 흘러가게 됩니다. 세 면이 강에 맞닿아 있으므로 풍수의 핵심인 장풍득수에서 득수(得水)는 충족되나 수구(水口)의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수구란 마을 앞의 물이 흘러나가는 출구나 마을 앞에 개방된 공간을 말하는데 물이, 흘러들어 오는 것은 보여도 좋으나 흘러나가는 곳, 즉 수구가 보이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주 형국은 득수의 이점과 수구의 불리함을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행주형 형국의 문제를 해결할 비보풍수로 조산, 임수, 사찰, 불탑, 부도 등이 동원됩니다.
조산(造山)은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으로, 정확히 말하면 산으로 인식되는 돌 내지 흙무더기입니다. 풍수지리적 입장에서 공허하고 취약한 지점에 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을 보충,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된 것이 조산입니다. <영가지> 산천 조에는 11개 지역에 22개의 조산이 등장하는데 일직과 풍산의 조산 7개를 제외하면 9개 지역 15개의 조산이 읍내에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존당 조산은 행주 형국의 대응책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행주 형국은 그 배를 매어 둘 말뚝 혹은 그에 버금가는 상징물이 필요한데, 존당 조산이 배를 정박시키는 말뚝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임수(林藪)는 ‘마을 숲’으로 풍수지리적 기능은 수구막이입니다. 1608년(선조 41)에 편찬된 안동부(지금의 안동시) 읍지 <영가지(永嘉誌)> 임수 조에 모두 22개의 임수가 소개되고 있으며 읍내에 있는 임수 가운데 행주 형국에 대응하기 위해 조성된 것은 법흥사림과 백연림입니다. 읍내는 아니지만 인근 지역에는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임수가 아직 남아 있는데 임하면 천전리의 개호 송과 내앞 숲, 풍산읍 마애리의 마래 숲, 풍천면 하회리의 만송정 숲 등이 그것입니다. 낙동강의 본류 혹은 지류 변에 있는 이들 ‘마을 숲’은 한결같이 마을의 서북쪽에 있습니다.
<도선을용경(道詵乙用經)>에는 사찰, 탑, 부도 등을 건립하는 것은 거꾸로 가는 지세를 바로 하고, 공결한 땅을 채우며, 험악한 기운을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특히 ‘대 비보’로 기록되어 있는 법흥사 전탑, 법림사 전탑, 임하사 전탑, 부천 석탑 등은 각기 읍성을 중심으로 네 방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천 석탑을 제외한 나머지 세 탑은 낙동강이 읍의 동편에서 서편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아무런 방어가 없이 열려 있는 남쪽에 일직선으로 탑을 세워 읍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예컨대 법흥사 전탑은 낙동강의 본류와 지류인 반변천이 만나는 곳에, 임하사 전탑은 물이 읍을 빠져나가는 수구에 있습니다.
안동의 지형은 백두대간의 양백지간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에 기대고 있습니다.
안동은 산줄기는 태백산과 소백산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동북쪽으로 비교적 험준한 산줄기로 이어져 오고, 서남쪽으로는 상대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만들어서 큰 산은 없어도 중소 규모의 산들이 조밀하게 이어져 있어 평지가 거의 없습니다. 산은, 대체로 700~800m 안팎의 산으로는 학가산 동남쪽의 황학산, 연점산, 갈라산 등이 있고, 500m 안팎의 산으로는 서후면의 천등산, 녹전면의 봉수산, 임동면의 아기산 등이 있습니다.
안동의 물줄기는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본류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다가 안동에 이르러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합류하여 방향을 서쪽으로 틀면서 본격적인 흐름을 시작합니다. 낙동강은 심한 사행천으로 나뭇가지 모양의 침식곡을 이루고 있어서 좁고 길며, 예로부터 내륙 수운의 요지로서 풍산과 안동 등지에 선착장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낙동강과 합류하는 반변천은 길이 116.1㎞의 큰 지류로, 낙동강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갑니다.
안동은 하천이 발달한 편임에도 평야가 발달하지 못하여 ‘풍산 들’ 이외에는 그리 넓은 농경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지형상의 특징 때문에 대규모 주거 지역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하천 합류 지점이나 강기슭의 소규모 농경지를 중심으로 소규모 마을들이 형성되어 오랫동안 큰 변화 없이 각각의 전통을 만들면서 수백 년을 내려왔습니다.
많은 동성 마을들이 형성되고, 그 마을들을 중심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특성들이 전해 내려오는 것은 이 같은 지형상의 특징이 인문학상의 특징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랜 침식 작용으로 강기슭에 단애가 발달하여 하회의 부용대와 마애리의 마애 절벽 등 뛰어난 경관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경북 북부 중앙에 있으며 동쪽으로 영양과 청송, 서쪽으로 예천, 남쪽으로 의성, 북쪽으로 영주, 봉화와 이웃하고 있습니다.
안동은 홍건적 난 때 공민왕을 충성으로 받들어 대도호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안동은 남북국시대 때는 고타야군이라 하였는데 고구려와 이웃하고 있어 한때는 고구려에 속하여 굴화현으로도 불렸습니다. 757년(경덕왕 16) 군현제도의 개혁으로 고창군으로 개칭되었다가 일계군, 지평군, 화산군, 고령군, 고장군, 석릉군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병산에서 싸울 때, 고을 성주인 김선평, 장길, 권행 등이 왕건을 도운 공이 컸으므로 안동부로 승격하였고 995년(성종 14) 길주, 1197년(명종 27) 안동도호부, 1204년(신종 7) 안동대도호부, 1308년(충렬왕 34) 복주목로 바뀌었습니다. 1361년(공민왕 10)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머무를 때 고을 백성이 충성을 다해 왕을 받들었으므로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하여 인근 17개 군현을 관할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안동현과 안동 대도호부로 부침을 거듭하다가 1895년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경상북도 동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안동부가 되었고, 1896년 13도로 개편 때에는 안동군이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예안군을 병합 19면으로 개편되었고, 1931년 안동면을 안동읍으로 승격하면서 일부 면을 통폐합하여 1읍 15면 218동으로 개편되었습니다.
1963년 안동읍이 안동시로 승격하면서 안동군은 15면이 되었고, 1973년 풍산면이 풍산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월곡면이 폐지되었고, 1995년에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었으며 1997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3개 동이 폐지되어 1읍 13면 10동이 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서애 류성룡의 유적은 하회마을, 부용대, 병산서원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용대(芙蓉臺)는 정상에서 하회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이 64m의 절벽입니다. 부용대라는 이름은 중국 고사에서 따왔는데 부용은 연꽃을 뜻하며 하회마을이 들어선 모습이 연꽃 같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하회마을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부용대라 부릅니다. 처음에는 ‘하회 북쪽에 있는 언덕’이란 뜻에서 ‘북애(北崖)’라 불렸습니다.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옥연정사, 겸암정사, 화천서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천서원(花川書院)은 겸암 류운룡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류운룡이 세상을 떠난 185년 만인 1786년(정조 10)에 건립하였습니다. 1803년(순조 3)에는 제자인 김윤안과 종손자인 류원지를 배향하였으며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강당과 주사만 남기고 훼철되었다가 1996년 복설되었습니다. 경내에는 사당인 경덕사, 강당인 숭교당, 동재 존현재, 서재 흥학재 문루인 지산루, 원문인 유도문, 주사, 전사청이 있습니다. 강당과 주사를 제외한 건물들은 1996년 복설한 것으로, 강당에서 19세기 이전 양식을 부분적으로 찾아볼 수는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건축적인 측면보다는 옥연정사와 함께 학문적 장소성이 강한 건축물입니다.
겸암정사(謙巖精舍)는 겸암이 1567년(명종 22)에 세우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곳입니다. 부용대의 서쪽 강의 흐름이 크게 감돌아 굽이치는 절벽, 화천 상류에 남향으로 자리 잡아 세워진 집으로 하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중 하나입니다. 터가 우묵하니 좁고 정사 앞 큰 나무들에 가려져 마을 쪽에서는 낙엽 진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는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정사 쪽에서 보면 맞은편 백사장과 만송정의 솔숲, 마을의 여러 집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경내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으며 안채는 홑집으로 'ㄱ'자형이며, 사랑채인 정사는 겹집 형태의 일(一)자형으로 앞 퇴를 다락집 형으로 한 것이 특색입니다. ‘謙巖亭’ 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친필입니다.
옥연정사(玉淵精舍)는 하회마을을 끼고 흐르는 화천(花川) 건너편 부용대의 우측 아래쪽에 동남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1586년(선조 19) 류성룡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탄홍의 도움을 받아 지었습니다. 서애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던 곳이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옥연정사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습니다.
건물은 오른쪽으로부터 대문채, 안채, 별당채, 사랑채가 차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문채는 ‘ㅡ’자형으로 좌측에서 두 번째 칸에 대문이 나 있습니다. 안채는 겹집으로 부엌을 가운데 두고 남측에는 온돌방 둘을 좌우로 배열하고, 북측에는 안방을 앉혔습니다. 별당채는 실질적인 정사 건물로서 전면에 툇간을 들이고 그 뒤편 좌측에는 온돌방을 두었으며, 우측에는 대청을 두었습니다. 사랑채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각기 온돌방을 배열하였으며 정면에는 툇마루를 놓고 그 양단 측면에 문을 달았습니다.
하회마을은 연화부수형의 길지로 풍산 류씨의 집성촌입니다.
하회(河回)마을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형국으로, 이름 그대로 강물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상 길지로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닙니다. 마을 북쪽에 산이 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북쪽에도 평지 가운데 야트막한 산이 있긴 있으나 남쪽은 아예 강 건너자마자 산지가 펼쳐집니다. 주산인 화산도 북쪽보다는 동쪽에 가깝고 그래서 마을 북서쪽에 마을 숲을 만드는 등 비보를 하였습니다.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며 지금도 마을주민의 70%가 류씨입니다. 풍산 류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약 600여 년 전으로, 류씨가 터를 잡기 전에는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가 먼저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었습니다. 하회탈의 제작자가 고려 중엽의 허 도령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빗대서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 류씨 배판(杯盤)’이라는 속언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주민들을 내몰게 된 동기는 안씨 집안의 딸 하나가 류씨 집안으로 출가를 하면서 안씨 집안의 기운이 외손인 류씨들한테 이어져 씨족의 터전을 빼앗겨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충효당, 양진당, 원지정사, 북촌댁 등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은 고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 후손과 문하생들이 류성룡의 유덕을 기리는 위하여 1600년대에 지었습니다. 당호를 ‘충효당’이라 한 이유는 류성룡이 평소에 자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자주 하였기에 이를 받들어 이름 지은 것입니다.
류성룡의 손자 졸재 류원지가 먼저 내당을, 증손인 눌재 류의하가 외당을, 8세손 류상조가 행랑채를 완성하였고, 증축한 부분은 ‘ㅁ’자형에서 돌출된 사랑방 우측 1칸과 사랑 대청을 비롯한 5칸입니다.
건물은 총 52칸으로 행랑채 뒤편에 조금 떨어져 ‘ㅁ’자형 안채와 안채 앞쪽 우측에 연접되어 돌출한 ‘ㅡ’자형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랑채 뒤쪽에는 별동을 이룬 사당이 있고, 오른쪽 대지의 가장 깊은 곳에는 류성룡의 유물을 진열, 보관하고 있는 영모각이 있습니다. 행랑채는 사랑채의 중심선과 거의 일치하는 곳에 솟을대문의 대문간을 냈습니다.
사랑채는 사랑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측에는 사랑방과 침방을 앞뒤에 놓고, 우측에는 작은 마루와 방을 앞뒤로 두었습니다. 작은 마루와 방 사이에 낸 조그마한 들창과 대청과 방 사이에 나 있는 아주 낮은 외여닫이 창도 방풍을 위한 것입니다. 전면과 우측면에는 계자각 난간을 돌려 건물의 격을 높였습니다.
사랑채 좌측 내외 담에 나 있는 협문을 통하여 안채 중문간에 들어서면 높은 기단 위에 가로놓인 안방과 안 대청이 있으며, 그 좌우에 좌 익사, 우 익사가 1단 낮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안방 앞에 전퇴를 들여 동선의 연결을 꾀하고, 안방 부엌에 접한 좌 익사와 우 익사 통로의 부엌 부분을 2층 구조로 하여 그 상부에 수납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대청, 방, 상부 다락 등에는 충효당의 건립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옛날식의 영쌍창(欞雙窓)이 있습니다. 사당은 앞쪽에 삼문을 내고 서향인 본채와는 달리 남향으로 앉혔습니다.
원지정사(遠志精舍)는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화천 건너편에 우뚝 솟은 부용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곳에 1573년(선조 6) 류성룡이 건립하였으며 1781년(정조 5) 연좌루를 중수하였고, 1979년에 사주문을 신축하였습니다. 서애 류성룡이 부친상을 당하자 낙향하여 건립한 정사로, 류성룡이 병이 났을 때 요양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원지(遠志)는 약초의 일종인 소초(小草)로서 ‘심기를 다스리고 번거로움을 제거하기 위함’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건물은 사주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정사가 있고 우측 앞쪽에 연좌루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사는 맨 좌측에 마루를 두고 그 우측에 온돌방을 놓았으며 정면 모두에 툇마루를 시설하고 마루 전면을 개방하였습니다. 연좌루는 중층 누각으로 중앙에는 마루 하부에만 기둥을 세워 상부 마루를 넓게 사용하게 하였고 상부 마루는 앞줄 좌측 칸 아래 설치한 계단을 이용해서 오르내리게 하였습니다. 사방을 개방하고 계자각 난간을 돌린 마루 앞으로는 부용대의 절경과 그 양편의 겸암정사와 옥연정사 일대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양진당(養眞堂)은 16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겸암 류운룡의 종택입니다. 류운룡이 입암 류중영의 장자이기 때문에 류중영의 종택이기도 하고, 풍산 류씨 대종택이기도 합니다. 풍산 류씨 하회마을 입향조인 전서 류종혜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에 지은 것으로 안채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후에 다시 지었으며, 화재로 손상된 흔적이 안채와 맞닿은 사랑채 부분에 남아 있습니다. 내부에는 한석봉이 쓴 ‘養眞堂’이란 당호와 함께 여러 현판이 걸려 있는데 류중영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도 걸려 있습니다. 양진당은 류운룡의 6세손 류영의 어릴 때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왼쪽에는 중 문간채와 안채로 이루어진 ‘ㅁ’자형 몸채가 있고, 몸채 오른쪽 뒤편에는 몸채에 연접하여 돌출된 ‘一’자형 사랑채가 있습니다. 사랑 마당 앞쪽에는 중 문간채와 이어진 ‘一’자형 행랑채가 있습니다. 사랑채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앉아 있으며 왼쪽에는 넓은 사랑 대청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사랑방과 함께 앞뒤로 작은방과 서재가 있습니다.
사랑채 뒤편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두 개의 사당은 각각 별도의 삼문을 낸 두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당에는 류중영과 류운룡 부자가 각각 불천위로 모셔져 있습니다. 한 종택에 두 사람의 불천위가 모셔진 것은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류운룡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중영의 장자로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진보 현감, 사복시 첨정, 풍기군수 등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겸암집>이 있습니다.
북촌댁(화경당 고택)은 양진당과 함께 하회 북촌을 대표하는 규모가 큰 집으로 건물은 지중추부사 류사춘이 1797년(정조 21)에 작은 사랑과 좌, 우익 사랑을 처음 건립하였고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 도사를 지낸 증손 석호 류도성이 1862년(철종 13)에 건립하였습니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입니다.
북촌댁에는 북촌유거, 화경당, 수신와, 사당, 탱화산과 별당 등이 있습니다.
북촌유거(北村幽居)는 할아버지께서 거주하시던 사랑으로, 간혹 외빈 접객용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방 4개, 대청, 누마루, 정지와 그 위에 다락, 그리고 툇마루, 쪽마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마을의 3대 풍광을 동시에 볼 수 있는데 정면 동쪽으로는 하회의 주산인 화산(花山)을 마주하며, 북쪽으로는 부용대와 낙동강을,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화경당(和敬堂)은 경제권을 가진 바깥주인이 기거하던 사랑이며, 화경당 편액은 정조, 순조 대에 초계문신과 예조, 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의 당호로, 가족과 친족 간에 화목하고 임금과 어른을 공경하라는 뜻이며 충효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뜻으로, 한석봉의 글씨입니다.
수신와(須愼窩)는 손자가 기거하던 곳인데 사랑 중 가장 작은 규모로, 방 오른쪽에는 어린 손자가 안채의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중문을 통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조그만 문을 달아 배려했습니다. 수신와는 류도성의 별호로 어렵게 사는 이웃을 의식해 언제나 삼가면서 낮추어 살라는 화경당 북촌의 정신으로 어릴 때부터 방을 드나들 때마다 쳐다보고 일깨우라는 어른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촌유거를 쓴 이는 해사 김성근입니다.
안채는 서북쪽 모서리에 큰 부엌을 두고, 동쪽에 안방을 두었으며 안으로는 4칸으로 나뉘어 마치 함경도지방의 田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엌 쪽 전면이 안방이고, 북쪽은 의걸이 등을 놓아두는 곳이며, 동쪽 전면 방은 안방의 윗방입니다.
사당은 출입문은 삼문이고, 대문채는 대문, 곶간, 가마칸, 마굿간 등이 있습니다. 외벽 아랫도리는 돌로 막쌓기로 하였고, 그 위에 흙벽을 치고 표면에 와편을 가지런하게 쌓아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웅장해 보이도록 했습니다. 대문 앞면 양쪽에는 쌍희(囍)자를 양각하여 격을 높였습니다.
탱화산과 별당은 북촌댁의 후원입니다. 보호수로 지정된 탱자나무가 있어서 탱화산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후원 뒤의 공간은 원래 딸들이 살던 안 별당이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는데 이 건물이 있었으면 99칸 집이었으나 지금은 72칸 집입니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풍악서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고 합니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에 부친상을 당하여 하회에 와 있는 서애 선생에게 문의하니,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여 그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서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위판을 봉안하였습니다. 위판은 1620년(광해12) 합향하는 과정에서 여강서원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에 다시 병산에 복향 하였습니다. 1662년(현종 3)에 서애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의 위패도 모셨습니다. 1863년(철종 14)에 사액되었고 1868(고종 5)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지면서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에 각각 다시 지어졌습니다.
퇴계의 유적은 도산서원, 도산서당, 시사단, 퇴계종택, 퇴계태실, 온혜파 종택 등이 있습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이 타계하고 4년 뒤인 1574년(선조 7), 그가 세웠던 도산서당을 모체로 그 뒤편에 건립된 서원입니다. 퇴계는 46세 되던 1546년(명종 1) 한 해 전에 일어난 을사사화를 보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토계 인근에 양진암, 한서암, 정습당, 광영당 등을 지어 학문도 하고 제자들도 가르쳤는데 이때부터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1551년(명종 6)에는 한서암 근처에 계상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고 계상서당으로도 부족하여 1560년(명종 15)에는 지금의 위치에 도산서당을 세웠습니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은 이전의 계상서당과 한서암이 있던 곳과 달리 시야가 넓은 곳이었으며 고향 집과 청량산, 그리고 존경하는 선배였던 농암 이현보를 찾기에도 편한 길목이었습니다. 퇴계는 58세 되던 해에 설계도를 바탕으로 건축을 시작했으며 시공에는 승려 법련이 참여했는데 그가 입적하자 승려 정일이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60세 되던 해에 퇴계가 머물 완락재와 서당을 관리할 사람이 머물 암서헌을 포함한 3칸의 조그마한 건물을 완성했습니다.
이어 학생들이 머물 기숙사인 농운정사, 또 하나의 서재인 역락서재(역락재), 서당 전체를 관리할 고지기가 머물 하고직사 등 4동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도산서당의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도산서당은 지역 이름을 딴 것인데, 이 지역을 도산(陶山)이라고 한 까닭은 질그릇을 굽던 곳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산이 접힌 모습이 빚은 것처럼 보여 도산이라고 한 것 같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퇴계는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세우기 전에도 조선 각지에서 이루어지는 서원 건립과 운영에 관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비롯해 임고서원, 이산서원, 역동서원, 천곡서원 등 서원의 초창기 건립 시기에 사액을 청하거나 운영규칙을 정하고 서적을 펴내는 등 서원 교육의 바탕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 영역과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도산서원은 엄밀히 말하면 이황이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사후에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뉘어 볼 수 있습니다. 서당 영역의 건물로는 도산서당, 농운정사, 역락서재, 하고직사 같은 건물이 있으며, 서당 뒤쪽의 진도문을 기점으로는 서원의 영역으로 서원에는 제향 공간에는 사당인 상덕사와 삼문, 담장 등이 있고 강학 공간에는 강당인 전교당과 동, 서재인 박약재, 홍의재 그리고 정료대가 있습니다.
상덕사(尙德祠)는 퇴계 이황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건립되었고, 이후 제자인 월천 조목의 위패를 함께 모셨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입니다. 상덕사를 드나드는 정문은 삼문이고 정문 양옆으로 사당 주위를 둘렀던 토담은 1969년 보수 공사 때 돌담으로 모두 바꾸어 놓아 원래의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전교당(典敎堂)은 강당으로 1574년(선조 7) 건립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69년에 보수하였으며 정면에 걸린 ‘陶山書院’이라는 편액은 1575년 사액한 당대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입니다. 서쪽은 온돌방으로 ‘한존재(閑存齋)’라 이름을 붙였고 나머지는 대청을 만들었습니다. 대청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나, 우측면과 배면에는 칸마다 쌍여닫이 판장문을 두고 문틀 중앙에는 가운데 설주를 설치하였습니다.
강당 앞마당에는 홍의재와 박약재로 이름 붙여진 동재와 서재가 마주하고 있는데, 유생들의 기숙사입니다. 또한 건물의 기단 앞에는 높은 석주에 반원형의 돌을 받쳐 놓았는데, 이것은 밤에 관솔가지들을 태우던 정료대입니다.
시사단(試士壇)은 본래 1792년(정조 16) 3월에 정조가 이조판서 이만수에게 명하여 퇴계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안동 지역의 인재를 선발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도산별과는 문과 2인, 진사 2인, 초시 7인, 상격 14인을 선발하는 별시로서 그 과시가 시사단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시사단은 나직하고 널찍한 2단의 자연석 돌림 상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 설단만 있었고 석비는 후에 세운 것입니다. 석비는 1796년(정조 20)에 세워졌으나, 지금의 비는 1824년(순조 24)에 비각의 개축과 더불어 고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영의정 채제공이 지었습니다. 시사단은 강변에 세워져 있었으며, 주변에는 송백림이 무성하였으나, 안동댐 건설로 분천강이 침수되어 수위가 상승하자 원래 위치에서 10m 높이의 석축을 쌓아 올려 원형대로 개건하였습니다. 시사단은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별과 시험을 치른 곳이라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서, 정조 때에도 이황의 학문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잘 말해 줍니다.
퇴계종택(退溪宗澤)은 이황의 종가로 처음에는 동암 이안도가 한서암 남쪽에 지었고 1715년(숙종 41)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건축하여 면모를 새롭게 하였으며 10세손 고계 이휘녕이 옛집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으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다 불타버렸고, 현재의 퇴계종택은 1926~1929년 13세손 하정 이충호의 주관으로 재건된 것입니다.
형태는 총 34칸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보면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 영역, 솟을대문과 추월한수정으로 이루어진 영역, 그리고 뒤쪽에 있는 사당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의 양쪽에 온돌방을 꾸몄고, 사랑채는 동쪽은 앞쪽에 툇마루를 놓고, 뒤 칸에는 사랑 마루방과 사랑방을 들였으며 서쪽은 책방, 작은 사랑방, 툇마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채는 안 대청 동쪽에는 앞뒤로 건넌방이 있고, 서쪽의 안방은 양 개문으로 통하게 된 방들입니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동 익사는 앞에서부터 중문간, 광, 방, 문간이, 서 익사는 창고, 방, 방, 문간이 이어져 있습니다.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앉아 있는 추월한수정은 ‘ㅡ’자형 집입니다. 대청 서쪽에 온돌을 앞뒤로 두었고, 동쪽에는 동서로 통 방을 앞뒤로 배치하고 전면에 툇마루를 길게 놓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공간 영역을 갖춘 가옥으로 품위와 규모를 갖춘 대종가이며 또한 옛 살림살이의 풍모도 비교적 남아 있는 편입니다.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은 이황이 태어난 집입니다. 몸채의 중앙에 돌출된 방에서 이황이 태어났다고 하여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이라 불렀습니다. 1454년(단종 2) 이황의 할아버지 이계양이 건립한 후에 이황의 14세손인 이가원에 의해 중수되었고, 1930년대 전면 개축하였습니다.
대문채 솟을대문인 성림문에 들어서면 마당 건너에 노송정이 자리하고, 그 좌측에 ‘ㅁ’자형 몸채가 있으며, 우측에는 사당이 별도로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몸채는 안마당 가운데에 태실이 돌출되어 있고 그 바로 뒤편에 안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태실은 남쪽에 툇마루를 두고 삼면에는 계자각 난간을 돌린 헌함(軒檻)을 설치하여 누처럼 꾸몄습니다. 몸채 정면의 중문간 우측에 접한 사랑 공간은 큰 사랑방이 마루방이 가로로 놓이고 마루방에 직교한 작은 사랑방이 안채 쪽으로 꺾이면서 ‘ㄱ’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황은 155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풍기군수,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학봉 김성일의 유적은 임천서원, 학봉종택, 의성김씨종택 등이 있습니다.
임천서원(臨川書院)은 학봉 김성일을 추모하기 위해 1607년(선조 40) 임천향사로 건립하였는데, 1618년(광해군 10) 임천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1847년(헌종 13) 석문정사 서편으로 이건되었으나,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9년에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습니다. 경내에는 강당인 홍교당과 묘우인 숭정사, 동재, 서재, 전사청 등이 있습니다.
학봉종택(鶴峰宗澤)은 학봉 김성일이 살았던 가옥입니다.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된다며 김성일의 8세손 김광찬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m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았고, 학봉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다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종택의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계서당으로 쓰도록 하였고, 소계서당을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몄습니다.
근년에 지은 서북쪽으로 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왼쪽에 정침과 그 뒤쪽의 사당이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마당 건너편에는 근년에 지은 운장각과 정자가 서북향으로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정침은 ‘ㅁ’자에 양익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최근 왼쪽에 직각으로 ‘一’자 아래채를 달아내어 사(巳)자 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침의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돌출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두고 앞면에 길게 툇마루를 둔 중당협실형의 소계서당을 개조하면서 사랑방과 사랑 마루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랑방 왼쪽에는 작은 사랑방을 두었으며, 뒤로는 책방을 놓아 안채의 우 익사에 연결하였습니다. 안채는 오른쪽으로 대청으로 꾸미고, 왼쪽에는 안방을 두고 끝에 부엌을 놓았으며, 그 앞쪽의 좌 익사는 식당 등으로 내부가 개조되었습니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토석 담장을 둘러 별곽을 이루었습니다.
의성김씨종택(義城金氏宗澤)은 의성김씨 청계 김진의 종가입니다. 김진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호는 청계이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을 찾아 가르침을 배워 견문을 넓히고 학업에 정진하였습니다. 그는 다섯 아들인 김극일, 김수일, 김명일, 김성일, 김복일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볼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고 훈계하였고, 모두 현달한 인물로 키워서 의성김씨 천전파를 열었습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지금의 의성김씨종택은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졌던 것을 김성일이 재건한 것이라 전하는데 김성일이 명나라 사행길에 북경에서 그곳 상류층 주택의 설계도를 그려다가 완성했기 때문에 그 배치나 구조에서 독특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ㅁ’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행랑채와 부속채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巳’자 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행랑채에서 안뜰로 통하는 중문이 없어 외부 사람이 드나들 수 없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교 사상의 남녀유별, 내외 사상을 건물 구성에 반영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안채는 다른 ‘ㅁ’자형 평면과 달리 안방이 외부에 놓이고 커다란 대청이 이중으로 동향하고 있습니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별채처럼 외진 곳에 배치하여 내객이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곧장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랑채에 이어지는 부속채는 완전한 2층 구조로 되어 있고, 위층은 서고로서 사랑의 대청과 이어지고 아래층은 헛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성일은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합격한 이후 이조좌랑, 병조좌랑, 함경도 순무 어사,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577년(선조 10)에는 사은사를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1590년(선조 23)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초유사, 경상좌도 관찰사, 경상우도 관찰사 등을 지내면서 곽재우 등의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등 국난 극복에 힘쓰다가 진주성에서 순직하였습니다.
호계서원(虎溪書院)은 퇴계 이황을 모시기 위해 처음 세워진 서원으로, 1573년(선조 6) 사림들이 퇴계 선생이 젊었을 때 독서 하던 곳인 안동부 동북쪽 여산촌 오로봉 아래에 있는 백련사 절터에 여강서원을 세워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영가지>에 의하면 그 규모가 사당인 존도사가 6칸, 신문 3칸, 신주 5칸, 강당인 숭교당이 15칸, 동재인 구인재 4칸, 서재인 명의재 4칸, 진학문 1칸, 동몽재 15칸, 유사방 5칸, 재주 15칸, 보상고 15칸 등 92칸이나 되었습니다.
1605년(선조 38)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자 1606년 북쪽으로 100보 위치에 중창하였고 1620년(광해군 12) 이황의 큰 제자인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이때 이황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는 논란이 크게 벌어졌는데 이를 ‘병호시비(屛虎是非)’라 합니다. 위차(位次)는 도학의 고하를 논하여야 하지만 이를 판단하는 것이 어려워 현실적으로 작위와 나이가 그 기준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서애와 학봉의 위차(位次) 문제로 병호시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류성룡 계열에서는 작위를 내세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을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고, 김성일 계열에서는 나이를 내세워 4살 위인 김성일을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논란 속에 당시 영남을 대표하던 정경세의 자문으로 류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두는 ‘애동학서(厓東鶴西)’로 결정되었습니다. 참고로 반대로 정해졌다고 설명되는 자료도 있습니다. 류성룡 계열은 풍산의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김성일 계열은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해갔기에 류성룡 계열을 병파, 김성일 계열을 호파라 불렀습니다.
1676년(숙종 2) 남인 세력의 지원을 받아 호계서원(虎溪書院)으로 바뀌어 사액을 받았습니다. 이후 퇴계 이황은 도산서원, 서애 류성룡은 병산서원, 학봉 김성일은 임천서원에 따로 모셔지고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강당만 복원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5월) <안동고을>을 확인 바랍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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